김우창 교수를 직접 인터뷰하지 않았으므로 그분의 의도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기사원문에 있는 짧은 동영상을 보았을 때에 촛불집회의 한계 내지는 부정적 측면에 대해 언급한 것은 맞는 듯 하다. 물론 촛불집회의 한계나 문제점을 이야기 했다고 해서 그 분의 생각이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김우창 교수의 생각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전적으로 옳다고 적극 동의하기도 어려운 입장인데, 그 이유는 "공화적 이상 실현"의 책임을 촛불집회에만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비치기 때문이다(질문에 한정된 답변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만약 조선일보의 기사가 김우창 교수의 생각을 왜곡하지 않았다면, 나는 김우창 교수의 생각에도 약간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촛불집회의 현재적 한계와 문제점만을 바라 보았을 뿐 촛불집회가 갖는 긍정적 의미에 대해서는 한 푼어치도 쳐주지 않은 부당함이 있기 때문이다.
기실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공화적 이상 실현"에 걸림돌이 되어 온 것은 촛불집회가 아니다. 한국 현대사를 보면 "공화국"이라는 말 자체가 쑥스러울 지경이고, 그래서 어느 헌법학자는 그 역사 속에서 공화국인 채 하는 정권들을 보며 '공화국 모독죄'를 신설해야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나아가 제1공화국, 제2공화국, 제3공화국... 아무렇게나 갖다 붙이는 (정리 불가능한) 공화국 차수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이런 물음을 던져 보겠다. 지금 대한민국은 몇 공화국인가? 현 정부는 지난 '좌파정권'과 결별을 선언하기 위해 "제7공화국"이라 명명하고 싶을 지는 모르겠으나, 동의를 얻기는 힘들 것이다. 현행 헌법을 기준으로 하면, 제6공화국으로 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현 정권은 "제6공화국 5기"가 될 것이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다음이란 얘기다. 그런데 이렇게 정리해도 별로 의미는 없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언제 공화국 같았냐는 게 문제다. 허무주의를 경계하지만 그만큼 대한민국은 '공화국'이면서 공화국 같지가 않았다.(북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지만, 그게 어디 공화국인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촛불집회는 공화적 이상 실현의 걸림돌이 아니다. 나는 오히려 공화주의적 정치문화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한다. 물론 김우창 교수가 말하는 것처럼 촛불집회에도 한계와 문제점이 있고, 그런 지적에 설득력이 있다고 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풀어나가야 할 '과제'에 속하는 것이지, 촛불집회 자체가 미래의 공화제 발전에 걸림돌이 된다는 뜻이어서는 안 된다.
한편, 촛불집회의 한계와 문제점이 어디에서부터 기인하는가에 대한 물음도 제기할 수 있는데, 김우창 교수는 인터뷰 기사에 게재된 동영상에서 지행합일 사상으로 인해 행동(실천)을 중시하는 '유교적 전통'의 잘못된 발로라고 보는 듯 하다. 아울러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스스로에게 적용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형태로 표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역시 일리 있는 지적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 점에 있어서도 완전하게 동의할 수는 없다. 김우창 교수가 말하는 유교적 전통의 습성인 측면도 있을 수 있겠으나 그것이 본질적 이유라고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오히려 촛불집회가 반공화제적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나온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반공화제적 상황이란 사회구성원이면서 주권자 국민의 일원(주권은 '국민'에게 있는 것이지 '개인'에게는 없다)으로 자각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각과 입장이 전혀 고려되지 않고, 권력집단이 결정하면 하는 대로 따라야 하는 억압적 상태를 말한다.
만약 이런 생각이 설득력이 있다면, 현재적 관점에서 "촛불집회로는 공화적 이상 실현이 어렵다"는 주장은 '왜곡'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어도 앞뒤 잘라낸 그야말로 쌩뚱맞는 말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주장을 완전히 배척해서도 안 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개인적인 생각을 말하자면, 촛불집회가 공화적으로 등장하긴 했지만, 앞으로 공화적 이상을 실현해 나가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며, 그때는 김우창 교수의 지적이 옳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김우창 교수 인터뷰 기사가 계속 떠올라 이런 저런 생각을 해가며 신문을 넘겼는데, 뒷 부분에 이르러서 다음과 같은 글을 발견했다.
글을 빠르게 읽어 내려가며 나는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앞에 있는 것은 인터뷰 기사요, 뒤에 있는 것은 칼럼이므로 '일관성'이라는 잣대로 판단할 수 없고, 이것이 공식적으로 조선일보의 입장이라고 할 수도 없겠지만(비공식적으로는 아니라고 할 수도 없겠지만;;), "공화적 이상 실현"이라는 주제를 담았던 신문이, 돌연 공화국 대통령에 대해 '좌파와의 전쟁'을 시작하라는 글을 동시에 담고 있으니, 나로서는 실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조선일보가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혼란을 느낄 독자를 위해 김대중 칼럼에 '편집자 주'라도 달아 놓았어야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우창 교수의 인터뷰 기사는 그래도 설득력이 있는 부분이 있고, 주의 깊게 음미해 볼 가치가 있다 여겼지만, 김대중 고문의 칼럼은 단언하건대 일고의 가치도 없다. 아이들 교과서에 '反공화주의적 생각'의 예시가 필요하다면 나는 주저없이 이 글을 추천하겠다. 더 말할 것도 없이 앞서 얘기한 김우창 교수의 인터뷰 기사 제목을 그대로 빌리면 된다.
"김대중 칼럼으로는 공화적 이상 실현 어려워"
정치적 입장이나 생각, 지향하는 바가 다르다고 하여, 같은 사회구성원을 대화와 타협의 대상이 아닌 '적'으로 삼는 국가는 영원히 공화국이 될 수 없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민주공화국' 국민의 일원이 될 자격이 없는 것이다.
김대중 고문의 주장에서 쓰이는 근거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좌파가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위 말하는 좌파가 집권했을 때 좌파의 발목은 누가 잡고 있었던가. (아참, 김대중 고문이 좌파집권시기를 공화국 정부로 보는지부터 확인해야 될 것 같다.)
지난 일 갖고 편을 갈라 싸우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김우창 교수가 말하듯 공화적 이상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공화에 걸맞는 합리적 체제가 필요하다. 그 체제의 기본은 "보다 너그럽고 관대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진보진영에서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지만, 보수진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대중 고문이 말하는 것이 과연 '공화'일 수 있는가? 그것은 독선과 아집의 주문일 뿐이고, 공화적 체제와 이상을 무너뜨리는 행위일 뿐이다.
공교롭게 같은 일자에 실려 미리 읽어 보지 못했겠지만, 김대중 고문에게 조선일보를 '열독'할 것을 권해본다.
* 이 글은 인하대학교 법과대학 국순옥 교수님(현 명예교수)의
1997년 2학기 '민주주의와 기본적 인권' 강의의 일부분을 정리한 것임.
인권사상은 본래 서구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동양의 전통적인 '덕치사상'에서 인권에 관한 구체적인 사항을 찾기는 어렵다. 더욱이 세계 제2차대전 이전까지 서양과 동양은 지배-피지배관계에 놓임으로써 물리적 폭력에 의한 직접지배의 객체였던 동양의 '식민지' 국가는 '인권관념'을 이야기할 아무런 역사적 소재가 없었다.
이후 지배의 방식이 '직접지배'에서 식민지 사회에 토착정부를 수립하여 막후 조정하는 '간접지배'의 방식으로 전환되었지만, 이러한 '신식민지' 국가에 대한 인권탄압은 직접지배의 식민지 시대보다 더 엄혹했다(예를 들면 베트남, 필리핀, 남미에서의 인권탄압). 따라서 인권이 헌법에 규정되어 있더라도 토착정부를 매개로 한 간접지배로 인해 인권탄압이 자행된다면 인권문제는 헌법만의 문제가 아닌 세계적 차원에서 구상해야 될 문제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60~70년대에는 외국자본이 값싼 노동력을 착취하였지만, 80~90년대에 외국정부와 노조는 노동3권을 제대로 보장하라는 요구를 하며 역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같은 역압력은 한국의 값싼 임금에 따른 미국의 실업증가를 해소하기 위하여 한국의 경쟁력을 저하시키기 위한 압력이다.
80~90년대에 우리는 이처럼 외국의 직간접적인 지배의 희생양이 되어 왔지만 인권보장의 측면에서는 역으로 선진국화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를 '인권의 세계화 현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이 우리 스스로 주도한 것이 아니라 타율적으로 인도되었다는 측면에서는 역시 선진자본주의국가의 지배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를 '인권의 부메랑 효과'라고 하며 제2차 세계대전이후 지속되어 왔다.
(1) 국제연합 인권선언
국제연합 인권선언의 작성과정은 매우 복잡하다. 전후 승전국은 적대적 관계로 분열하여 인류의 보편적인 권리규정이-기술적으로도-어렵게 되었다. 사회주의 국가에는 자유권의 관념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사회권에 대해서는 근로대중을 포함한 모든 인민의 생존, 생활을 보장하려는 사회주의 체제와 '보충성의 원칙'을 강조하는 자본주의국가간의 첨예한 대립이 있었다. 다시말해 이념상의 차이로 인하여 엄청난 격돌이 있었으며 결국 자유권, 정치적 권리, 참정권에 관한 권리를 작성하였지만 모든 가맹국들에게 준수를 요하는, 즉 구속하는 것이 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선언은 인권문제를 논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이는 역사적인 진전이라고 볼 수 있다.
(2) 유럽에서의 인권
인권의 역사는 곧 유럽(동구권을 제외한 서독의 이남, 이서를 지칭함) 인권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1950년대 '유럽인권규약'은 주로 자유권을 중심으로 규정되었는데, 법적 구속력을 확보하려는 인식하에 만들어져 구속력이 강하였다. '유럽사회헌장'은 사회적 생존, 생활(사회권)에 관한 규정으로서 경제, 재정능력의 차이로 국가마다 상황이 다르므로 재량의 여지를 마련하여 제정되었다. 또한 프랑스에 인권재판소가 설치되어 규약위반국가에 대한 권리구제의 방안을 마련하였다. 인권보장의 역사는 유럽에서 본격적으로 개화되었다.
(3) 제3세계에서의 인권
세계의 양극화에 따라 자본주의국가를 제1세계라 하며, 신생사회주의국가를 제2세계, 여타 국가를 제3세계라 지칭하는데, 제3세계의 국가는 과거 식민지 상태에서 간신히 독립을 쟁취한 국가들이다. 제3세계는 인권보장의 전통을 결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인권선언이 구속력이 없었기 때문에 인권을 이야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또한 경제적 자립이 급선무이었으므로 외국의 지나친 간섭을 배제하려는 데 역점을 두었으며, 그 결과 경제적 자립은 어느 정도 성취하였으나 인권문제가 대두되게 되었다. 여기서 인권상황을 검토하여 헌법해석에 도입할 필요성이 생긴다.
(4) 기본권 해석에 관한 발상전환의 필요성
오늘날 경제적 국경은 없어져 가고 있다. 따라서 외국인(외국자본)의 토지취득제한과 같은 소유권의 제한은 국제적인 마찰의 소지가 있으며, 반면에 자본, 기술, 능력이 월등한 사람들만의 직업선택의 자유는 비난과 공격의 우려가 있게 된다.
상호주의 원칙을 도입하는 것도 현실적으로는 어렵기 때문에 보완할 수 있는 체제, 제도의 필요성과 기본권을 창조적으로 해석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90년대 이전까지도 많은 진보적인 학자들은 특수성의 관점에서 인권의 보편성에 관한 주장을 부르주아적 관점이라 하여 매우 심한 거부반응을 일으켜 왔으나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은 발상을 전환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사회보장체계에 있어서 아직 배울 점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자유권과 관련된 보편성을 부정하여 붕괴되어 버렸다. 이제는 인권의 보편성을 고민할 수 있는 시기가 도래하였다. 인권의 체계적, 구조적 정립은 각 사회가 떠 맡은 역사적 과제이며, 이에는 타율적으로 들어 온 문화를 수호하려는 노력과 의지가 필요하다.
지난 금요일 퇴근길, 문화일보를 집어 들고 나와 전철에서 읽던 중 강경근 교수의 기고문이 눈에 들어 왔다. 법학을 공부한 터라 이번 용산 참사에 관하여 헌법학자의 시각은 어떨까 궁금하여 주의깊게 읽었다. 기고문을 거칠게 요약해보면, ① 법치주의의 확립을 위하여, ② 이제는 헌법국가의 정부와 법에 무력(폭력)으로 저항해온 단체들을 근절해야 하며, ③ 그러기 위해 전철련을 본보기로 삼아 확실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음에도, 나로서는 매우 실망스러운 글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글에서 강경근 교수를 비난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그 분에 대해 단정같은 것을 내릴 생각은 없다. 단지, 내가 가진 생각과 의문을 제시해 공유하고 소통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1. "한국 법치주의의 비극"에 대한 견해
강 교수는 한국 법치주의의 비극이 "법은 존재하되 그 법을 집행하는 정부는 실종된 현실에 있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 말의 뜻은 강 교수가 곧바로 설명하고 있듯이 "자기에게 불리하면 국회에서 의결돼 시행중인 법이 있어도 이를 '악법'이라 하면서 헌법국가의 정부와 법에 저항"하는 존재(단체)가 있는 현실을 의미한다.
그러나 강 교수가 말문을 열었던 첫번째 표현만으로 보자면, 전혀 다르게 보이는 정치적 입장에서도 설득력이 있다. 이를테면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의 현실, '법은 멀고 권력은 가깝다'는 '법원권근(法遠權近)'의 현실에 딱 들어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법은 존재하되 돈과 권력이 법을 무시하고 그 법을 집행하는 정부는 실종돼 있다.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차이가 있다면 법을 집행해야 할 자들이 법을 무시하거나 어기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한국 법치주의의 비극'은 후자에 더 가깝지만, 강 교수가 기고문에서 지적한 경우도 비극임에는 틀림없다. 다만, 전철련 같이 '빨갱이'과(科)에 속하는 경우도 있지만, 헌법국가의 정부와 법을 친북좌파 정권이라 하며 쿠데타라도 일으킬 것처럼 군복 입고 나오는 '보수꼴통'과도 있다는 점은 분명히 해두어야 오해가 없을 것이다.
어쨌든 두 과가 모두 법치주의의 비극이라는 게 내 견해다. 모두가 지켜야 할 법이 있음에도 그 법을 우습게 어기는 경우를 '법치주의의 비극'이라 하지 않으면 무어라 하겠는가. 강 교수의 지적에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을 가져 본다. 어떤 비극이 더 본질적일까? 어떤 비극이 더 심각한 비극일까? 헌법국가의 정부와 법에 저항하는 비극일까? 아니면 '유전무죄 무전유죄', '법원권근'의 비극일까? 나는 당연히 후자일 수밖에 없다고 본다. 전자는 '단체'에 불과하지만, 후자는 '사회구조'이기 때문이다. 전자는 법의 이름으로 진압이라도 할 수 있지만, 후자는 오히려 법과 체제의 이름으로 쉽게 옹호되거나 조용히 묻히기 때문이다.
'법치주의'의 역사적 의미를 생각할 때에도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비극적이다. 법치주의는 누구나 법의 지배를 받는다는 뜻이지만, 특별히 권력자, 특권층, 지배계급도 똑같이 그래야 한다는 역사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봉건시대의 왕이나 귀족, 성직자와 같은 특권계층도 예외 없이 법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법치주의가 등장한 이유다.
나는 이번 용산 참사에서도 법치주의의 본질적 비극은 있다고 본다. 용역깡패처럼 돈이나 권력에 의해 움직이는 자들은 법을 지켰을까? 또 경찰들은 법을 제대로 지켰을까? 만약 경찰이 법을 어겼다면 그들도 예외없이 처벌을 받을까? 이번 참사에 대해 정치권력은 객관적이고 공정한 법치주의를 실현하고자 노력하고 있을까? 법치주의를 무시해온 전철련이라는 단체에 대한 강 교수의 지적에 동의를 하면서도 그의 주장이 부족해 보이는 이유는 한국 법치주의의 본질적 비극을 놓아 둔 채 현상적 비극에 분노하고 있기 때문이다.
2. 강경근 교수의 눈을 가리고 있는 '법실증주의'라는 이름의 눈가리개
강 교수는 이명박 정부로 하여금 "악법과 무법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그런 용기를 보여주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선진화"는 없다고 하며, 눈가리개를 벗어야 한다고 한다. 나 역시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렇게 쉽게 동의할 수 있음에도 사실은 다른 점이 너무나 많다고 느낀다.
한 가지 강 교수에게 묻고 싶은 것은, 그 악순환의 고리를 어떻게 끊을 수 있는가, 어떻게 끊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추측해 보건대 기고문의 전체적인 내용을 보았을 때 그가 주문하는 것은, 수사기관과 사법부에 의한 준엄하고 철저한 심판이다. 그러나 다시 묻고 싶다. 그런 철저한 심판만으로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질까?
전철련이 법을 어긴 행위를 덮어두자는 말이 아니다. 법을 어긴 자가 있으면 그게 누구든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단지 그와 같은 방식으로는 강 교수가 말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생각에는 사회적 갈등과 문제현실이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강 교수에게 실망하는 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법학자이므로 법실증주의를 견지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임에도 기고문만으로 보자면 지나치게 법실증주의에 매몰돼 있다는 생각이다.
법학자를 포함한 법률가에게 있어 필요한 것은 법실증주의 뿐만은 아니다. 대학시절 어느 법철학 교수님으로부터 '자연법사상과 법실증주의'에 관한 아주 의미 있는 특강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분의 주장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규범을 위해 법실증주의를, 멋있는 법을 위해 자연법 사상을 조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강 교수에게 묻고 싶다. 용산 참사는 오직 전철련의 잘못일 뿐인가? 이번 사태에서도 법을 위반한 자들은 모두 처벌받아야 한다. 강 교수가 기고문을 통해 촉구하지 않아도 그렇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법의 적용과 집행이 공평하고 정당한 것인지 의문을 갖고 있다.
3. 법학자에게 기대되는 노력의 결여
이번 사태를 계기로 대학시절 읽었던, 어느 형법학자가 쓴 소논문 하나가 떠올랐다. '화염병법의 폭력성'이라는 글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수년 전 안타깝게 돌아가신 故 김순태 교수의 글이다.
그 글에서 인상 깊었던 논리는, '폭력'은 '지배폭력'과 '저항폭력'으로 나뉜다는 것이다. 군사독재에 저항하며 민주화 투쟁을 벌였던 우리 사회에서 '화염병'은 지배폭력에 저항하기 위한 저항폭력이었다는 것이다. 폭력은 폭력이지 저항폭력은 뭐냐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렇게 생소한 논리가 아니다. '정당방위'가 바로 그와 같은 논리이기 때문이다.
물론 화염병 투척이 정당방위라는 말은 아니다. 실정법이 있으므로 처벌의 대상이지만, 학문적으로 그게 끝이라면 법학자들은 그다지 할 일이 없을 것 같다. 법학자가 단순히 '실정법 해설가'는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강경근 교수의 글에는 문제현실에 대한 최소한의 판단과정이 없다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매우 불행한 사건이 발생하게 된 원인과 과정을 학자로서 객관적으로 규명하고 해석하려 하기 보다는 마치 일방적으로 사건을 심리종결하고 선고하듯 하고 있다. 강 교수가 경찰청 소속이었다면 이해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안타까운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법이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인식되는 사회, 배우지 못하고 돈도 권력도 없으면 도무지 법이 법 같지가 않은 사회에서, 갈등의 사회적 배경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부르짖는 '철저한 법 집행'은 그 자체가 '지배적 폭력'으로 인식된다. 법학자라면 이런 인식에도 대답을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4. 전철련의 책임과 강 교수의 성급한 판단
정치적이든 법적이든 전철련은 이번 사태의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진실에 대한 규명없이 이번 사태의 책임이 모두 전철련에 있는 것처럼 두루뭉술 넘어가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전철련의 책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설령 경찰에 의한 잘못이었음이 드러난다고 해도 전철련은 결코 씻을 수 없는 무거운 책임이 있음을 느껴야 한다.
일반 철거민이 아닌 전철련 집행부에 대해서는 그동안 운동권 내부에서도 이런저런 비판이 많았다. 그러나 전철련은 자신들에 대한 그 어떤 쓴소리도 제대로 들으려 하지 않았고, 심지어 비판적 기사를 쓴 진보언론(월간 말)에 대해서도 폭력을 행사한 전력이 있다.
법적 판단을 접어 둔다면 전철련은 이처럼 무모한 희생을 만들어 낸 원인이 결국 자신들에게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정당한 비판에 귀 기울이지 않고, 독선과 아집으로 일관해온 결과이다. 강 교수가 기고문을 통해 언급한 모든 사건이 오직 전철련의 책임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렵지만, 전철련이 문제가 있는 조직이라는 점에는 틀림이 없다.
다만, 전철련이 문제가 있는 조직이라 해서 이번 용산 참사에서 그들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참사에 대해선 무엇보다 객관적이고 명확한 진실규명이 가장 중요하다.
전철련에 대해선 나도 강 교수만큼이나 문제가 있다고 보지만, 그것으로 법적 판단이 끝난 것은 아니다. 강 교수의 글에 대한 실망은 그런 성급함에 있다.
Green Monkey Blog** 2009/01/26 22:40 x
제목 : 영화 <레지던트 이블 3>에서 본 광기어린 '언데드월드 MB코리아'
영화 <레지던트 이블 3>에서 본 광기어린 '언데드월드 MB코리아' 분노와 영혼 그리고 인간성마저 거세된 2009 한국은 생지옥!! * 다소 거북한 영화 리뷰니 심장이 약하거나 영혼을 팔아먹은 분들은 피하시길... 설연휴가 시작된 어제(24일)는 20일 인면수심의 더러운 살인정권과 건설자본의 '경비견(용역깡패, 경찰)'들의 살인적이고 야만적인 강제진압에 의한 용산 참극 이후 뒤늦게 찾은, 23일 용산참사 범국민추모대회에 대해 블로그에 정리해 올리느라.....more
논리적인 접근방식으로 사회학적인 방식이 맞지 않을까요??? 강교수님은 이러한 측면에서 말씀을 하신것 같읍니다. 여기에서 다소 우리가 종교학적인 측면이라던지 다른 논리로 해석하고 이해한다면 아마도 단 몇줄의 기고나 칼럼리스트도 우리국민들은 접할 수 없는 안타까운 현실이 오지 않을까요....
법치의 논리와 경륜으로 이시대의 아픔과 절망 그리고 안타까움을 나름데로 하신 말씀이시지,다른 어떠한
뜻이 있으셔서 기고한 글은 않이듯합니다. 한편으로 저항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저렇게 프로적으로 대항할 수 있을까하여 깜짝 놀랐읍니다. 일반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법집행에 끝까지 게기면 할수없이 어느 정도는 타협점을 이끌어 낼수 있더라 하는 것이 지난 정권에 많이 나타나 있읍니다.
그래서 절대 미찌지 않는 장사닌까 해볼만 한것 않니냐 해서 전철연에서 적극나서 이권쨍기기 한것 처럼
보여지는 것이 사실 안타깝게 보여졌읍니다. 법 감정상 누가 어느쪽이 더 많은 피해를 입었느냐에 따라
우는 어린아이 달래듯 사탕입에 물려주는 그런 사법부의 안일한 처사도 실망스럽고 반대를 위한 반대의 글을 무슨 요식 행위를 하는것 처럼 붙여 놓는 일도 좀 자중하면서 칼럼의 내용을 독자나 국민들이 자연스럽게 접하면서 이해하고 느끼며 법치국가의 성숙된 국민의 의식이 나름데로 고취 될수 있도록 배려해 줄 수는 없겠는지요??? 우리 국민도 정치를 이해하고 판단하는 수준이 나름데로 있읍니다.
법조인들은 나름데로 기본 양심을 지켜와 이나라가 지탱지어지게 노력하고 계신것 않일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