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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제제기
우리 나라는 법적으로 사형제도를 인정하고 있다. 우리 나라의 형법과 군(軍)형법 등에 사형이라는 형벌이 규정되어 명문화되어 있으며, 정부는 실제로 사형제도를 실시해 오고 있다. 이수성 등 형법학자들이 사형제도의 부당성에 관한 논문을 학계에서 발표한 바 있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 1988년 국제사면위원회가 1989년을 [사형제도폐지의 해]라고 선언한 후, 그때까지 산발적이던 사형제도 폐지운동은 1989년 5월 종교인들과 법조인들이 중심이 되어 [한국사형폐지운동협의회]를 결성한 후부터 조심스럽게 시작되었다. 그 동안 여러 차례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는 사형제도의 위헌여부에 대한 심판을 하여야만 하였고, 그때마다 사형제도가 폐지되는 것이 원칙적으로 바람직하나 아직은 우리 사회에서 사형제도의 존치가 필요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최근에는 종교계가 앞장서서 사형제도폐지운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고, 금명간 국회에서 사형제도폐지법안이 상정되어 심의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 나라 철학계에서는 1997년 [대한철학회]의 논문집 {철학연구}에 문학성의 "사형제도의 도덕성에 대한 논쟁"이라는 논문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사형은 인간의 생명권과 직결되는 문제이므로 비단 법률적인 형벌의 문제일뿐만 아니라 또한 종교적인 문제이며 윤리적 문제이기도 하며, 특히 인간의 본질이해와 인간의 존엄성을 규명하려고 하는 철학적 인간학의 문제이기도 하다. 사형제도는 비단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아득한 옛날부터 시행되어 왔고, 당연시해 왔다. 그러나 아무도 이를 오랫동안 공개적으로 문제삼지 않았다.
사형제도폐지가 공공연히 논의된 것은 1714년 러시아제국의 엘리자베트 여황제가 사형제도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사형집행을 중지할 것을 선언한 것을 효시로 하며, 특히 1763년 이탈리아의 형법학자인 베카리아(Cesare Beccaria)가 저술한 {죄와 형벌}에서 잔인한 형벌인 사형의 폐지를 주장하면서부터라고 대체로 알려지고 있다. 그 이전에는 그리스도교에서조차도 사형제도를 인정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마르틴 부버, 쟝 칼벵(Jean Calvin) 등 신구교의 중요한 인물들도 사형제도를 인정했다. 그리고 철학자인 칸트, 헤겔, 루소, 공리주의자인 벤담과 밀도 사형제도를 옹호하는 글을 쓰기까지 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 인권사상이 대두되면서, 철학계에서도 본격적으로 인간학과 사회존재론적 사회윤리학의 측면에서 사형제도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사회존재론적 측면에서 보면, 사형제도는 근본적으로 모순이다. 왜 그런가? 사형제도는 원래 개인이 저지른 죄는 전적으로 개인의 책임이라는 개인윤리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개인이 죄를 짓게되는 것은 그 개인의 사회적 여건과 무관하지 않다. 어떤 개인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책임은 그 당사자 개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그 개인이 반드시 소속되어 있는 그 사회도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대부분의 범죄자들은 제대로 사람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는 열악한 환경조건에서 성장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죄를 개인의 차원에서만 고찰해서는 안된다. 예컨대 만일 최저생계비도 안 되는 박봉에 허덕이고 사는 공무원에게 협박과 감언이설 등으로 뇌물을 받게 만들고 나서, 뇌물공여자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뇌물받은 공무원만 처벌한다면, 그 처벌은 공정한 것이 아닐 것이다. 칸트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평등의 원리란 정의의 저울추가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게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만일 당신이 다른 사람을 부당하게 괴롭히면 당신은 당신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타인을 비방하면 당신 자신을 비방하는 것이 된다. …… 만일 당신이 다른 사람을 살해하면, 당신은 당신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우리는 계몽주의자로서 개인윤리를 이성주의적으로 체계화하려고 애써 온 칸트의 글에서, 칸트도 인간의 연대책임을 인정했다는 사실을 찾아볼 수 있다.
사형제도 존치론자들은 철학적으로 동해보복(일명 lex Talioni, 즉 탈리오법칙)의 정의(正義)를 그 자체로 가치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고, 정의의 실현을 위해 사형이 인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의의 이름으로 자행된 수많은 복수와 살육을 우리는 역사에서 수없이 보아왔다. 그리고 우리는 사랑이 없는 정의는 무자비하게 되고 복수와 증오를 불러일으킨다는 역사적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발표자는 본 발표에서 사형제도는 근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편견의 산물이며, 인간의 사회적 연대성과 가능성에 대한 무지에 의해 발생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우리 나라 사형제도에 대해 비판적 성찰을 하고, 왜 사형제도가 시급히 폐지되어야만 하는가를 살펴보았다.
2. 인간에 대한 편견(偏見)과 사형제도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모든 인간은 하나의 인류를 구성한다. 인류의 구성원인 인간은 누구든지 국적, 성별, 인종, 언어, 종교, 학식, 재산, 장애유무의 차별없이 인간으로서 충분하고도 완전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인류라는 개념이 국제법적으로 승인받은 것은 불과 1세기도 못되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인간에 대한 편견에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가령 유럽인의 반셈족사상(antisemitism), 백인의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 예컨대 미국의 KKK단, 타종교인에 대한 편견과 적개심, 예컨대 같은 조상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유태교와 이슬람교도간의 반목 낯서른 문화인에 대한 경멸, 장애자와 유전적 질환자에 대한 편견, 성차별, 우생학, 지역감정 등은 아직도 현대사회에서도 만연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풍속이나 생활습관과 다르게 사는 사람들을 멸시하면서 야만(野蠻)이라고 부른다. 이 야만이라는 말은 사전(辭典)적 정의에 따르면 "조상의 기원을 알 수 없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일찍이 희랍의 헤로도토스(Herodotos)는 야만이라는 말의 상대성을 지적하면서 '무례한 희랍인보다 정직한 야만인(이방인)이 더 낫다'고 말했다고 한다. 중국사람들은 중화(中華)사상에 젖어 있고, 유태인이나 독일인들은 선민(選民)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그들만을 인간이라고 불렀고, 낯선 이방인(異邦人)들을 인간이라고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자기민족 중심적인 사상을 종족중심주의(ethnocentrism)라고 한다.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의 부류(部類)만을 높이 평가하려는 나르시즘적인 경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영어의 적개심(敵愾心, hostility)라는 말은 희랍어의 손님(客, hostis, )라는 말에서 파생되었는데, 낯선 사람과 손님이라는 말은 한때 적이라는 말과 같은 내용으로 씌어졌다고 한다. 독일어의 '낯선'(fremd)이라는 말은 '잘못된' 것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독일사람들은 '낯선 사람'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다. 희랍에서는 낯선 사람을 야만인(barbaros, barbar, 귀머거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과 귀머거리라는 말과 함께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옛날 중국의 한(漢)족들은 그들외의 사람들을 오랑캐라고 불렀다.
그러나 신앙고백방식과 전례(典禮)와 풍속의 차이점이란 일시적인 것이고 부차적인 것이며, 본질적인 것은 인간은 어디서나 평등하다는 것이다. 인간의 차이점과 다양성은 인간 일반이 가질 수 있는 것을 따로따로 임시로 보여준 것일 뿐이다.
"모든 인간이 비로소 사람답게 살며 전(全)인류가 비로소 온전한 인간"이라고 말한 괴테(J. v. Goethe)의 명언도 우리가 항상 유념하고 있어야 할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에 대한 편견이 과거뿐만 아니라 현대에서도 아직도 사형제도를 만들었다고 말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인간에 대한 편견이 사형제도를 만들어 냈다는 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성찰해 보기로 하자.
사형은 법적 보호를 받는데 불리한 사람들, 예컨대 가난한 정신장애자, 인종적, 종교적 소수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행해져 왔다. 사형언도를 받은 대다수는 그 사회의 하층계층에 속해 있었다. 만일 그들이 상류층에 속해 있었다면, 그들중 대부분은 사형을 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재판하는 사회지도층의 하위계층, 특히 흑인이나 멕시코인 등에 대한 인종적 편견이 반영되었음을 규지할 수 있다. 예컨대, 국제사면위원회의 어떤 보고서에서도 미국에서 인종차별과 사형선고 사이의 관계를 명기(明記)한 바 있다. 그 보고서에 의하면 희생자가 백인일 때는 흑인일 때보다 범인은 5배 이상 더 사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사회학자인 사무엘 그로스와 로버트 모로는 1976년에서 1980년 사이 미국의 아칸사스, 플로리다, 조지아, 일리노이, 미시시피, 노스캐롤라이나, 오클라호마, 버지니아 등의 주에서 생긴 희생자들의 피부색에 대한 보고를 면밀히 분석하고나서 백인에 대한 살인은 흑인에 대한 살인보다 9배 정도 더 사형으로 처벌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 오랫동안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사형은 거의 전적으로 백인으로 구성된 상원이 흑인과 그밖에 유색인종들에게 부과한 것으로 되어 있고, 사형심리(審理)가 행해지고 있는 법원에 배석한 배심원들은 언제나 백인들이었고, 만일 피해자가 백인이고 그 백인을 살해한 자가 흑인일 때 사형언도는 거의 확정적이었다고 한다. 예컨대 1982년 6월부터 1983년 6월 사이에 백인 살해자로 기소된 81명의 흑인 가운데 38명이 사형되었고, 이와 반대로 백인을 죽인 52명의 백인 가운데 단 1명만이 사형을 당했고, 흑인을 죽인 백인은 전혀 처형되지 않았으며, 흑인을 죽인 2208명의 흑인 중 55명이 교수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이러한 잔인무도한 인종차별적인 형벌은 미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뿐만 아니라 사형제도가 실시되고 있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법적으로 무방비한 사람들에게 행해졌으며 지금도 행해지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오늘날에도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을 제대로 변호해줄 수 있는 유능한 변호사를 내세울 재력이 없음으로 공판정에서 불리한 재판을 받는 것은 흔한 일이다.
3. 인간은 가능성의 존재이다.
우리는 흉악범들의 범행이 아무리 극악해도 흉악범들에게도 개과천선할 기회를 주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되어가는 존재이며, 가능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가 잘못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국가는 범법자들의 범행에 대해 응분한 벌을 내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극형에 처함으로써 그들이 선도될 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한다면 그것은 비인간적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그들에게 참회의 기회와 교화될 수 있는 시간을 주어야 한다. 한때 폭악한 공산주의자였던 사람이 열렬한 반공주의자가 된 사람도 부지기수이며, 합법적인 절차에 의해 사형언도를 받은 사형수가 사형집행의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정세의 변화에 의해 무죄방면되고 복권되었을뿐만 아니라 나중에 일국의 대통령과 국회의원이 된 사람들도 있다. 그러면 소위 운 좋은 사람은 사형을 면하고 운 나쁜 사람은 사형되어야만 한단 말인가? 역사적으로 정치적 보복에 의한 사형은 수없이 많이 있었다. 예컨대 영국에서 헨리 8세는 38년 재위기간 동안 7만 2천여명을 사형시켰고, 엘리자베스 1세는 그녀의 50년 치세동안 8만 9천명을 처형했다. 1572년 프랑스에서는 하루에 7천여명을 학살했고,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오스트리아의 합병 때 합병을 반대하는 오스트리아 정치범 2만 7천여명을 사형시켰고, 독일내에서도 1만 6천여명을 처형했다.
조선왕조에서 당쟁에 의해 얼마나 무고한 사람들이 처형되었는가? 조광조, 남이 등의 충신열사는 물론이고, 수많은 천주교신자들이 법의 이름으로 처형되었다. 일제치하에서 처형된 독립투사는 고사하고라도 광복후에도 무고한 많은 사람이 정치적으로 처형되었다. 한국동란 때 한강 인도교 조기 폭파혐의를 뒤집어 쓰고 속죄양으로 처형된 최창식 공병감은 1964년 재심에서 당당히 무죄판결을 받았다. 조봉암과 조용수의 처형, 그리고 소위 인혁당과 남민전 사건 등은 정치적으로 악용되었다는 것은 오늘날 주지의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형을 시킨 정치인들은 처형의 이유를 사회공동체의 안녕과 질서를 보호하기 위하여, 흉악범들은 사회공동체에 존재하기에 적당하지 않고 교화(敎化)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법의 엄격함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 주기 위하여, 장기 격리복역은 경제적 부담이 많기 때문이라고 열거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얼마든지 논박될 수 있고 온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교화가 불가능하다든가, 사회공동체의 일원으로 적당하지 않는 사람은 실제로 드물기 때문이다.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가령 소위 양심수는 종교적 확신 또는 어떤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세뇌시키는 것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오히려 그러한 신념과 확신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 위정자의 관용을 베풀어야 할 것이다. 순교자가 많이 나올수록 그 종교는 위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강화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에서 배운다. 처형이 두려워서 범행을 더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는 현실적으로 입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사형이 위하력(威 力, 겁먹게 한다는 뜻)이 없다는 것은 사형을 폐지한 나라에서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가 증가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입증된다. 지난 20세기를 통하여 유럽 어떤 나라도 사형을 폐지했기 때문에 살인사건이 증가했다는 기록이 없으며, 미국에서 사형제도가 없는 12개 주가 사형제도가 존치되어 있는 38개 주보다 살인율이 높지 않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장기수의 비용 때문에 공리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장기수를 조기에 처형하겠다는 발상은 인간을 상품으로 취급하는 비인간적인 작태로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요컨대 사형제도는 인간의 그릇된 증오심에 생겼고, 대부분의 경우 정적(政敵)을 제거하기 위해서 합법을 가장한 수단에 불과한 비인간적인 제도일 뿐이다. 따라서 가능한 빨리 사형제도가 지구상에서 없어져야 한다.
4. 사회적 연대성과 사형제도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서 누구나 연대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어떤 인간이 그가 소속되어 있는 사회에 대하여 연대적인 책임의식을 가지고 있건, 가지고 있지 않건간에 그는 공존재(共存在)로서 사회적 구성원의 일원으로 대접받을 천부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사회적 연대성은 한편으로는 인간으로서 누구나 수행하여야 할 책임이며, 다른 한편으론 동시에 이를 향유할 수 있는 권리이기도 하다.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극악무도한 살인범들도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다. 따라서 그들에게도 연대성이 적용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나의 부모, 나의 자식, 나의 남편과 나의 아내, 나의 친구들도 아니 인간은 누구나 한 순간에 정신착란 등으로 흉악범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먼저 왜 흉악범들이 생겨났는지를 물어보아야 한다. 그들의 범행은 우리 사회 자체의 과오와 모순에서 기인할 수 있다고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우리는 흉악범들이 발생하게 된 사회적 배경과 범행의 기저(基底)를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 사회는 개인과 집단의 이기주의와 황금만능주의가 팽배되어 있고, 생존경쟁에서 낙오된 사람은 도무지 최소한의 사람대접조차 받기 어렵게 되어 있다. 정당한 방법으로 치부한 사람은 드물고, 악랄한 방법과 수단으로 치부한 사람들일수록 교만방자하고 향락과 사치에 몰두하고, 오히려 적반하장이라는 말 그대로 고지식하고 무능해 보이는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멸시한다. 그래서 그러한 졸부들과 세력가들은 소외된 자들에게 증오심을 유발한다.
내 가족이나 나의 친지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다. 남이야 죽건말건 나만 살고 보자라든가, 나의 가족이나 나의 친지만 잘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가령 한국인의 난폭한 운전태도, 건축토목의 부실, 불량식품의 범람, 인체의 장기매매 등을 보면 이기주의가 어느 정도인지를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라든가 '만인은 만인의 적'이라는 말까지도 우리 사회에서는 과장이 아닌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은 이와 같은 비인간적이고 비정한 사회에서 엽기적인 범죄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도로의 사정을 전혀 무시하고 고용주가 덤프트럭 운전사에게 한 번 운행할 때마다 일정한 금액을 주면서 무조건 빨리 많은 짐을 싣고 갔다가 오기만을 강요하면, 소위 '탕튀기'를 강요하면 대부분의 운전사는 자기가 살기 위해서라도 도로규칙을 위반하는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런지 모른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범법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나서 그가 범법을 하면 호시탐탐 기다리고 있다가 범법자를 나포하여 처벌한다면 그것은 법제정의 근본정신에도 어긋날뿐만 아니라 비윤리적이고 비인간적인 행동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많은 사람에게 범법을 강요하는 분위기로 오도되어 있다. 이제 우리는 구체적으로 한국 사회의 반생명적 분위기를 살펴보자.
우리는 "에잇, 죽일 놈"이라는 욕설을 도처에서 쉽게 들을 수 있다. "죽여버리고 말겠다"든가 "너, 죽고 싶어!", "너 죽고, 나 죽자", "저런 놈 살려두나?" 등의 폭언이 난무하고 있다.
낙태와 같은 살인이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있다. 일년에 백만건 이상되는 낙태가 이루어져도 의사들이나 낙태범인들은 거의 처벌받지 않는다. 인간의 생명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가를 많은 사람들은 모르고 있거나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인명경시풍조가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다. 인간의 존엄성도 무시되고 있다. 영화, 만화, 애니메이션, 소설 등에서는 사람의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취급되고 있다. 특히 '가상공간'(cyber space)에서의 엄청난 살인은 청소년들에게 '가상현실'(virtual reality)과 실제의 현실을 혼동하게 만들 수 있고, 그들로 하여금 잠재적으로 언제든지 기회가 생기면 쉽게 살인을 감행할 수 있는 소지를 마련해 주고 있다.
우리 사회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正當化)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목적이나 명분만 정당화할 수 있다면, 그 다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슨 짓이든, 심지어 살인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생명과 관계있는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 사회는 죄의식과 책임감이 매우 무뎌져 있다. 정당화와 합리화는 특히 우리 사회에서 정상배(政商輩)는 물론이고, 교육계에서조차도 만연되고 있다. 특히 해방직후와 한국동란 때에 수 많은 양민들이 살해되었고, 이데올로기를 빙자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되었다.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는지 아직도 아무도 정확히 모른다. 빨갱이를 죽이는 것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아무도 감히 반대하지 못했다. 공산주의자들의 잔인무도함에 대해 사람들은 치를 떨었고 복수심과 적개심에 불타 있었다. 정치인들은 대중의 이러한 흥분을 정략적으로 악용했다. 그러나 공산주의 폭도들도 우리의 동포이며 형제가 아닌가? 누가 그들을 공산주의자로 만들었는가? 누가 그들을 흉악범으로 만들었는가? 그들은 강대국에 의해 분단된 우리 사회의 희생양이 아닌가? 우리는 불쌍한 그들에 대해 연민과 측은한 마음, 동포애의 연대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유야 어떻든 흉악범도 우리 사회의 모순에서 생겨났다. 우리는 우리의 부모와 형제자매가 아무리 무거운 죄를 지었더라도 우리는 그들을 사형할 수도 없고 사형해서도 안 된다.
5. 우리 나라 사형제도의 합헌(合憲)판결에 대한 비판적 성찰
인간의 고유성과 존엄성을 규명하고 중시하는 철학적 인간학에서는 인간의 생명은 고귀하고, 이 세상에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며, 존엄한 인간존재의 근원이라고 밝히고 있다. 인간 생명에 대한 권리, 즉 생명권은 인간의 생존에 대한 요구와 살려고 하는 의지에 바탕을 둔 선험적(先驗的)이고 자연법적, 즉 본성법적인 권리로서 모든 인간의 기본권의 전제조건이며, 모든 기본권의 근원이 된다. 따라서 생명권은 최고의 기본권이다. 그러므로 생명권은 어떠한 제도나 법률에 의해서도 박탈될 수 없고 박탈되어서도 안된다. 모든 기본권은 생명이 있을 때만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그렇다면 이 생명권은 우리 나라 헌법에서는 어떻게 해석되고 있는가?
대한민국 헌법에는 인간의 생명권을 명시적으로 보장하는 조항은 없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권이 인간의 기본권으로 보장된다는 내용을 우리는 헌법 10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헌법 제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헌법 제10조에서 국가가 보장하는 인간의 존엄성은 바로 인간의 기본권의 보장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만일 인간의 생존의 기초가 되는 생명권이 부정된다면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될 수 없음은 불문가지이다. 또 헌법 제37조에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이유로 경시되지 아니한다"고 명시되어 있는데, 이 조항도 생명권의 보장을 뒷받침한다고 우리는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 대법원의 판례에 의하면 사형제도를 명시한 형법의 합헌성(合憲性)에 대하여 대법원은 지금까지 누차에 걸쳐 사형제도가 위헌이 아니라는 입장을 취해 왔다. 가장 최근의 대법원의 판결문은 "인도적 또는 종교적 견지에서 존귀한 생명을 빼앗아 가는 사형제도는 모름지기 피해야 할 일이겠지만, 한편으로는 범죄로 인하여 침해되는 또 다른 귀중한 생명을 외면할 수 없고, 사회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위하여 국가의 형사 정책상 사형제도를 존치하는 것도 정당하게 긍인(肯認)할 수밖에 없는 것이므로 형법 제338조가 그 법정형으로 사형을 규정하였다 하더라도 이를 헌법에 위반되는 조문이라고 할 수 없다"(1987. 9. 8. 선고 87도145 판결)고 하였고, 또 "국가의 형사정책으로 질서유지와 공공복리를 위하여 형법에 사형이라는 형법을 규정하였다 하여 이를 헌법에 위배된 것이라 할 수 없다"(1990. 4. 24. 선고 90도 319 판결)고 하였다. 그리고 1996년 11월 28일 헌법재판소의 판례도 사형제도는 합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헌법재판소 1996. 11. 28. 96헌바 1). 9인의 헌법재판소 재판관 중 7인이 사형제도가 합헌이라는 의견을 개진하였고, 김진우와 조승현 2인이 이에 반대하여 사형제도는 위헌이라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9인의 재판관은 생명권이 헌법상 보장되는 기본권이라는 점에 대하여 모두 찬성했으나, 생명권이 헌법 제37조 2항에 의한 일반적 법률 유보의 대상이 되는지 여부에 대하여 의견이 갈라졌다. 합헌이라는 의견은 타인의 생명 또는 이에 상당하는 중대한 공익을 침해할 경우 생명권도 일반적 법률 유보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 의견은 헌법 제37조 2항은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 안전 보장, 질서 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다"고 되어 있는 것을 근거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김진우 재판관이 사형제도가 위헌이라는 의견을 제시한 내용이다. 그는 "인간의 생명권은 선험적이고 자연법적인 권리로서 이를 박탈할 수 없다. …… 인간의 생명권은 사람의 생존 본능과 존재 목적 그리고 고유한 존재 가치에 바탕을 두고 있으므로 이는 선험적이고 자연법적인 권리일 수밖에 없다. 또한 이는 모든 기본권이 생명이 있음을 전제로 하여 비로소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서 모든 기본권의 근원이 되는 최고의 기본권이기 때문에 어떠한 법률이나 제도에 의하여서도 박탈될 수 없다고 할 것이다."라고 개진했다.
사형제도가 위헌이 아니라는 의견의 논거에서 "다른 귀중한 생명을 외면할 수 없다"는 말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예방적 차원에서 다른 생명을 외면할 수 없다는 뜻인가, 아니면 이미 억울하게 죽은 사람을 위하여 복수를 하겠다는 뜻인가? 그러나 범인을 사형시키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오랫동안 범인을 사회로부터 격리시켜 재범할 기회를 주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이 표현은 사형해야만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없다. 또 만일 이 표현이 죽은 영혼을 달래기 위해서나 죽은 사람의 가족의 복수심을 고려해서 범인을 사형시킨다면 이것도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범인을 죽이는 것이 이미 죽은 사람을 위해서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고, 가족 또는 친지의 원한을 푸는 데 일시적인 감정해소를 해 줄 수 있을는지 몰라도 허망한 짓일 뿐이다. 그 다음 "사회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위하여"라는 말도 적절하지 않다. 범인을 사형시켰다고 해서 흉악한 살인범이 생기지 않거나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사형제도가 폐지된 나라와 사형제도가 시행되고 있는 나라 사이에 범인발생빈도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오히려 사형제도가 있는 나라가 사형제도가 없는 나라보다 흉악범이 증가하고 있다는 통계도 나오고 있다. 그러므로 '질서유지'란 정치가들이 국민을 위협통치하려는 구실과 술수에 불과한 것이다. 법관들은 정치가들에 부화뇌동하거나 잘못된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질서유지라는 미명하에 사형언도를 내리는 것일 뿐, 실제로 사형은 질서유지와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다.
김진우 재판관이 사형제도가 위헌이라는 의견제시에서 "인간의 생명권은 선험적이고 자연법적인 권리이며 사람의 존재 목적과 고유한 존재 가치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표현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에 근거한 것이다. 생명권은 그 무엇도 대치될 수 없는 유일무이한 고유한 존재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생명권은 사람이 주거나 뺏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로지 하느님의 관할권에 속하고,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하느님만이 만드실 수 있는 자연법적 권리이다. 따라서 생명권은 하느님만이 거두어 가실 수 있을 뿐이며, 인간이 만든 법률이나 제도에 의해서 박탈될 수 없는 인간의 최고의 기본권이다.
설사 사형에 처할만한 중대한 범죄가 성립된다고 할지라도, 재판은 불완전한 인간이 행하는 심판이다. 따라서 오판을 절대적으로 배제할 수 없다. 오판이 시정되기 이전에 사형이 집행되었을 경우 하나밖에 없는 인간의 생명을 누가 복원시킬 수 있는가? 인간은 항상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어떤 인간이 어떤 때는 악마처럼 행동할 수도 있지만, 그는 누구를 만나 어떤 교육과 감화를 받았느냐에 따라 천사처럼 행동을 하고 새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사형제도는 어떠한 이유로도 그 정당성을 설명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형제도는 반드시 빨리 폐지되지 아니하면 안 된다.
6. 결론
우리는 앞에서 사형제도는 인간에 대한 편견과 인간의 사회적 연대성과 가능성과 존엄성에 대한 무지에 의해 발생한다고 보았고, 우리 나라 사형제도의 모순점도 살펴보았다. 법의 이름으로 사람을 더 이상 직접적으로 그 누구도 가해할 수 없는 구금되어 있는 죄수를 처형하는 사형제도는 정부에 의한 계획적인 법적 살인이며, 다수에 의해 미리 공모된 제도살인이다. 사형제도는 한마디로 일종의 '국가테러리즘'(state terrorism)이기도 하다.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하고, 법을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존립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을 살해한다는 것은 국가와 법의 존립정신에도 모순된다. 독일에서 사형제도는 폐지할 때의 논거는 "인간의 존엄성은 더 이상 법률적인 정의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인간의 존엄성은 불가침적인 동시에 시간과 공간에 좌우되지 않는 인간본성에 근거하는 것이므로 사형은 인간의 이러한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이 국가 공권력의 의무"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사형제도폐지 주장의 인간학적 배경은 한마디로 인간 존엄성을 고양하자는 것이다. "한 사람의 생명은 천하보다 더 귀하다"는 말을 우리는 새겨들을 줄 알아야 한다. 생명은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것이며 원천이므로 유일무이한 생명의 박탈은 바로 인간의 존엄성의 침해인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법률로도, 그 누구도, 국가까지도 무방비상태에 있는 사람을 죽일 수도 없고 죽여서도 안된다.
사형제도는 수형자의 생명권의 침해일 뿐만 아니라 사형집행인, 사형선고인, 사형집행 확인인, 사형집행 현장의 배석자의 인권도 침해하는 비인간적인 제도이다. 따라서 사형제도는 마땅히 조속히 폐지되어야 한다. 사람은 누구든지 죄를 지을 수 있으나, 용서받고 사랑받을 권리가 있다. 사람다음의 핵심은 사람을 사랑하는 데 있다. 왜냐하면 인격의 핵심은 바로 사랑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격자가 되고 싶은 모든 사람은 정당방위가 아닌 한 그 누구도 죽일 수 없고 죽여서도 안 된다. 따라서 국가살인인 사형제도를 폐지하는 것은 마땅하고 옳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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