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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인의 성난 사람들 (12 Angry Men)



우리가 흔히 '법정영화'(재판을 소재로 한 영화)라 부르는 영화들은 많다. '법정영화'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는 것 자체가 그점을 잘 말해준다. 그러나 이 영화들은 대개의 경우 법관이나 검사, 변호사와 같이 법률가가 중심이 되거나 아니면 부당한 현실과 법제도에 맞서 권리를 되찾는 소송당사자들을 소재로 한 경우가 많다.

그런데 시드니 루멧(Sidney Lumet) 감독의 <12 angry men>은 다르다. 이 영화는 법률가나 소송당사자가 아닌 일반시민들로 구성되어 재판에 참여하는 '배심(jury)'을 소재로 하고 있다. 아마도 이렇게 배심제 자체를 소재로 한 영화는 법정영화들 가운데에서도 흔히 찾아보기는 어려울 듯 싶다. 물론 미국에서 만들어진 법정영화라면, 배심원들은 자주 등장하는 편이지만 대부분은 피상적인 모습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12 angry men>에서는 정확히 그 반대다. 법관과 소송당사자의 모습은 최소한의 내용전개를 위해 잠시 비추어질 뿐이다. 이 영화에서는 법률가와 피고인이 피상적으로 다루어지고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대부분 배심원들의 모습으로 채워진다는 점에서 다른 법정영화들과 확연히 구별된다. 아울러 '법정영화'라 해서 대부분 '법정'만 등장하는 것은 아닌데도 '배심제'에 관한 이 영화에서는 오직 '배심실'만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이 영화의 배경은 단 다섯 곳 밖에 되지 않는다. '법원건물-법정-배심실-배심실의 화장실-법원밖'이 배경의 전부이다. 그나마 배심실의 모습이 절대적으로 많으니 아마도 '볼 거리'가 가장 없는 영화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영화는 이렇게 배심실의 모습에 극도로 한정되어 살인혐의로 기소된 한 십대 소년의 사건에 대해 배심평결(=배심심의)을 하는 12명의 배심원들의 논쟁을 보여준다.

이렇듯 소재도 간단하고 등장배경 또한 극히 제한적이다 보니 영화의 겉모습은 굉장히 시시하거나 지루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배심'을 직접적으로 다룬 영화가 거의 없다는 희소성과 뛰어난 스토리 구성, 적절한 캐스팅으로 인해 이 영화의 내용은 대단히 흥미롭고 재미있다.

기소된 소년의 모습. 배심실로 향하는 배심원들을 바라보고 있다.


이야기의 전개는 간단하다. 기소된 소년은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으며 불리한 증거와 증언에 의해 유죄가 확실시 되고 있고, 배심원들이 유죄평결을 내릴 경우 사형선고가 불가피하다. 법정에서 이 사건에 대한 심리를 지켜본 배심원들은 이 소년에 대하여 의심할 여지 없이 유죄(guilty)라고 생각한다.

배심장(chief)을 향해 있는 배심원들


그러나 단 한명이 무죄(not guilty) 의견을 제시한다. 그가 무죄라고 주장한 까닭은 어떤 명백한 반증에 의하여 '무죄임을 확신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의 결정에 의해 한 소년이 무고하게 사형을 당할 수도 있으므로 사건을 좀더 진지하게 의심해 볼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이다.

무죄를 주장하는 Mr. Davis역의 Henry Fonda.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개인적 경험에 의해 선입견을 갖기 쉬우며, 한번 굳힌 자신의 생각을 좀처럼 바꾸려 들지 않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매우 유력한 상황에 대한 명확하지 않은 문제제기에 우호적이지 않다. 아울러 무더운 날씨와 사적인 스케줄, 사소한 의견차이까지 사람들의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상황에서 단 한 사람의 명확하지 않은 무죄 의견에 의해 배심원들은 점차 혼란에 빠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은 유죄와 무죄를 놓고 서로 분노하고 증오하게 된다. 그러나 이 분노와 증오의 과정은 대단히 유익하다. 그것은 말하자면 서로 대치하는 다른 견해가 직접 맞부딪혀 어느 쪽이든 설득력을 얻기 위해 싸워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마지막까지 유죄를 고수하던 3번 배심원 역의 Lee J. Cobb


그렇다면 배심원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그에 대한 답은 영화의 시작과 함께 나온다. 배심원들이 심의를 하기 전에 법관은 무미건조하고 지극히 사무적인 어투로 "배심원들은 유죄를 의심할 만한 근거가 있다면 무죄를 평결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유죄를 평결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유죄를 의심해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배심원들이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유죄를 의심하기 위해서 배심원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과학'이나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찾으라는 것은 아니다. 법제도가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지 '설득력'이다. 유죄를 의심할 만한, 즉 반드시 유죄라고 할 수 없는 설득력 있는 근거가 있다면 그들은 무죄를 평결해야 하므로 유죄라고 평결하든 아니면 무죄라고 평결하든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설득력 있는 근거를 찾는 것이다.

Mr. Davis 역의 Henry Fonda가 다른 배심원들을 설득하는 장면


일반시민에 의해 전문적이지 않은 보통의 설득력을 얻기 위한 그 투쟁의 과정에서 그들은 더디지만 하나씩 중요한 사안들을 발견하게 되고 아울러 의미 있는 가치들을 발견해 나간다. 증거와 정황에 대해 의심하는 것이 그렇게 과학적인 것(증명이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애초에 자신들이 유죄라고 판단하게 된 근거였던 증거와 정황 자체도 과학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선입견과 편견, 무지와 주관을 하나씩 극복해 가는 토론과정의 모습은 매우 유익하기까지 하다.

유죄를 강력하게 고수했던 4번 배심원 역의 E. G. Marshall


잘 만들어진 이 영화는 그 자체가 고전영화이면서 배심제를 다룬 가장 훌륭한 고전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는 1997년 같은 이름의 TV영화가 제작되기도 했고, 배심제가 등장하는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쳐 온 것으로 생각된다.

누구에게나 적극 추천하고 싶은 영화이지만, 만약 법학을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를 반드시 보기를 권한다. 우리나라에는 배심제가 없어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고 해야겠지만, 그렇다고 배심제에 관한 논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며 '사법의 민주화'라는 측면에서 다른 나라의 민주적인 법제도에 관하여 많은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해야 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배심제 학습영화'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이 영화를 한번 본다면 배심제에 관한 이해가 깊어질 것이다. 영화와 함께 배심제에 관한 공부를 따로 한다면 더욱 유익할 것이다. 미국의 배심제에 관한 개괄적인 설명은 박홍규 교수의 『비교법 - 법을 통한 세계여행』(이론과실천)에 소개되어 있다.

배심평결을 마친 후 일상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그들은 이름을 주고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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