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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이 영화를 보고나니 자연스레 영화 <오아시스>를 떠올리게 된다. 아마도 ‘장애인 여성의 삶과 사랑’이라는 주제를 포함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서로 유사한 주제를 다루었다고 해도 두 개의 작품을 곧바로 비교하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 나처럼 영화에 대한 안목이 없는 사람이라면 자칫 작품의 우열을 가리려는 경향이 생길 수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감상의 깊이와 폭은 비교범위 내로 제한되기 쉽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위험이 있다고 하더라도 같은 주제를 향한 두 작품의 비교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비단 영화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비교는 비슷한 주제에 대한 다른 시각과 현실을 느껴볼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고, 그것은 또한 우리가 영화를 보는 즐거움이나 영화를 통해 얻는 유익함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과 <오아시스>는 확실히 그런 비교적 상상을 하게 만든다. ‘장애인 여성의 삶과 사랑’이라는 비슷한 주제임에도 두 영화의 내용과 느낌은 사뭇 다르다. 그것은 아마도 두 영화가 그리는 인물과 현실의 차이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오아시스>의 경우 ‘한공주(문소리)’는 온몸이 뒤틀려 있는 뇌성마비 장애인이고 ‘홍종두(설경구)’는 전과3범에 어딘가 한참 모자란 구제불능 양아치이다. 둘에게는 경제력도 없고 사랑을 나눌 안정된 생활공간도 없었으며, 인간적 존중이나 사회적 배려 따위는 더욱 없었다. 둘은 주변 사람들과 사회에 있어 ‘없었으면 싶은 존재’일 뿐이었다.
이에 비한다면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현실은 훨씬 편안하게 느껴진다. 스스로를 ‘조제’라 부르고 싶어 하는 ‘쿠미코’의 장애는 하반신을 쓰지 못할 뿐이고, ‘한공주’에 비한다면 예쁜 얼굴을 가졌다. 더불어 요리를 잘하고 지적이기까지 하다. 지적이긴 하지만 어린아이처럼 여러 가지 보아야 할 것들이 많다는 그녀의 말들은 귀엽기까지 하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세상에서 가장 야한 섹스를 상으로 주겠다는 애교도 있다. ‘츠네오’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회부적응자인 ‘홍종두’에 비해 그는 아르바이트도 열심히 하고 취직에도 성공하는 번듯한 대학생이다. 그러니까 ‘쿠미코’와 ‘츠네오’는 <오아시스>의 ‘홍종두’와 ‘한공주’에 비한다면 최소한 ‘멸시당하는 존재’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놓고 보면, 두 영화의 현실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고, 비슷한 주제라고는 하지만 공통된 무언가를 찾기가 어려워진다. 굳이 찾는다면 ‘장애인 여성도 섹스와 사랑을 원한다’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두 영화의 관점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내 생각에는 <오아시스>가 ‘장애인에 대한 이중적(또는 위선적)인 시각을 갖는 사회’라는 외적 조건 속에서 장애인 여성의 사랑을 바라보았다면,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그러한 외적 조건보다는 내적이고 주관적인 모습을 주로 그렸다는 것이다.
‘홍종두’와 ‘한공주’는 서로 사랑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이라 인식조차 되지 않는다. ‘홍종두’의 어머니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구제불능의 양아치를 자식으로 두었지만 뇌성마비 장애인인 ‘한공주’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한공주’의 가족들 역시 뺑소니 가해자에 사회부적응자인 ‘홍종두’를 용납할 수가 없다. 게다가 그들은 ‘한공주’를 이용해 보다 좋은 임대아파트에 살지만 ‘한공주’와 함께 살고 싶은 마음은 없다. 현실적인 동시에 위선적인 이들에게 ‘홍종두’와 ‘한공주’의 사랑행위는 그저 ‘강간’과 ‘합의금 2천만 원’으로 보일 뿐이다. 한편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단순히 상황을 오해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주변인들은 전후사정을 알지 못하므로 오해의 성립이 있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이면에는 의식하지 못하는 뿌리 깊은 인식이 있었다. ‘홍종두’를 향한 형사의 한 마디가 그 점을 잘 말해준다. 형사는 이렇게 말한다.
“피해자가.. 아 좀 보세요.. 아 저런 애를... 참나 인간으로서 이해가 안가네... 야 임마, 솔직히 성욕이 생기데?” 이 한마디 속에는 장애인 여성을 바라보는 ‘동정과 멸시의 이중적 시각’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물론 이것은 기본적으로는 여성을 성행위의 객체로 보는 남성들의 시각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보다 넓은 의미에서는 뇌성마비의 장애인이 무슨 사랑을 하겠냐는, 장애인 여성에 대한 이른바 ‘정상인’들의 사회적 인식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이렇듯 <오아시스>는 장애인 여성의 사랑에 대한 사회현실과 사회인식을 잘 드러내 주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는 다른 관점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위해 이러한 부분들이 상당히 자제되어 있다고 느껴진다. 물론 장애인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사회적 인식이나 복지정책의 수준에 차이가 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역시 중요한 것은 그러한 외부환경이 아니라 사랑을 하게 된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내적 갈등이다. 그러한 내적 갈등 역시 사회현실과 인식이 전제된 것이라 해도 사랑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던 ‘홍종두’와 ‘한공주’에 비해 ‘쿠미코’와 ‘츠네오’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서로 마음 놓고 사랑할 수 있었다는 차이가 있다.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사랑이야기는 의외로 상반된 결말을 맺는다. <오아시스>의 사랑은 억압되긴 했지만 포기하지 않은 사랑이 암시되었고,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사랑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웠지만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다. 사랑이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쿠미코’는 문학을 통해 일찌감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꽃과 고양이를 보고 싶고 호랑이와 물고기들을 보고 싶은 것처럼 ‘쿠미코’는 사랑을 해보고 싶었다. ‘츠네오’는 어느 날 문득 사랑이 지속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지쳤어?’라고 묻는 동생의 말을 듣고 화장실에서 ‘쿠미코’를 끌어안는다. 여전히 ‘쿠미코’를 사랑하지만 자신은 감당할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츠네오'는 둘의 이별이 담담한 이별일지라도 결국 자신이 ‘도망쳤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두 영화의 이 같은 상반된 결말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지금까지 끌고 왔던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사랑’이라는 편견을 버린다면, ‘인간과 인간’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이고 안타깝지만 쉽게 비난할 수 없는 이별 이야기이다. 한쪽은 강제된 이별을 비록 험난할 지라도 다시금 사랑으로 극복하려고 하고, 다른 한쪽은 선택한 이별을 역시 증오 없는 사랑으로 끝맺는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영화 오아시스와 직접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마음에 드는 사진이라 올려본다. 그러나 두 영화의 비교적 상상은 결국 내 개인적으로는 약간의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가령 두 영화의 설정된 현실을 서로 뒤바꾼다면 이들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는 왠지 비현실적일 것 같고, 지나치게 작위적이어서 부자연스러울 것만 같다. 예를 들어 ‘한공주’가 뇌성마비가 아닌 ‘쿠미코’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양아치 ‘홍종두’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 혹은 ‘쿠미코’가 ‘한공주’와 같은 뇌성마비 장애인이었다면 대학생 ‘츠네오’는 그런 ‘쿠미코’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런 설정이었다면 호평을 받은 두 영화는 실패했을지도 모르겠다. 그와 같은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너무 괴리된 나머지 영화의 전개는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본다. 현실을 극복한 것 같은 영화적 현실도 어찌 보면 현실적으로 계산된 것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순간이다.
여하간 두 영화는 장애인 여성의 삶과 사랑이라는 주제의 극히 일부분을 보여준 것에 불과하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여성은 장애인 여성이다”라는 어느 선배의 말을 떠올려 볼 때 ‘한공주’와 ‘쿠미코’는 그저 영화라는 비현실로 맞춤된 '그나마 행복한 장애인 여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은 고사하고 너무나 인간적인 성 욕구마저 풀어내지 못한 채, ‘쿠미코’와 ‘한공주’ 역시 그랬던 것처럼 매일같이 몽상에 기대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여성들이야말로 불행하지만 엄연한 ‘현실’일 것이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두 영화를 보고 지나치게 감동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고 싶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이유 가운데에는 개인적으로 매우 분명한 것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것은 두 영화에 대해 호감이 있었다고 해도, 나에게 장애인 친구가 생긴다거나 장애인 여성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여전히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애써 내 자신에 대해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가졌다"는 자책을 하지 않아도 말이다.
[인터뷰] 햇빛 속으로 걸어간 조제 - 이케와키 치즈루
[인터뷰] 햇빛 속으로 걸어간 조제 -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이케와키 치즈루 원문출처 : nkino | 글 : 신민경 | 사진 : 류관희 2005.11.03
우리는 그녀를 ‘조제’라는 이름으로 기억한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ジョゼと虎と魚たち>에서 츠네오가 그녀를 ‘구미코’란 본명 대신 ‘조제’로 불렀듯, 우리도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에서 따온 ‘조제’란 이름에 더 익숙하다. 부끄럽지만, 이 야무지고 독특한 아가씨의 이름이 ‘이케와키 치즈루’였다는 것도 인터뷰 이틀 전에야 기억했다. 웨스틴조선 호텔 15층. 그곳에 조제가 있을 것이다. 유모차 대신 전동 휠체어를 타고 자신만의 삶을 꾸려나가고 있을 조제가, 사랑의 달콤함과 잔인함을 맛보았지만 그 슬픔만큼 성장했을 그녀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처음 보았을 때, 이케와키 치즈루의 목소리는 꽤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일본영화 속에서 흔히 들었던, 과도한 친절이 배인 하이톤이 아니었다. “걱정하지마. 피는 깨끗이 닦았어. 혹시라도 루미놀 반응이 나올지도 모르니까”란 뜬금없는 대사를 할 때도, 그녀를 질투하는 츠네오의 연인에게 “부러워? 그럼 너도 네 다리를 잘라”라며 독한 말을 뿜어낼 때도, 그녀의 목소리는 한결 같았다. 장단이나 고저 없이 꾹꾹 누른 고압적인 말투. 그 목소리는 세상과 단절된 조제가 살아가는 방식이었고, 그래야만 자신을 방어할 수 있었다.
“하하. 이게 원래 내 목소리예요. 감독님이 특별히 주문한 건 아니고요, 스스로 조제의 목소리가 이렇지 않을까 상상해 봤어요.” 까르르… 발랄한 하이톤의 웃음을 터뜨리며 연신 인사를 하던 이케와키 치즈루. 자연스럽게 몸에 배인 예의와 초특급 ‘가와이’한 표정, 그게 바로 이케와키 치즈루의 본모습이었다.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 개봉한 게 벌써 1년 전이라고는 해도, 이케와키 치즈루는 더 이상 무표정한 조제가 아니었다. 조금 감상적으로 말해, 지금의 이케와키 치즈루는 우리가 보지 못했던 조제의 이후 이야기, 다시 말해 햇빛 속으로 묵묵히 걸어간 조제의 모습이 아닐까.
한국에서 이케와키 치즈루가 알려지게 된 계기는 <고양이의 보은 猫の恩返し>의 여주인공 목소리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정도지만, 일본에서 그녀는 잘나가는 아이돌 스타다. 1997년 일본의 대표적인 스타 관문인 ‘CM 미소녀 오디션’에서 발탁된 치즈루는, 당시 오사카 출신의 학생이었다. 그녀는 도쿄와 오사카를 오가며 광고모델, TV드라마 등에서 활약했고, 1999년 이치가와 준 감독의 <오사카 이야기 大阪物語>로 본격적인 스크린 데뷔에 나섰다. <오사카 이야기>는 만담가 부모를 둔 한 소녀의 섬세한 성장담. 이 영화로 일본영화계는 각종 신인상을 안겨주며, 이 자그마한 여배우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이누도 잇신 감독과 이케와키 치즈루가 만난 것도 이즈음이었다. 당시 <오사카 이야기>의 시나리오 작가였던 이누도 잇신 감독은, 이치가와 준 감독으로부터 “14살짜리 굉장한 배우를 하나 발견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 이후 두 사람은 <금발의 초원 金髮の草原>에서 감독과 배우로 만났고,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세 번째 만남이 된 셈이다. 이날 치즈루와 함께 내한한 이누도 잇신 감독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치즈루의 매력을 최대한 살린 작품”이라며 만족스럽게 말했다.
감독은 해피엔딩인 원작을 두 사람이 헤어지는 언해피엔딩으로 확장시킨 것에 대해 “절망적인 결말이지만, 반면 조제가 혼자서도 잘 살아갈 것임을 암시하는 희망적인 결말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그녀가 굽는 생선이 얼마나 맛있어 보이는가”라고 했다. 물론, 조제는 여전히 걷지 못할 것이고, 다리가 부서져라 철퍼덕 내려앉을 것이며, 츠네오와 재결합할 가능성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사랑 때문에 강해졌고, 세상에 좀더 유연하게 맞설 수 있게 됐다. 그걸로도 충분하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는 츠네오가 아닌, 조제의 이야기다. 우리가 츠마부키 사토시보다 이케와키 치즈루를 더 주목해야 할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조제는 꼭 해보고 싶었던 역할이에요. 아직 그만큼 강렬한 느낌을 뛰어넘은 작품은 없어요. 하지만 같은 역을 계속하고 싶지는 않아요.” 이 말을 증명하듯, 이케와키 치즈루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이후 다양한 영화들을 선택했다. 츠마부키 사토시와 다시 한번 호흡을 맞춘 <오늘의 사건 사고 きょうのできごと>, 실존 여성의 일대기를 다룬 <히비 火火>, 아사노 타다노부 주연의 복수와 비극의 드라마 <누구를 위해 誰がために> 등을 통해 찬찬히 연기의 탑을 쌓고 있는 중. 우리가 여전히 그녀를 ‘조제’로 기억하고 있는 동안, 이케와키 치즈루는 저만치 도약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츠네오는 이런 말을 한다. “헤어지고도 친구가 될 수 있는 종류의 여자도 있지만, 조제는 다르다. 내가 조제를 만날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그의 말처럼, 조제는 특별한 여자였다. 츠네오가 그랬듯, 우리도 아직은 ‘조제’가 아닌 이케와키 치즈루를 상상할 수 없다. 언젠가 이케와키 치즈루가 다른 캐릭터로 다가올 날이 있겠지만, 당분간은 조제와 함께 담담한 일상을 공유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그래서인지, 자꾸만 이케와키 치즈루의 발랄한 웃음소리가 조제의 시큰둥한 말투와 묘하게 오버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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