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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 국순옥 교수 순회강연 - 대안헌법이론
    헌법학 2007. 2. 13. 19:32

    국순옥 교수 순회강연

    열린 눈으로 보는 헌법
    - 반주류 비판헌법이론 -


    대안헌법이론


    제2회 강연
    1. 이론 전략의 기본전제
    (2004. 3. 27)

    제3회 강연
    2. 민주주의 재구축 기획
    (2004. 10. 16)

    3. 기본권과 헌법 진지전



    민주주의법학연구회




    1. 이론 전략의 기본전제

    헌법이론은 저마다 나름의 이론전략이 있다. 강단헌법학의 헌법담론에서 헌법해석의 준거틀로 그동안 줄곧 주목의 대상이 되어 온 법실증주의 헌법이론, 결단주의 헌법이론 그리고 통합주의 헌법이론도 예외가 아니다. 이들 헌법이론이 염두에 두고 있는 이론 전략의 최고 목표는 지배체제의 현상유지이다. 이처럼 지배체제의 현상유지라는 암묵의 전제에서 출발하는 강단헌법학의 헌법담론과 거리를 두고 스스로를 비판적 대안헌법이론으로 자리매김하려면, 최종 목표는 물론 이론 전략도 달라야 한다. 비판적 대한헌법이론이 가야할 길은 그러나 멀고도 험난하다. 그것이 추구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사회의 보편적 교통양식으로 자리 잡은 자율과 연대의 기본권 공동체이다. 맑스가 1848년의 공산당선언에서 미래사회의 청사진으로 내놓은 이상적인 결합사회, 이른바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든 사람들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결합사회야말로 비판적 대안헌법이론이 이론적 실천을 통하여 소중히 가꾸어 나아가야 할 영감의 원천이다. 그만큼 이론 전략도 유연하여야 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부정의 정신이다. 그리고 미래의 전망이 아무리 불투명하더라도 비판적 대안헌법이론은 계몽과 해방의 변증법에 충실하여야 한다. 거기에다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총체적 인식의 관점이다. 총체적 인식의 관점에 설 때, 헌법규범이나 헌법현실[각주:1] 어느 한 쪽에 외눈박이로 치우치지 않고 헌법현상을 통일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길이 비로소 열리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자본주의 주변부에서는 탈식민지 독립의 기운이 무르익는다. 이 같은 시대 흐름 속에서 식민지의 굴레에서 막 벗어난 자본주의 주변부 사회들이 마주하게 된 급선무 가운데 하나는 사회의 정치적 재편성이다. 독립자주국가이든 반식민지국가나 신식민지국가이든, 한 사회의 정치적 재편성의 필요조건은 헌법 제정이다. 그러나 제3세계로 일컬어지는 자본주의 주변부 사회들이 서둘러 제정한 헌법은 제1세계의 헌법문화 유산을 통째로 들여오거나 선택적으로 수용하는 모방이식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었다. 1948년의 우리 헌법도 사정은 마찬가지이었다. 1948년 헌법의 경우, 모방이식의 밑그림은 현대 자본주의헌법의 선구인 바이마르헌법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바이마르헌법은 본질적으로 계급타협의 산물이다. 그것은 패전의 막다른 골목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불씨를 사전에 다잡기 위한 일종의 고육지책이었다. 이처럼 사회주의에 대한 선제방어의 성격이 짙은 반혁명적 계급타협의 주역들은 바이마르헌법 체제의 두 기둥인 친자본 계열의 보수정당들과 개량주의적 독일사회민주당이다. 바이마르헌법의 기본얼개는 빌려왔으나 그것을 밑받침할만한 물질적 토대를 갖추지 못한 채, 미점령군 지배 아래의 반쪽 해방 공간에서 만들어진 1948년의 헌법은 한마디로 헌법 실천의 주체가 없는 모래밭 위의 신기루나 다름없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1948년 헌법은 자본주의 주변부형 외견적 입헌주의 헌법의 범주에 속한다. 자본주의 주변부형 외견적 입헌주의 헌법은 말 그대로 일종의 전시용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외견적 입헌주의 헌법의 테두리 안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면, 헌법규범도 자본주의 발전단계에 걸맞게 일정한 손질이 불가피하게 된다. 이 같은 사실은 우리 헌법이 그동안 겪어 온 일련의 헌법개정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 할 수 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1954년의 헌법개정이다. 이 때 비교적 진취적인 내용을 담은 1948년 헌법의 경제조항들이 자유주의 방향으로 개찬된다. 뿐만 아니라 1962년 제5차 개정 헌법에서는 1948년 헌법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근로자의 이익균점권이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의회 친위 쿠데타인 1960년대 말의 ‘3선개헌파동’으로부터 시작하여 1972년의 이른바 유신헌법에서 최고조에 달하는 집행부 독재의 강화는 후발자본주의형 국가 주도 수출입국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나 1980년 제8차 헌법개정과 1987년의 제9차 헌법개정을 갈림길로 변화의 조짐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른바 제3세대 기본권의 선두주자인 환경권이 사회권적 기본권의 목록에 추가되고, 정부형태도 대통령중심 정부의 본디 모습을 되찾는다. 이에 못지않게 주목하여야 할 것은 우리 헌법의 규범력 회복에 일정한 구실을 할 수 도 있을 헌법재판제도의 재도입이다. 아무튼 환경권의 신설은 우리 사회가 자본주의 발전의 일정한 단계에 도달하여 사회적 모순이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대통령중심 정부형태가 제 자리를 찾고 헌법재판제도가 다시 우리 헌법의 한 모퉁이에 자리를 잡게 된 것도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거기에는 집행부 독재국가의 가부장주의적 후견에서 벗어나 자본주의 발전의 최대 수혜자집단답게 자신들의 독자적 생활공간을 헌법의 테두리 안에서 확보하려는 신흥 중간소득계층의 시민적 열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지적한 헌법개정 내용들은 긴 눈으로 볼 때 우리 헌법현실에 오랫동안 깊은 흔적을 남길 것들이다. 그런데도 헌법개정 당시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까지 이렇다할 주목을 받지 못한 것은 처음부터 셈법이 다른 기득권 세력의 정치적 책략에 따라 특정 상품에 끼워 넣은 일종의 덤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헌법개정 때마다 정치적 논란의 한 가운데 자리 잡은 것은 오히려 대통령의 선출방식이나 연임문제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들이야말로 역설적이게도 헌법을 대학의 상아탑에서 거리의 광장으로 끌어내어 국민적 관심의 대상으로 부각시키는데 결정적 구실을 한다. 특히 1960년대 말의 3선개헌안 발의를 전후하여 학생 대중의 현실 참여가 본격화함에 따라 헌법 투쟁이 정치지형의 주요변수로 떠오른다. 그리고 1970년대에  들어 명망가 중심의 이의제기 집단들이 헌법 투쟁의 대열에 합류한다. 하지만 유신헌법 아래의 ‘겨울공화국’ 10년이 다 저물어갈 무렵 헌법현실의 반이성적 폭력성은 극한에 달한다. 설상가상이라 할까, 신군부 파시스트 집단의 광주 대학살은 사태를 더욱 꼬이게 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언론의 자유 등 주로 자유주의적 기본권을 헌법 투쟁의 무기로 삼아온 명망가 중심 이의제기 집단들의 투쟁 방식은 설 자리가 없게 된다. 이에 따라 1970년대를 가로질러 가냘프게나마 희망의 등불이 되어온 명망가 중심의 이의제기 집단들은 자유주의 특유의 기회주의적 속성을 드러내거나 아예 국외의 방관자로 물러앉는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유일한 현실 참여 세력인 학생 대중이 이제는 반자유주의의 기치를 높이 들고 다시 움직일 시간이 온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1987년의 제9차 헌법개정을 이끌어 낸 민주화 대투쟁의 과정에서 헌법 실천의 주체들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이다. 우리 헌법사상 초유의 이 같은 정치지형 변화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외견적 입헌주의 헌법 아래 헌법 소외의 최대 피해자인 노동자계급이 자신들의 정치적 주장을 관철하기 위하여 경제주의의 울타리를 걷어치우고 헌법 실천의 주체로 직접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뿐만 아니다. 1987년의 민주화 대투쟁 과정에서 더욱 놀라운 것은 정신노동자 중심의 중간 소득계층이 보여준 현실 참여이다. 이들 중간소득계층은 그 후 국외자의 자세를 떨쳐버리고 시민운동의 형태로 결집한다. 이처럼 시민운동의 형태로 모아진 힘을 배경으로 그들은 외견적 입헌주의 헌법의 틀 안에서 과잉포섭의 온갖 특혜를 누려온 기득권 세력을 제치고 노동자계급과 더불어 헌법 실천의 쌍벽을 이룬다. 헌법 실천의 이 같은 양자 구도 속에서 광주 대학살 이후 헌법 투쟁을 선도한 학생운동 진영은 진퇴양난의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가운데 학생운동 진영의 핵심 동력은 기득권 세력의 품에 안겨 인생유전의 회전목마를 즐기며 때로는 부패 정치집단들의 앞잡이로 때로는 파시스트들의 하수인으로 변신에 변신을 거듭한다.

    아무튼 1972년 헌법개정을 전후하여 헌법 투쟁이 힘을 받으면서 반이성적 헌법현실에서 부정적 표상의 대명사가 된 외견적 입헌주의 헌법, 그것도 최악의 형태인 유신헌법의 정당성에 대한 물음이 당연히 뒤따르게 된다. 이 같은 비판적 인식은 유신헌법의 후속편인 1980년 헌법에 대하여도 그대로 이어진다. 유신헌법과 1980년 헌법에 대한 평가는 물론 계급적 입지나 계층별 이해 또는 정치적 동기에 따라 서로 엇갈린다. 우선 주목하여야 할 것은 유신헌법의 틀 안에서 자기 방어의 진지를 재빨리 구축한 기득권 세력의 현실추수적 헌법물신주의이다. 기득권 세력의 현실추수적 헌법물신주의는 강단헌법학의 헌법담론에서 다양한 모습을 드러낸다. 때로는 법실증주의 옷을 걸치기도 하고, 때로는 결단주의의 이름으로 분칠한다. 그리고 이들 틈바구니에서 끼어 통합이론이 가끔 선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처럼 기득권 세력의 현실추수적 헌법물신주의에 온갖 현학적 수사로 살을 붙이는데 급급한 강단헌법학의 입장에 서게 되면, 눈앞의 반이성적 헌법현실조차도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히려 반이성적 헌법현실은 자본주의 주변부형 외견적 입헌주의 헌법이 언젠가 반드시 거쳐야할 통과의례쯤으로 간단히 치부한다.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강단헌법학의 언저리에는 헌법현실의 반이성적 폭력성에 주목하고, 그 같은 반이성적 헌법현실에서 정치적 계몽 기획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자유주의적 입헌주의 입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유주의적 입헌주의의 입장에선 헌법학자들은 수적으로 극소수에 불과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론적 토대도 튼실하지 못하여 기대하였던 만큼의 성과는 없었다. 하물며 도발적 헌법이론, 반이성적 헌법현실과 맞대결하려는 진보 성향의 헌법이론은 더더욱 발붙일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 상황은 급변한다. 1980년대는 1970년대와 달리 헌법냉소적 헌법허무주의와 낭만주의적 직접행동주의가 한데 어우러진 질풍과 노도의 시기이다. 반자유주의의 깃발을 들고 현실 참여의 맨 앞줄에 선 학생운동 진영은 체제 변혁의 급진주의 노선으로 돌아선다. 그러나 학생운동 진영의 반체제 급진주의 노선은 반이성적 헌법현실에 대한 이론적 대안을 적극적으로 제시하지 못하고 현실냉소적 헌법허무주의로 깊숙이 빠져든다. 그 밑바닥에는 반이성적 헌법현실을 단칼로 풀어 보려는 낭만주의적 직접행동주의가 자리 잡고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이처럼 현실냉소적 헌법허무주의가 낭만주의적 직접행동주의와 손을 잡으면, 현실냉소적 헌법허무주의가 낭만주의적 직접행동주의로 옮겨가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이다. 현실의 논리는 그러나 냉엄하다. 거리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승리의 축배를 들던 시대는 이제 영원히 막을 내리고 과거의 추억거리로만 남게 될지 모른다. 그만큼 헌법허무주의적 직접행동주의가 치러야할 대가는 결코 만만치 않다. 국가권력의 폭력 앞에서 전술적 패배를 인정하던지, 아니면 전략적 후퇴를 감수하는 양자택일의 길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학생운동 진영의 반체제 급진주의 노선이 직면한 이론적 위기를 지배체제의 테두리 안에서 실천적으로 해결한 것은 다름 아닌 1987년의 민주화 대투쟁이다.

    우리 헌법사에서 1987년은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헌법 실천 주체들의 등장이다. 헌법 실천 주체들의 등장은 우리 헌법이 반 백년의 전사를 마감하고 제 발로 설 수 있는 주체적 조건을 마련하여 주었다는 점에서 우리 헌법사의 가장 획기적인 사건으로 평가하여도 좋을 것이다. 역사의 변증법은 그러나 또 한번 잔인한 희비극을 연출한다. 다름 아니라 우리 헌법이 제대로 싹트기도 전에 현실사회주의의 역사적 패배라는 세계사적 대이변이 눈앞의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기다렸다는 듯 불어닥친 것은 신자유무역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적 시장이데올로기의 광풍이다. 신자유무역제국주의의 핵심은 지구화담론이다. 신자유무역제국주의의 지구화담론은 해체주의자들이 말하는 일종의 탈영토적 유목주의이다. 미국을 맹주로 한 신자유무역제국주의는 제국주의 열강의 공동 하수인인 각종 국제금융기구들을 이용하여 국경 철책의 완전 제거를 강요한다. 국경 철책이 사라지면, 국가주권은 국제법상의 공허한 수사로 전락한다. 그야말로 실체가 없는 관념상의 크기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 위협적인 것은 신자유주의적 시장이데올로기이다. 신자유주의적 시장이데올로기는 신자유무역제국주의 열강이 주도하는 초국적 자본의 지배 아래 자본주의 주변부 사회들을 묶어두기 위하여 초국적 자본의 사전에나 있음직한 시장이라는 이름의 관념적 허구를 날조한다. 신자유주의적 시장이데올로기도 따지고 보면 초국적 자본의 수탈체계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경제적 자유권 중심의 각종 인권 공세와 노동시장 유연화 언설은 초국적 자본의 수탈체계를 합리화하기 위한 기만적 술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 같은 기만적 술수는 우리 헌법의 기본권 체계와 기본권 체계의 가장 선진적 부분인 노동기본권을 탈구와 해체의 위기로 몰아놓고 있다. 더욱이 우리 사회처럼 대미 종속관계가 어느 때보다 심각한 수준에 이르러 사실상 반식민지국가나 다름없는 경우, 신자유무역제국주의의 야수성과 신자유주의적 시장이데올로기의 폭력성은 미리 가늠하기조차 어려울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이 계속되는 한, 또 하나의 다른 반이성적 헌법현실, 한마디로 신자유주의적 헌법위기가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가운데 우리 헌법의 분해 과정이 한층 더 속도가 붙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지켜보아야 할 또 하나의 복병은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의 탈중심적 해체주의이다. 탈중심적 해체주의의 이론 지평은 다양하다. 후기구조주의의 흐름이 있는가 하면, 체계이론적 시각도 있다. 그런데도 이들 탈중심적 해체주의는 하나의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반이성주의와 거대 주체의 거부이다. 거대 주체의 반이성주의적 거부는 이성주의적 근대 계몽 기획의 본보기인 자본주의헌법의 이념적 토대에 대한 전면적 이의제기를 의미한다. 무엇보다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은 국민국가의 관념이다. 아울러 국민국가 관념의 논리적 전제인 국민주권의 개념과 국민주권의 개념적 보완장치인 헌법제정권력의 문제가 도마 위에 오른다. 그러나 거대 주체의 반이성주의적 거부는 부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국민주권과 같은 현란한 개념장치들의 포로가 되어 이제는 빈껍데기만 남은 민주주의를 원점에서 다시 짚어보게 한다. 민주주의는 직접민주주의이든 대표민주주의이든 동일성의 범주가 근간이 된다. 최근 넓은 의미의 동일성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계기로 민주주의의 반성적 형태, 즉 반성적 민주주의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다. 동일성의 범주 대신 차이성을 강조하는 차이민주주의론이 좋은 사례이다. 이 같은 논의가 현대 자본주의헌법을 자유주의의 이념권으로 되돌려놓는 반동의 족쇄가 될지, 아니면 현대 자본주의헌법에 새로운 길을 열어줄 마법의 열쇠가 될지 아무도 예단할 수 없다. 현대 자본주의헌법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이 같은 도전은 자본주의 주변부형 외견적 입헌주의 잔재의 청산과 신자유주의적 헌법위기의 극복이라는 이중의 과제를 짊어지고 그렇지 않아도 운신의 폭이 좁은 우리 헌법의 처지에서 볼 때 결코 가벼이 넘길 수 없는 또 하나의 시련이 아닐 수 없다.


    2. 민주주의 재구축 기획

    가. 세 갈래 부르주아민주주의

    민주주의는 법치국가 그리고 사회국가와 더불어 우리헌법의 구성원리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도 판박이 법치국가담론의 일방통행에 하릴없이 밀리거나 도식적인 사회국가담론의 그늘에 가려 헌법담론의 의제로 제대로 된 대접조차 한번 받아보지 못한 것이 민주주의의 이론적 현실이다. 강단 헌법학이 주도하는 주류 헌법담론의 이같은 민주주의 따돌리기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된다. 다름 아니라 민주주의 없는 헌법담론, 한마디로 헌법담론의 황폐화이다. 따라서 비판적 대안헌법이론이 마주한 이론적 과제들 가운데 하나는 민주주의를 우리헌법의 최고 구성원리로 다시 세워 마땅히 있어야 할 제자리로 되돌려놓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애당초 우리들 자신의 역사적 체험공간과 동떨어진 서양 문화권에서 오랜 투쟁 끝에 손에 넣은 사회적 교통 양식의 하나이다. 그것은 제도이기에 앞서 사상과 운동이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민주주의를 가로지르는 불변의 관념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해방의 사상이다. 인간해방을 지향하는 민주주의는 그러나 빼어난 의미의 운동이기도 하다. 다수자 저항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다수자 저항운동이 인간해방의 기치 아래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반봉건 체제변혁의 기운이 무르익어가던 근대 이행기이다. 봉건사회의 피지배 신분이 지배체제를 자연의 질서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자기해방의 논리를 가다듬어 집단적 이의제기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순간, 민주주의는 체제변혁의 동력으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처럼 피지배 신분의 자기해방운동으로 싹을 틔운 민주주의의 기본이념은 자기결정, 다시 말하면 지배와 피지배의 동일성이다.

    그러나 근대의 새벽이 밝아오면서 반봉건 체제변혁운동은 운동의 최종방향을 둘러싸고 내부갈등의 격랑에 휩싸이게 된다. 이 과정에서 반봉건 체제변혁운동의 또 다른 한 축인 부르주아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제치고 운동의 대의를 독점한다. 이에 따라 반봉건 체제변혁운동의 역사적 성과들을 입헌주의의 형태로 총괄하는데 결정적 구실을 하는 부르주아자유주의가 자본주의헌법의 기본구도를 규정하는 이념적 지렛대로 작동한다. 자본주의헌법의 이같은 부르주아자유주의적 기본구도 아래에서 입헌주의가 법치주의의 이름으로 분장하거나 법치국가의 이름으로 갈아입고 자본주의헌법의 제1원리로 자리를 굳히게 된다. 그 결과 자본주의헌법과 자본주의헌법의 탯줄이라 하여도 좋을 민주주의와의 마찰은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사실 자본주의헌법의 역사는 자본주의헌법에 의한 민주주의의 내부 식민지화라 할 만큼 긴장관계의 연속이다. 자본주의헌법이 근대 자본주의헌법에서 현대 자본주의헌법으로 넘어가는 긴 도정에서 민주주의는 배제 포섭 그리고 억압의 논리에 따라 왜곡과 파행의 길을 걸으며 형태변화를 거듭한다.

    우선 자본주의헌법이 근대 자본주의헌법의 틀 안에 머무는 동안, 민주주의는 배제의 논리에 따라 계급내 분파민주주의의 형태를 띤다. 제한선거제도에 바탕을 둔 명망가 의원 중심의 소수파 의회민주주의가 좋은 본보기이다. 그러나 자본주의헌법이 근대 자본주의헌법에서 현대 자본주의헌법으로 넘어갈 즈음, 부르주아자유주의는 아직도 소진되지 않은 그 특유의 낙관주의에 기대어 민주주의를 이념적 동반자로 인정하고 민주주의의 체제 내화에 박차를 더한다. 이처럼 부르주아자유주의가 포섭의 논리에 따라 민주주의를 자신의 모습에 맞추어 각색한 것이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이다. 보통선거를 제도적 실체로 하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가 제한선거제도에 뿌리를 둔 소수파 의회민주주의에 견주어 민주주의의 진일보한 형태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사회적 총체성, 바꾸어 말하면 사회 전체의 유기적 연관성을 무시하고 국가영역과 사회영역을 인위적으로 갈라놓은 다음, 민주주의를 국가 영역에 유폐시키려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역시 계급민주주의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자유주의적 민주주의가 일반민주주의의 수준에서 예나 지금이나 어느 정도의 해방 잠재력을 지니고 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해방 잠재력은 말할 것도 없이 보통선거제도에서 나온다. 현대 자본주의헌법 단계에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가 난숙기를 맞이하여 보통선거제도가 뿌리를 내리게 되면, 정치적 소수파로 국가권력의 외곽만 맴돌던 사회적 다수파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제도적 거점인 의회를 포위하고 내부로부터 침식하기 시작한다. 이른바 의회포위전략으로 무장한 이들 사회적 다수파를 발판으로 사회주의 또는 사회민주주의 계열의 정당들이 의회 안에 둥지를 틀면, 의회는 더 이상 부르주아계급의 전유물이 아니다. 더욱이 이들 정당이 원내다수파의 자리를 넘보게 되면, 의회는 개량주의적 헌법구상이 미처 내다보지 못한 사회주의 평화혁명의 요람으로 탈바꿈할 수도 있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이같은 해방 잠재력에 덜미가 잡혀 현대 자본주의헌법의 부르주아자유주의적 기본구도가 흔들릴수록, 부르주아자유주의는 근대 자본주의헌법에서 현대 자본주의헌법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에 스스로 앞장서 기획하고 실천하던 민주주의와의 역사적 대타협을 파기하고 냉전자유주의적 억압의 논리를 등에 업은 반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자유의 적에게 자유의 꽃다발 대신 언필칭 죽음의 입맞춤을 외쳐대는 이른바 전투적 방어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에 대한 노골적인 적개심을 드러낸다. 이처럼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마저 맞바로 부정하는 전투적 방어민주주의의 등장을 계기로 민주주의는 부르주아자유주의의 공허한 이데올로기로 전락한다. 그러한 뜻에서 전투적 방어민주주의는 부르주아자유주의적 계급민주주의의 가장 타락한 형태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나. 국민주권 아래의 민주주의

    자본주의헌법이 근대 자본주의헌법에서 현대 자본주의헌법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는 소수파 의회민주주의에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로 그리고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에서 다시 전투적 방어민주주의로 형태변화를 거듭한다. 이같은 형태변화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다름 아니라 민주주의 계급적 성격이다. 소수파 의회민주주의가 계급내 분파민주주의라면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는 계급간 민주주의이다. 그리고 전투적 방어민주주의는 순수 계급민주주의이다. 아무튼 자본주의헌법이 부르주아자유주의적 기본구도를 고수하는 한, 민주주의의 계급적 성격은 자본주의헌법이 존립하기 위한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민주주의의 계급적 성격은 그러나 민주주의의 제도화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민주주의의 제도화는 민주주의가 사상과 운동으로서의 활력을 잃고 자본주의헌법의 테두리 안에서 지배와 피지배를 계급적 수준에서 재생산하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회적 다수파를 정치적 소수파로 그리고 사회적 소수파를 정치적 다수파로 바꾸어놓음으로써 사회적 다수파에 대한 사회적 소수파의 정치적 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부르주아자유주의의 제도적 보완장치로 탈바꿈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국민주권이다.

    국민주권은 군주주권과 인민주권의 중간 형태이다. 군주주권이든, 국민주권이든 또는 인민주권이든, 주권문제의 핵심은 국가권력의 주체가 누구인가, 즉 국가권력이 최종적으로 누구한테 귀속하는가이다. 군주주권의 경우 자연인 군주가 국가권력의 주체인데 반하여, 인민주권에서 국가권력의 주체인 인민은 자연인 집단인 개별 유권자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국민주권이 상정하는 국민은 국적 보유자들의 총체이다. 국가보유자들의 구체적 개별성을 사상하고 그들을 국적 보유자라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 무조건 한데 묶어 단일의 의사능력과 행위능력을 지닌 거대 주체, 교과서적 표현을 빌리면 추상적 통일체로 내세우는 것은 현실과 거리가 먼 관념적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의미에서 관념적 허구의 산물인 추상적 통일체로서의 국민은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상징기호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민주주의 제도화의 중심 고리인 국민주권의 역사적 과제는 자본주의헌법이 부르주아자유주의적 기본구도를 고수하는 한 반드시 딛고 넘어서야 할 군주주권과의 단절을 마무리지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헌법의 부르주아자유주의적 기본구도에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인민주권과의 대치전선을 명확히 그어놓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의 추상이 아니라 반사실적 가정 위에 자리잡고 있는 국민주권이 부르주아자유주의적 자본주의헌법 아래에서 민주주의 제도화의 중심 고리로 마땅히 지니고 있을 이데올로기적 비밀의 열쇠를 찾기 위하여는 국민주권이 국가권력의 주체로 전제하는 국민의 역사적 실체를 밝히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국민이다. 국민이란 무엇인가? 전체이다.” 부르주아계급의 신탁과도 같은 촌철살인의 울림소리이다. 프랑스 혁명기의 교부 헌법이론가인 씨에이예즈의 이같은 예언자적 절규에서 우리는 부르주아자유주의적 낙관주의의 한 자락을 엿볼 수 있다.

    부르주아자유주의적 낙관주의와 부르주아자유주의적 선민의식은 종이 한 장 차이이다. 부르주아자유주의의 선민주의적 독해법에 따르면, 관념적 허구이자 추상적 통일체인 국민의 의사를 정확히 읽어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같은 작업은 사회적 책임이 뒤따를 뿐만 아니라 고도의 지적 능력이 필요하다. 재산은 물론 교양까지도 독점하고 있는 부르주아계급의 구성원들만이 능히 할 수 있는 것이다. 부르주아자유주의의 선민주의적 독해법이 염두에 두고 있는 국민대표제도의 문법은 분명하다. 거기에는 국민의사의 추정권을 한 손에 쥐고 있는 부르주아계급이 자신의 계급의사를 루소의 이른바 일반의사로 의제함으로써 국민주권의 계급적 성격을 은폐하려는 강력한 권력의지가 담겨있다. 국민대표제도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이같은 권력의지를 제도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명령위임의 금지와 국민대표의 신분적 특전인 면책특권이다.

    선민의식은 선민의식으로 끝나지 않는다. 거기에는 반드시 적대감정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부르주와자유주의적 선민의식도 마찬가지이다. 부르주아자유주의의 선민주의적 셈법에 따르면, 부르주아계급만이 실수이고 그 밖의 사회구성원들은 허수에 지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부르주아계급 이외의 사회구성원들은 존재론적으로 세계 밖의 비존재이며, 정치적으로 적극적 배제의 대상이다. 따라서 국민주권의 기치 아래 국민대표 제도의 간판을 내걸은 제도민주주의에서는 배제의 논리가 어김없이 작동한다. 근대 자본주의헌법이 어느 정도 뿌리를 내린 단계에서도 보통선거제도가 도입되기 이전의 각국 헌법들이 일정 금액 이상의 재산세 납부자 등 부르주아계급의 구성원들에게만 선거권이나 피선거권을 부여하는 제한선거제도를 고집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에 따라 제한선거제도는 국민주권원리 그리고 국민대표제도와 더불어 제도민주주의의 초기 형태인 명망가 의원 중심의 소수파 의회민주주의의 중심축으로 자리잡는다. 그러나 자본주의헌법이 현대 자본주의헌법으로 이행하기 훨씬 이전부터 정치적 투쟁의 대상으로 관심의 초점이 되었던 보통선거제도의 도입을 계기로 사정은 달라진다.

    보통선거제도의 등장은 단순히 제한선거제도의 퇴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그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제한선거제도 아래에서 제도민주주의 밖에 머물던 인민 대중, 그 가운데에서 인민 대중의 기층 부분인 노동자계급을 제도민주주의의 틀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제도민주주의가 명망가 의원 중심의 소수파 의회민주주의에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로 이행하는데 획기적인 돌파구를 마련한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의 적대개념인 민주주의를 상황의 필요에 따라 하는 수 없이 받아들이지만, 그것의 작동 반경은 국가와 사회의 이분법적 분단 논리에 맞추어 엄격히 한정된다. 이에 따라 사회영역은 민주주의의 출입금지구역으로 묶어두고, 국가영역만 민주주의의 합법 공간으로 남겨 놓는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이같은 반민주주의적 상상력을 전술적으로 가장 유효적절하게 활용하여 민주주의의 합법 공간을 정치적 자기해방의 마당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 노동자계급이다. 그러나 정치적 자기해방의 마당인 민주주의의 합법 공간에서 노동자계급이 정작 무엇보다 필요로 한 것은 자기조직의 합법적 수단인 결사의 자유이었다. 결사의 자유가 한번 주어지자, 노동자계급은 직업적 결사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정치적 결사에 모든 것을 건다. 하지만 정당적대의 반우호적 정서는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도 비록 황소걸음이기는 하지만 적지 않은 우여곡절 끝에 정치적 결사의 자유가 사실상 용인되는 등 정당민주주의적 경향이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마침내 움트기 시작한다.

    이처럼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정당민주주의적 경향이 움트기 시작하여도 국민주권의 기본구조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정당민주주의는 예컨대 정당의 정강정책이나 선거공약에 찬동하는 선거구 유권자들을 선거과정에 끌어들여 그들에게 일반의사 결정에 간접적으로나마 참여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회를 준다. 정당민주주의의 이같은 직접민주주의적 효과는 비례대표제도가 채택될 경우 더욱 두드러진다. 국민주권 아래에서 국민이라는 가면의 관념적 허구에 몸을 감추었던 선거구 유권자들이 국가권력의 주체인 주권자로 화려하게 부활하는, 아니 ‘커밍 아웃’하는 순간이다. 이 순간은 동시에 의식개벽의 출발점이기도 하였다. 단지 의원선출의 모체일 뿐, 투표가 끝나는 순간부터 정치적 노예의 신분으로 되돌아가던 선거구 유권자들의 목소리를 의회 의원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게 된다. 이에 따라 선출 모체인 선거구 유권자들은 멀찌감치 떼어놓고, 의회 의원이 국민대표자의 이름으로 일반의사 결정과정을 좌우하던 소수파 의회민주주의 아래의 순수대표제도는 시대착오적인 과거의 유물로 빛을 잃는다. 정당민주주의의 직접민주주의적 효과로 말미암아 촉발된 국민대표제도의 이같은 구조변화를 계기로 국민주권 아래의 국민대표제도는 순수대표제도에서 반대표제도로 서서히 옮겨간다.

    자본주의헌법이 현대 자본주의헌법 단계에 이르면,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도 난숙기를 맞아 조만간 조락기로 접어든다. 한편으로 적대적 이념 진영과의 힘겨운 싸움이 헌법 체제 안팎에서 일상화하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 사회의 계급구성은 유례없는 분화과정을 거친다. 독점자본과 비독점자본의 대립관계 등 부르주아계급 내부의 양극화는 계급 분화과정의 한 자락에 지나지 않는다. 인민 대중 사이에서도 분극화 현상이 두드러져 비노동자적 임금생활자층이 비약적으로 증대한다. 뿐만 아니라 노동자 계급의 내부 분화도 급속히 진행된다. 이처럼 계급 및 계층의 경계가 흐트러지면서 정당민주주의의 견인차 역할을 하던 정당들도 계급투쟁의 노선을 멀리하고 계급타협의 길로 돌아선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일 뿐, 대부분의 정당들은 거기에서 다시 한 발 물러나 사회통합의 노선으로 후퇴를 거듭한다. 정당의 이같은 연성화가 시대정신으로 자리잡는 가운데, 정당내 민주주의는 아무런 진척도 없이 제자리를 맴돌고 정당의 내재적 속성인 과두화 현상은 오히려 더욱 확산한다. 이에 따라 정당민주주의의 대차대조표에서 가장 긍정적인 측면으로 평가할 직접민주주의적 효과의 제도적 표현인 반대표제도도 위기를 맞는다. 정당민주주의의 이같은 한계상황에서 직접민주주의적 전망을 속수무책으로 압류당한 인민 대중은 과두정당의 테두리 밖에서 주권자의 지위를 되찾을 길을 모색하게 된다. 정당민주주의의 배반에서 비롯한 인민 대중의 직접민주주의적 열망은 반파시즘 투쟁의 기념비적 성과인 프랑스 제4공화국 헌법에서 다음과 같은 정식으로 구체적 표현을 얻는다. “국민의 주권은 프랑스 인민에 속한다.” 이 정식의 선언적 의미는 명백하다. 국민주권의 시대가 서서히 막을 내리고 인민주권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에서 국민대표제도의 구조변화를 이끈 것은 정당민주주의의 직접민주주의적 효과이다. 정당민주주의의 직접민주주의적 효과는 그러나 비교적 안정된 계급구조 아래 헌법투쟁이 계급투쟁의 한 고리로 나름의 고유영역을 확보할 수 있는 정치지형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의 전간 시기에 사회당과 공산당의 행동통일협정을 계기로 반파시즘 인민전선의 결성과 레옹 블룸 주도 아래의 인민전선 정부를 체험한 프랑스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독일 역시 한 때 계급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헌법투쟁이 정치투쟁의 전 국면을 주도한 적이 있었다. 제1차세계 대전이 끝나고 바이마르헌법체제의 출범을 전후한 시기이다. 이같은 저간의 시대적 배경을 전제할 때 라이프홀쯔의 정당국가적 직접민주주의론도 나름의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정당국가적 직접민주주의론도 반대표제도의 게르만판이라 하여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바이마르헌법체제에서 무엇보다 주목을 끄는 것은 국민투표제도 등 인민주권의 도래를 예고하는, 따라서 결코 예사롭게 넘길 수 없는 징후들이다.

    다. 민주주의의 이데올로기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본기본법체제가 들어서면서 상황은 급반전한다. 헌법반동의 추운 계절이 찾아 온 것이다. 동서 냉전의 틈새에서 본기본법이 앞장 선 헌법반동의 한가운데에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가 있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에 대한 본기본법의 해체작업은 싹자르기부터 시작한다. 우선 국민투표제도 따위는 곁가지조차도 들여놓지 않는다. 본기본법은 바이마르헌법의 선례를 의식하여 이렇게 국민투표제도의 제도 진입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 뿐만 아니라 본기본법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단계에서 이미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굳어진 국민대표제도의 구조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듯한 몸짓만 보이다 오히려 정반대의 방향으로 발길을 돌린다. 정당 육성의 허울아래 정당 규제의 길을 터놓은 본기본법의 정당 관련 규정이 그것이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에 대한 본기본법의 손보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본기본법은 나아가 의회친화적인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에 결정적 타격을 입히기 위하여 헌법재판제도를 도입한다. 헌법재판제도 가운데 특히 법률위헌심판제도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뿌리부터 흔들 수 있는 첨단병기로 악용될 소지가 크다. 이 밖에도 헌법재판제도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에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비밀병기도 준비해 놓고 있다. 정당해산 심판제도이다. 나아가 본기본법은 제도적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 차원에서도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죽이기에 발벗고 나선다. 이데올로기 차원에서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죽이기는 민주주의 이데올로기화라는 수법을 빌려 체계적으로 이루어진다. 이처럼 민주주의 이데올로기화 차원에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교살하기 위하여 본기본법이 마련한 득의의 정식이 자유로운 민주주의이다. 그리고 자유로운 민주주의를 초헌법적 체제이데올로기차원에서 관리할 헌법상의 권한을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산역꾼인 헌법재판소에 맡긴다. 본기본법의 이같은 자비 행각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성급한 화답이 다름 아닌 전투적 방어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의 이같은 이데올로기화는 정치적으로 아둔한 게르만 민족의 열등의식에서 불거져 나온 한 때의 울뚝밸이 아니다. 자칭 민주주의의 모범생인 미국에서는 민주주의 이데올로기화가 더욱 조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미국에서 민주주의 이데올로기화의 기수는 일종의 귀족주의적 과두민주주의, 흔히 이름하여 엘리트민주주의라 부르는 것이다. 엘리트민주주의는 민주주의 제도화 과정에서 모습을 보인 제도민주주의의 고전적 형태인 계급내 분파민주주의의 현대판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민주주의를 상품 교환 시장의 원리에 따라 정치상품인 지도자를 선출하는 절차적 과정으로 묘사하는데 약간의 세련미가 돋보일 뿐, 민주주의의 논리나 구조에 대한 기본인식은 계급내 분파민주주의의 수준에 머물고 있다. 엘리트민주주의는 선거구 유권자들의 과잉 선거참여를 무엇보다 두려워한다. 엘리트민주주의의 입장에서 볼 때, 유권자들의 투표 참여율이 낮은 민주주의일수록 좋은 민주주의이다. 따라서 제한선거제도가 법적으로 이미 자취를 감춘 경우이라도 제도적 법제화의 틀 밖에서 사실상의 제한선거제도가 보편적 현상으로 자리잡지 않는 한 엘리트민주주의는 한시도 작동하지 못한다. 미국에서 정치상품 소비자인 선거구 유권자들을 가능한 한 정치상품 교환 시장으로부터 떼어놓기 위하여 대중문화의 이름으로 동원되는 갖가지 우민주의적 탈정치화 시도는 엘리트민주주의의 생명줄과도 같은 사실상의 제한선거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체제 차원의 집단적 자기최면 의식이다.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사실상의 제한선거제도를 고집하는 엘리트민주주의는 정당민주주의에 대하여도 적대적 태도를 보인다. 엘리트민주주의가 민주주의를 지도자 선출 절차로 왜소화하는 귀족주의적 편향에 사로잡혀 있는 한, 정당이 정당민주주의의 기본 전제인 정책정당, 즉 의원 선출 모체인 선거구 유권자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한 정책정당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기대하기 어렵다. 유일한 가능성은 선거정당으로서의 제한된 역할 뿐이다. 따라서 엘리트민주주의에서는 정당은 의원 선출 모체인 선거구 유권자들과 담을 쌓은 의원 중심의 자폐정당, 다시 말하여 원내정당으로의 변신이 불가피하다. 그렇게 되면, 소수파 의회민주주의 아래의 명망가 의원 중심의 의회가 계급내 분파들의 이해관계를 조종하는 일종의 정치적 어음교환소이었듯이 엘리트민주주의 아래의 원내 정당 중심의 의회는 사회적 소수파의 밀실거래를 정치적으로 인준하는 부르주아계급의 집행위원회에 지나지 않는다.

    라. 헌법 속 민주주의 대장정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 헌법의 태도는 인색하고도 애매하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정작 손에 잡힐 만한 돋을새김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런데도 우선 눈에 잡히는 것은 우리헌법 전문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정식이다. 자유로운 민주주의의 기본질서를 의미하는 이 정식은 민주주의 이데올로기화에 선편을 친 본기본법에서 따온 것이다. 따라서 우리헌법 전문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정식은 본기본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초헌법적 체제이데올로기인 반공산주의를 전투적 방어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기 위한 마법의 요술상자나 다름없다. 이같은 마법의 요술상자가 우리헌법의 길목에서 장승처럼 버티고 있는 한, 민주주의는 백년하청이다. 민주주의의 민주화, 말 그대로 우리헌법의 민주주의를 좀 더 민주주의답게 가꾸기 위한 비판적 대안헌법이론의 민주주의 재구축 기획은 따라서 냉전자유주의의 찌꺼기이자 민주주의 이데올로기화의 첨병인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정식을 우리헌법에서 말끔히 털어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을 둘러싸고 최근 수구반동집단과 개혁진보진영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사생결단의 한판 힘겨루기가 보여주듯이, 그같은 청소 작업은 하루 이틀로 끝날 일이 아니다. 이럴 때일수록 필요한 것은 멀리 내다보고 짐짓 에둘러가는, 그러나 민주주의의 뿌리부터 다잡는 긴 호흡의 두더지 전략이다. 다름 아닌 헌법 속 민주주의 대장정,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위한 민주주의의 헌법 속 대장정이 바로 그것이다. 내친 김에 은유법을 빌려 굳이 표현한다면, 헌법 속 민주주의 대장정은 침묵의 장막에 가려있는 우리헌법의 글줄 사이에서 민주주의의 잠재력을 창조적으로 길어 올리는 일종의 바닷속 진주캐기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같은 전제 아래 비판적 대안헌법이론의 민주주의 재구축 기획이 염두에 두고 있는 헌법 속 민주주의 대장정의 두 축은 민주주의의 수직적 심화와 민주주의의 수평적 확장이다.

    민주주의의 수직적 심화는 위기의 민주주의 또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전제한다. 위기도 물론 위기 나름이다. 사상으로서의 민주주의의 위기가 있는가 하면,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의 위기도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헌법이 부르주아자유주의의 기본구도 아래 사상이나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를 국민주권의 틀 안에 가두어두면서 민주주의는 결정적 위기를 맞는다. 제도로서의 민주주의의 위기가 그것이다. 제도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위기의 뿌리는 민주주의의 자기소외이다. 다름 아닌 치자와 피치자의 비동일성이다. 치자와 피치자의 비동일성, 한마디로 타자결정에서 비롯하는 민주주의의 자기소외는 자본주의 헌법이 형태변화를 거듭함에 따라 모습을 달리한다. 계급내 분파민주주의인 소수파 의회민주주의 단계에서는 민주주의의 자기소외는 사회적 소수파인 부르주아계급이 사회적 다수파인 인민 대중을 정치적으로 고립시켜 일반의사 결정과정으로부터 배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계급간 민주주의, 보통선거제도의 도입에 따라 인민 대중이 일반의사 결정과정에 참여하게 되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단계에서는 민주주의의 자기소외도 의회주의의 위기라는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인민 대중이 포섭의 논리에 따라 체제 내화의 길을 걷듯이, 민주주의의 위기도 체제 내화의 성격을 띠게 된다. 하지만 순수 계급민주주의인 자유로운 민주주의 단계에 이르면, 사정은 달라진다.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는 뒷전으로 밀리고, 이데올로기로서의 민주주의가 앞쪽으로 다가선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민주주의에 봉사하는 보조 장치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것은 헌법 수호자의 이름으로 이데올로기적 억압의 기능을 떠맡게 되는 헌법재판소가 민주주의의 자기소외를 제도적 차원에서 주도한다는 사실이다.

    우리 헌법도 예외가 아니다. 민주주의의 자기소외로 말미암은 제도민주주의의 부정적 측면들을 우리헌법도 겹겹이 떠안고 있다. 한편으로는 자유로운 민주주의의 어두운 그림자가 선명히 모습을 드러내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소수파 의회민주주의의 잔재도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우리헌법이 자본주의헌법, 그것도 현대 자본주의헌법의 범주에 한 몫 끼면서 현대 자본주의헌법의 구조적 특질은 물론 자본주의헌법의 과거 유산까지도 고스란히 이어받은 데에서 오는 당연한 귀결이다. 이와 관련하여 확인해 두어야 할 사실도 적지 아니하다. 우선 우리헌법의 민주주의는 국민주권 아래의 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 형태도 제도민주주의의 진화 형태들 가운데 가장 진취적인 자유주의적 민주주의가 기조로 자리잡고 있다. 그 결과 부르주아자유주의의 권력분립 제도가 국가권력의 조직 원리로 버티고 있는 가운데 국민대표제도가 제도민주주의의 기본 뼈대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수직적 심화는 국민주권의 테두리 안에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민주주의적 잠재력을 다시 발견하여 급진주의적 방향으로 더욱 힘차게 밀고 나아가는 데에서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이 때 결정적으로 중요한 대목은 국민대표제도이다. 국민대표제도가 순수대표제도나 반대표제도를 뒤로하고 인민주권과의 접경지대인 반직접제도의 단계로 발을 들여놓으면, 자유주의적 민주주의가 국민주권의 시대를 마침내 마감하고 새로운 주권형태로 이행할 수 있는 역사적 계기가 마련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아래에서 민주주의의 자기소외는 대부분의 경우 의회주의의 위기로 표출된다. 의회주의의 위기는 의회의 구조적 위기, 다시 말해서 의회 그 자체의 위기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선거제도의 위기뿐만 아니라 정당제도의 위기까지도 포함된다. 그러나 의회주의의 위기와 관련하여 결정적 중요성을 갖는 외재적 변수는 헌법재판제도이다. 헌법재판제도로 말미암은 의회주의의 위기는 경우에 따라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기틀마저 뒤흔들어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제도는 관료주의적 법치국가에서 자유주의적 법치국가로, 자유주의적 법치국가에서 민주주의적 법치국가로 그리고 민주주의적 법치국가에서 다시 권위주의적 법치국가로 이어지는 법치국가 발전의 최종 단계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현상이다. 관료주의적 법치국가에서 자유주의적 법치국가로 가는 법치국가 발전의 과도기 단계에서는 법치국가는 민주주의의 씨앗을 뿌리거나 민주주의의 발전을 거드는 민주주의의 산파역을 맡는다. 그리고 민주주의적 법치국가 단계가 되면, 법치국가와 민주주의는 상호보완의 관계에 서게 된다. 그러나 법치국가 발전의 최종 단계인 권위주의적 법치국가에 이르면, 법치국가는 헌법재판국가의 옷으로 갈아입고 민주주의와 대치하게 된다. 아무튼 헌법재판제도로 말미암은 의회주의의 위기는 헌법재판소가 법률위헌심판권을 갖는 데에서 비롯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지엽적 문제일 따름이다. 더욱 큰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원내정당들이 국민정당을 표방하고 나오면,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을 다루는 방식도 달라진다. 이들 정당은 뜨거운 감자일수록 정치현안을 의회주의적 방법으로 해결하지 않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추어 헌법문제로 쟁점화한다. 이에 따라 헌법재판소는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정치 중재자의 구실까지도 떠맡는다. 의회가 껍데기뿐인 국민대표성마저도 포기하고 헌법재판소의 신민으로 스스로 몸을 낮춘데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같은 현상은 사회적 갈등이나 모순을 일정한 선에서 봉합할 수 있는 원내정당들의 정치적 조정 능력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지 않는 한 더욱 심화할 것이다. 따라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당민주주의의 확립을 통하여 의회의 국민 대표성을 높이고, 헌법재판제도를 민주주의가 용인할 수 있는 테두리 안에 가두어놓는 것이다. 아무래도 헌법개정이 뒤따라야 하는 장기적 과제이다. 당면 과제로 시급한 것은 현행 헌법재판제도의 반민주주의적 구조를 손질하기 위하여 헌법재판소법을 개정하는 것이다. 개정의 기본방향은 인적 구성 방식을 개선하고, 심판 권한을 대폭 축소하는 쪽으로 잡아야 한다.

    선거제도는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그것은 국민대표제도의 질은 물론, 민주주의의 질까지도 규정한다. 그런데도 우리헌법 아래에서는 소수파 의회민주주의 단계의 제한선거제도가 모습만 약간 손질한 채 선거제도의 표준 규격으로 아직도 버젓이 행세하고 있다. 사실상 제한선거제도의 구실을 떠맡고 있는 다수대표제도는 절대 다수대표제도나 상대 다수대표제도나 할 것 없이 투표가치와 결과가치의 불일치라는 치명적 약점을 안고 있다. 투표가치와 결과가치의 불일치는 그러나 산술상의 문제로 간단히 치부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생명줄인 치자와 피치자의 동일성을 파괴하고 민주주의를 타자결정으로 희화화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참여 기능을 통하여 치자와 피치자의 동일성을 최소한 회복하기 위하여는 비례대표제도 도입을 위한 전면적 제도개혁이 불가피하다. 하지만 비례대표제도에 대한 이의제기도 만만치 않다. 우선 국민주권의 관점에서 이의를 제기하는 입장이 있다. 비례대표제도의 정당 파편화 경향이 국민주권, 주권의 주체인 국민을 추상적 통일체로 상정하는 국민주권에 미칠 부정적 영향을 우려하며 비례대표제도를 정치적 낭만주의의 발상으로 일축한다. 그런가 하면, 국민대표제도,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순수대표제도의 시각에서 면책특권 등 제도적 측면을 강조하며 비례대표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관점도 있다.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파시즘이나 독일 나치즘의 예들을 앞세워 비례대표제도의 정치적 위험성을 경고하는 시각이 있다. 그러나 이들 이의제기를 자세히 뜯어보면, 거기에는 민주주의를 사회적 교통 양식이 아니라 정치적 지배 양식, 다시 말하면 정치적 통합의 수단으로 보는 도구주의적 발상이 있다. 이같은 도구주의적 발상은 부르주아자유주의의 선민주의적 편견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보통선거제도가 정당정치의 문을 열었다면, 민주주의 쪽으로 정당정치의 물꼬를 터준 것은 비례대표제도이다. 비례대표제도는 그러나 정당민주주의로 가는 징검다리일 따름이다. 정당민주주의가 정착하기 위하여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정당 체질의 개선, 즉 정당내 민주주의이다. 정당내 민주주의가 없는 정당민주주의는 속빈 강정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정당 현실은 사뭇 다르다. 한마디로 장막 속의 복마전이다. 우리 정당들은 본질적으로 하부구조가 아예 없거나 있더라도 전연 작동하지 않는 과두 소수집단 중심의 부평초 정당이다. 얼마전 원내 진출에 성공한 민주노동당을 빼놓으면, 정당의 이름만 빌린 붕당 형태의 정치적 사조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붕당 형태의 정치적 사조직도 나름의 규율이 필요하다. 때문에 깡패 조직 특유의 채찍과 당근의 논리가 조직운영의 기본철학이 된다. 조직운영의 이같은 기본철학은 정치적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일정 수준의 재정능력을 전제한다. 최소한의 물질적 생존 기반을 마련하기 위하여라도 붕당 형태의 정치적 사조직들은 물주 자본들과 공생관계를 맺고 그들을 행정 관료조직과 연결하는 정치적 통로의 구실, 좀 더 솔직히 표현하여 정치적 뚜쟁이의 역할을 자임하고 나설 뿐만 아니라, 그같은 역할분담을 자신들의 유일한 활동영역으로 받아들인다. 정당은 그러나 붕당 형태의 정치적 사조직이 아니다. 그것은 선거구 유권자들의 의사를 일정한 여과장치를 통하여 일반의사 결정과정에 투영하기 위한 정치적 매개 조직이다. 정당이 과두화하여 일종의 관료조직으로 변질하면, 여과장치의 중추부분을 장악하고 있는 과두 소수집단의 덫에 발목이 잡혀 정당의 정치적 매개 기능은 기대할 수 없게 된다. 다행하게도 우리헌법 제8조 2항은 정당내 민주주의에 관한 명문 규정을 두고 있다. 그러나 같은 조 4항으로 내려가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름 아니라 제8조 4항의 ‘민주적’ 기본질서를 강단 헌법학의 이른바 체계적합적 해석방식에 따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로 바꾸어 읽으면, 제8조의 정당 규정은 한숨에 정당 억압 규정으로 탈바꿈하기 때문이다. 제8조 2항이 마법의 요술상자인 자유로운 민주주의의 주박에서 벗어나 정당해산 심판제도의 사정권 밖에서 정당내 민주주의를 보장하기 위한 천사 규정으로 계속 남아있으려면, 해석남용의 소지가 많은 제8조 4항은 하루 속히 정리되어야 한다.

    의회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제도적 중심축이다. 때문에 의회를 가리켜 흔히 국민대표기관이라 부른다. 그러나 우리헌법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의회의 국민대표성을 딱 뒷받침할 만한 실정법상의 규정을 짚어내기가 생각처럼 쉽지 아니하다. 프랑스 혁명 때 국민주권 이론 구성에서 향도적 역할을 한 루소의 일반의사론에 따라 법률을 일반의사의 표명으로 의제한다면, 국회의 법률제정권을 규정한 우리헌법 제40조 정도가 고작일 것이다. 곤혹스러운 점은 그러나 이것만이 아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부분 대표 대 전체 대표라는 매혹적인 대립구도를 내세워 의회의 국민대표성에 오히려 엇박자를 놓을 만한 규정들도 눈에 띄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헌법 수호 책무를 명시한 우리헌법 제66조 2항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의회 구성원인 의원의 헌법상 지위에 눈을 돌리면, 의회의 국민대표성을 간접적으로 추정할 만한 규정들도 없지 아니하다. 국민에 대한 공무원의 봉사와 책임을 규정한 우리헌법 제7조, 국가 이익을 우선한 국회의원의 양심적 직무수행을 명시한 우리헌법 제46조 2항 그리고 국회의원의 면책특권을 못박은 우리헌법 제45조가 그것이다. 하지만 이들 규정은 의원의 당파적 아집과 정치적 편향, 나아가 국회의 계급적 성격을 은폐하기 위하여 부르주아자유주의가 발명한 이데올로기들 가운데 가장 철면피한 순수대표 관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우리 주위만 보더라도 현실은 정반대이다. 의원은 한마디로 전국민의 대표자가 아니다. 선출 모체인 선거구 유권자들의 대리인이며 소속 정당의 이행보조자이다. 게다가 이익단체의 거간꾼이기도 하다. 의회주의 위기의 뿌리인 의회의 이같은 대표성 위기를 극복하는데 왕도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의회 대표성의 위기와 관련하여 자주 입길에 오르는 이익단체의 법적 제도화는 주변적 의미 밖에 지니지 못한 곁가지치기에 불과하다. 순수대표의 법적 의제와 관계없이 우리 의회주의 헌법현실에서 일정 부분 작동하고 있는 반대표제도도 정당민주주의가 제대로 굴러가지 못하고 겉돌기만 계속하는 한, 의회 대표성의 위기를 푸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남은 유일한 대안은 급진주의적 접근방식이다. 의회 대표성 위기의 이념적 뿌리나 다름없는 국민주권을 인민주권 접경지대로 이동시켜 국민주권의 철옹성에 갇혀 정치적 휴면을 강요당한 선거구 유권자들을 주권의 주체로 다시 세워 그들에게 국가권력의 주인자리를 되돌려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테두리 안에서 선택이 가능한 현실적 대안은 국민주권에 인민주권의 이념을 접목한 반직접제도이다. 반대표제도의 역사적 진화형태인 반직접제도는 반대표제도 속에 이미 싹트고 있던 직접민주주의적 경향을 한 단계 끌어올려 제도적 차원에서 구체화하려는 주권 이행 과도기 단계의 새로운 대표형태이다. 주목을 끄는 것은 대표자보고제도, 대표자문책제도, 대표자소환제도 등이다. 이 밖에도 의회 대표성의 위기와 관련하여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이 있다. 다름 아니라 국민투표제도, 더 정확히 말하면 인민투표제도이다. 인민투표제도는 그러나 의회 대표성 위기와의 밀접한 연관에도 불구하고 주권 이행의 맥락에서 따로 다루어야 할 별개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의회주의의 위기와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간단히 짚고 가야 할 것이 있다. 다름 아니라 시민운동의 민주주의적 잠재력이다. 주지하는 대로 시민운동은 형태가 다양하다. 민중운동과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은 급진 노선의 진보적 시민운동이 있는가 하면, 수구세력의 외곽단체나 다름없는 반동적인 시민단체도 있다. 시민운동은 그러나 본질적으로 중간계급의 사회운동이다. 따라서 한편으로 비국가의 원칙을 그리고 또 한편으로 탈경제의 원칙을 세워 놓고 그 사이에서 나름의 활동공간을 자율적으로 구축해 나아간다. 이처럼 자율적 활동공간을 확보한 시민운동은 대중정당의 관심권이나 영향권 밖에 있는 사회적 현안들을 중간계급의 시각으로 재구성하여 정치적으로 쟁점화할 수 있는 최소한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인적 구성의 복잡성과 근시안적인 문제의식 때문에 활동반경은 스스로 한계가 있다. 게다가 공개와 토론을 중시하는 운동 주체들의 중간계급적 문화주의 취향으로 말미암아 시민운동은 물리적 수단보다는 합법적 경로를 통한 문제해결, 다시 말하면 쟁점 사항들의 의회주의적 해결방식을 선호한다. 이같은 의회친화적 경향에도 불구하고 시민운동이 비국가의 원칙을 고수하는 한, 의회를 통한 제도 속 행진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된다. 이같은 상황에서 시민운동이 의회주의 전략차원에서 동원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 잠재력은 의회의 주변을 맴돌며 산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외부 압박용 포위전략이 전부일 것이다. 따라서 시민운동이 기초민주주의의 주역으로 의회주의의 견인차가 되려면, 탈지배 유토피아를 꿈꾸는 시민사회이론들의 현학주의적 환상으로부터 벗어나 정당민주주의의 테두리 안에서 자신의 활동공간을 재배치하는 유연한 사고가 무엇보다 필요할 것이다.

    비판적 대안헌법이론의 민주주의 재구축 기획에서 민주주의의 수직적 심화 못지않게 중요성을 갖는 것은 민주주의의 수평적 확장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선 주목을 끄는 것은 사회권력의 양적 확산이다. 얼마 전만 하여도 사회권력하면 주로 재벌기업이나 노동조합을 떠올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우리사회도 각 부문의 문화가 빠르게 진행됨에 따라 구조적 복잡성이나 기능적 복잡성이 유례없이 증대하였다. 우리사회의 이같은 역동화 과정에서 각종 사회단체, 예컨대 공공서비스 관련 영리조직들이 분출하고, 이들이 저마다의 활동 영역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회권력으로 떠오름으로써 경제 노동 교육 문화 등 사회의 거의 모든 부문이 크고 작은 사회권력에 의하여 포위되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사회권력의 국가권력화와 이에 따른 사회의 재봉건화 현상이다. 사회권력 가운데 특히 경제력이 막강한 재벌기업은 이미 국가권력에 버금가거나 국가권력을 능가하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최근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기업도시 건설계획은 사회권력에 의한 우리사회의 재봉건화 현상이 어느 수준에 이르렀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기업도시 건설이 계획대로 추진된다면, 기업도시 건설의 특혜를 받은 재벌기업은 국토의 일부를 봉토로 확보하여 그 곳에서 사실상의 통치권을 행사하는 신봉건영주로 군림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일정 규모 이상의 사회적 영향력을 갖고 사실상 공적 기능을 수행하는 크고 작은 사적 권력들에 대한 민주주의적 통제가 지금처럼 절실한 때는 없을 것이다. 사정이 이러한 데도 강단 헌법학의 민주주의담론은 아직도 국가와 사회를 엄격히 구분하는 부르주아자유주의의 이분법적 분단 논리에 갇혀 민주주의를 국가영역의 문제로 축소한다. 강단 헌법학의 민주주의담론이 고수하는 이같은 자기한정을 민주주의담론의 보편적 전제로 받아들이면, 민주주의의 수평적 확장은 아예 논의 대상 밖으로 밀려나게 된다. 강단 헌법학이 사회권력의 문제를 민주주의의 시각에서 정공법으로 다루지 못하고, 기본권 제3자 효력이라는 복잡한 이론구성을 통하여 우회적으로 풀어가고 있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헌법의 테두리 안에서 민주주의의 외연을 수평적으로 확장하려면, 제도민주주의의 핵심 과제인 주권의 문제부터 새롭게 조명해야 한다.

    주권은 역사적 범주이다. 군주주권 국민주권 그리고 인민주권이 주권의 역사적 발현형태이라면, 시민주권은 이론적 가능형태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들 가운데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주로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은 국민주권과 인민주권이다. 그러나 국민주권이든 인민주권이든, 그 한가운데에는 민주주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국가와 사회를 엄격히 구분하는 부르주아자유주의의 이분법적 분단 논리가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우리헌법이 국민주권의 테두리 안에 자리잡고 있는 한, 민주주의의 수평적 확장은 이론적으로 불가능하다. 이같은 난점에도 불구하고 국민주권의 테두리 안에서 민주주의의 수평적 확장에 길을 열어줄 수 있는 이론적 가능성을 모색하려면, 발상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발상의 대전환은 국민주권의 창조적 재해석에서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그러나 국민주권 또한 부르주아자유주의의 이분법적 분단 논리에 뿌리를 두고 있으므로, 국민주권의 창조적 재해석이 가능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부르주아자유주의의 이분법적 분단 논리의 이론적 극복이 선행해야 한다.

    부르주아자유주의의 이분법적 분단 논리는 그러나 국민주권의 이론적 전제일 뿐, 우리헌법의 규범적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헌법을 자세히 뜯어보면, 오히려 부르주아자유주의의 이분법적 분단 논리를 암묵적으로 부정하는 단서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우리헌법 제1조 2항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모든 국가권력이 아니라 모든 권력이라고 못박은 이 대목은 부르주아자유주의의 이분법적 분단 논리뿐만 아니라, 주권형태 그리고 나아가 국가형태까지도 새롭게 해석할 여지가 얼마든지 있는 판도라의 상자나 다름없다. 비록 헌법해석의 기교나 곡예를 동원하지 않더라도 주권의 주체인 국민에게 귀속하는 모든 권력을 사회권력까지도 아우르는 포괄적 의미로 이해하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정적 중요성을 갖는 것은 우리헌법의 국가형태이다.

    주지하는 대로 우리헌법의 국가형태는 공화국가이다. 강단 헌법학의 공화국가 독해방식은 소박하고도 직설적이다. 공화국가는 군주국가의 대칭 개념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강단 헌법학의 이같은 독해방식은 독일 헌법학이나 한 때 독일 헌법학의 압도적 영향 아래 있었던 일본 헌법학의 전통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한 것이다. 사실 군주주의의 전통이 강하였던 바이마르헌법체제 이전의 독일 국법학에서 공화국가는 군주국가의 부정태에 지나지 않았다. 이같은 소극적 독해방식은 국가형태가 군주국가에서 공화국가로 이행한 바이마르헌법체제 아래에서도 그대로 이어져 공화국가는 군주국가의 부정태라는 관념이 뿌리를 내린다. 반대로 자유, 평등 그리고 우애의 깃발 아래 국민국가를 건설한 프랑스에서는 공화국가를 이해하는 방식이 다르다. 자본주의 헌법이 가장 순수한 형태로 꽃을 피운 프랑스 혁명기의 공화주의적 전통에 따르면, 공화국가는 군주국가의 단순한 부정태가 아니라, 하나의 공동체, 즉 자유, 평등 그리고 독립의 개별 주체들이 종교적 신념이나 사회적 신분 또는 정치적 입장과 관계없이 공통의 이념을 바탕으로 하나가 된 결합사회이다. 이처럼 공화국가를 공화주의적 결합사회인 공동체로 이해하면, 민주주의의 수평적 확장에 걸림돌이 되었던 부르주아자유주의의 이분법적 분단 논리는 설 자리가 없게 된다.

    이처럼 부르주아자유주의의 이분법적 분단 논리를 부정하는 공동체의 관점에 서게 되면, 주권의 관념에도 변화가 불가피하다. 우선 주권의 실체를 보는 눈이 달라져야 한다. 강단 헌법학에 따르면, 주권의 실체는 국가권력이다. 주권 바로 국가권력이라는 강단 헌법학의 주권 방정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우리헌법의 국가형태가 공화국가인 이상 주권의 실체는 결국 다름 아닌 공화국가권력임이 곧 드러난다. 그런데 공화국가는 위에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공화주의적 결합사회, 즉 공동체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이같은 일련의 새로 고쳐보기를 바탕으로 공화국가권력을 다시 풀어 읽으면, 주권은 국가권력이며 국가권력은 공화국가권력이다 따라서 공화국가권력인 주권은 공동체권력이라는 순차적 추론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같은 순차적 추론의 마지막 고리인 공동체권력은 국가권력과 사회권력의 통일, 국가권력은 물론 사회권력까지도 아우르는 포괄적인 것이다.

    뿐만 아니다. 주권의 실체가 달라지면, 주권의 주체는 달라져야 한다. 따라서 주권이 공동체권력이라면, 주권의 주체도 당연히 공동체구성원이어야 한다. 그러나 자명해야 할 이같은 사실이 결코 자명하지 않았다는데 주권, 다시 말하면 국민주권과 인민주권의 수수께끼가 있다 할 것이다. 국민주권은 말할 것도 없고 인민주권 역시 주권 곧 국가권력이라는 전제 위에 서있으면서도 주권의 주체를 국가 구성원으로 명확히 규정하지 않고 국적보유자의 총체인 국민 또는 유권자 집단인 인민이라는 별개의 범주로 한정하는 개념조작의 곡예를 서슴지 않는다. 국민주권의 국민이 사회적 다수파인 기층 국가 구성원들을 국가권력으로부터 배제하고 사회적 소수파가 전체의 이름으로 사회적 다수파인 기층 국가 구성원들까지도 대표하기 위한 개념장치라면, 인민주권의 인민은 국가권력으로부터 배제된 기층 국가 구성원들에게 국가권력을 되돌려 주기 위한 투쟁개념이다. 이처럼 주권의 주체인 국가 구성원들을 추상적 통일체로 관념화하거나 국가권력의 분점자로 개별화함으로써 국민주권의 국민과 인민주권의 인민은 저마다 나름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떠맡고 있다. 이와 달리 주권 주체의 공동체적 이론 구성은 국민주권의 국민이나 인민주권의 인민이 담고 있는 일체의 이데올로기적 함축을 털어버리고 공동체 구성원을 곧바로 주권의 주체로 설정할 수 있다는데 나름의 장점이 있다. 결정적 강점은 그러나 주권의 주체, 다시 말하여 공동체권력의 주체인 공동체 구성원을 국가권력과 사회권력의 통일인 공동체권력의 내적 구성에 대응하여 국가구성원과 사회구성원의 통일로 재구성할 수 있다는데 있다.

    문제는 그러나 남는다. 다름 아니라 국가 구성원과 사회 구성원의 통일인 공동체 구성원의 질적 규정이다. 이와 관련하여 다시 한번 되돌아보아야 할 것은 프랑스 혁명기의 공동체 관념이다. 프랑스 혁명기의 공동체 관념에 따르면, 공동체는 종교적 신념이나 사회적 신분 또는 정치적 입장과 관계없이 공통의 이념을 바탕으로 하나가 된 자유 평등 그리고 독립의 개별 주체들의 결합사회이다. 따라서 자유 평등 그리고 독립의 개별 주체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공동체 구성원이다. 그러나 비판적 대안헌법이론이 지향하는 공동체, 다시 말하여 자율과 연대의 기본권 공동체에서는 공동체 구성원의 질적 규정도 달라져야 한다. 공동체 구성원은 이제 자유 평등 그리고 독립의 개별 주체들이 아니라 자유 평등 그리고 독립의 개별 기본권 주체들이다. 이들 자유 평등 그리고 독립의 개별 기본권 주체는 프랑스 혁명기의 공화주의적 결합사회의 구성원인 본디의 그리고 참 의미의 시민, 한마디로 공동체시민이다. 자유 평등 그리고 독립의 개별 기본권 주체는 국민주권이나 인민주권 아래의 능동적 시민, 즉 선거권과 피선거권의 보유자에 지나지 않는 프랑스 혁명기의 부르주아 공화주의적 시민은 물론, 최근의 시민사회이론들이 시민사회 구성원의 미래상으로 다투어 내놓고 있는 비국가 탈경제의 원자론적 시민과도 다르다. 아무튼 이처럼 공동체 구성원을 자유 평등 그리고 독립의 개별 기본권 주체인 공동체시민으로 규정한다면, 공동체시민도 국가 구성원과 사회 구성원의 통일인 공동체 구성원의 내적 구성에 따라 국가시민과 사회시민으로 나뉘게 된다. 프랑스어의 citoyen, 독일의 staatsbürger 그리고 영어의 citizen과 같은 뜻을 지닌 국가시민이 국민주권이나 인민주권의 전통 위에 자리잡은 것이라면, 사회시민은 다음과 같은 전제, 예컨대 국가를 공화국가로 그리고 공화국가를 다시 공동체로, 나아가 공동체 구성원을 공동체 시민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 공동체시민을 국가시민과 사회시민으로 고쳐 읽은 다음, 국가시민과 사회시민의 통일인 공동체시민을 공동체권력의 분점자로 자리매김하는 시민주권의 토대 위에서만 개념 규정이 가능한 범주이다. 이처럼 국민주권 그리고 인민주권과 개념적으로 명확히 구별되는 시민주권이 적어도 주권 이론의 차원에서 확고히 뿌리를 내리면, 국민주권과 인민주권 아래에서 부르주아자유주의의 이분법적 분단 논리에 의하여 손과 발이 묶이고 있거나 묶이게 될 민주주의의 수평적 확장을 낙관적으로 전망할 수 있는 실천적 지평이 구체적 현실에서 조만간 열리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크고 작은 사회권력이 일정 수준 이상의 공적 기능을 수행하는 경우 공동체시민은 공동체권력의 한 부분인 사회권력을 분점하는 사회시민의 자격으로 사회권력에 대한 민주주의적 통제의 길로 나설 수 있을 것이다.



     

    1. 헌법현실은 일의적이 아니다. 이해하는 방식에 따라 느낌맛도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헌법현실은 개별 헌법규범들이 구체적 현실 속에서 나름의 맥락에 따라 조건반사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이 같은 이해방식은 헌법규범과  헌법현실의 밀접한 연관관계에 눈을 감음으로써 결과적으로 헌법규범과 헌법현실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관점을 놓치게 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헌법현실을 관계론적 입장에서 좀 더 역동적으로 이해한다. 이처럼 관계론적 입장에 서서 헌법현실을 역동적으로 이해하면, 헌법현실은 한마디로 헌법관계의 총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헌법관계는 본질적으로 권력관계이다. 헌법이 한 번 만들어지면, 정치세력들은 헌법의 실효성 여부를 떠나 헌법제도의 틀 안에서 자신들의 헌법의식을 일정한 방식, 예컨대 입법 행정 또는 사법의 방식으로 관철시키려고 한다. 이 때 관련 헌법규범의 해석을 놓고 치열한 다툼이 일어나고, 이에 따라 복잡한 대치구도가 짜여진다. 이처럼 개별 헌법규범들의 해석을 둘러싸고 경제적 심급이나 정치적 심급 또는 이데올로기의 심급에서 필연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헌법 해석 주체들 사이의 중첩적 길항관계가 다름 아닌 헌법관계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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