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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 국순옥 교수 순회강연 제1회 - 강단헌법학 비판
    헌법학 2007. 2. 13. 18:57

    국순옥
    교수 순회강연

    열린 눈으로 보는 헌법학
    - 반주류 민주주의헌법학 -

    제 1 회    강  연

    강단헌법학 비판


    2003. 9. 27


    민주주의법학연구회



    1. 의식의 부재

    헌법담론의 주요 생산기지는 헌법재판소와 대학강단이다. 그러나 헌법재판소가 제 구실을 다하지 못하면 헌법담론 주도권은 대학강단이 떠맡게 된다. 우리 헌법재판소의 경우가 그렇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우리 헌법 아래에서도 헌법의 최종 해석권은 헌법재판소가 갖고 있다. 하지만 헌법담론 생산에서 헌법재판소가 이론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대학강단을 따라 잡으려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이처럼 대학강단이 헌법재판소를 제치고 주류 헌법담론의 생산기지로 자리잡게 되면, 주류 헌법담론에서 강단헌법학이 갖는 의미는 대단히 크다고 할 것이다.

    헌법은 서양 근대의 산물이다. 그것은 또한 빼어난 의미의 부르주아적 계몽기획이기도 하다. 서양 근대의 이같은 부르주아적 계몽기획에 결정적 영향을 준 것은 이성주의적 헌법담론이다. 이성주의적 헌법담론의 효시는 로크의 시민헌법철학이다. 미국 건국 아버지들은 이성주의적 헌법담론의 역사적 증인들이다. 그러나 이성주의적 헌법담론의 본고장은 아무래도 계몽주의 사상이 근대의 문을 연 프랑스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시에예즈의 헌법이론은 이성주의적 헌법담론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이성주의적 헌법담론을 주도한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부지기수이다. 몽테스키외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들 이성주의적 헌법담론은 1787년의 필라델피아 헌법제정회의와 1789년의 프랑스 헌법제정회의에서 근대헌법의 꽃으로 결실을 맺게 된다.

    서양 근대와 동양 근대는 그러나 시간의 낙폭이 크다. 그만큼 우리의 근대는 모순투성이다. 그것은 과거와 미래를 끊임없이 오간다. 한 쪽에서는 전근대주의가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고, 또 한 쪽에서는 탈근대주의가 초고속으로 질주하고 있다. 바야흐로 자기중심적 사고가 필요한 때이다. 때문에 헌법이론의 시각은 다르다. 아니 달라야 한다. 근대는 미래완료형이 아니다. 과거완료형은 더 더욱 아니다. 그것은 현재진행형이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이제 막 근대의 문턱에 서 있다. 겨우 시작일 뿐이다. 우리에게 근대의 길을 처음으로 터 준 역사적 사건은 1945년의 반쪽 해방이다. 그리고 1948년 헌법은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공식적 문서이다. 그것은 우리의 경우 민주주의적 계몽기획이기도 하였다.

    사실 1948년 헌법은 역대 어느 헌법보다 진취적이다. 경제관련 조항들이나 사회권적 기본권 부분이 좋은 본보기들이다. 사회권적 기본권들 가운데 근로자 이익균점권은 혁명적이기까지 하다. 좌우 이데올로기의 격돌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폐허의 반쪽 해방 공간에서 적지 않은 산고 끝에 태어난 1948년 헌법이 진보주의 이념을 담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평가할 만하다. 진보주의 이념을 떠 받쳐주는 사회변혁적 해방 잠재력이 아직 밑바닥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의 현실에서는 이념이 현실을 배반하거나, 현실이 이념을 능욕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좌우 이데올로기 대립을 뛰어넘어 민주주의적 계몽기획으로 우뚝 서야 할 1948년 헌법이 걸어간 길은 아쉽게도 후자 쪽이다. 이후 1948년 헌법은 진보주의 이념을 하나씩 털어내는 수난의 계절을 맞게 된다. 그리고 고난의 행진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 헌법의 숙명으로 자리잡게 된다.

    1948년 헌법의 이같은 변신은 이미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헌법을 실천에 옮길 주체가 없었던 탓이다. 일상적 삶 속에 헌법이 구체적 현실의 한 부분으로 살아 숨쉬려면, 헌법 실천의 주체가 존재하여야 한다. 헌법 실천의 주체가 없으면, 아무리 좋은 헌법이라도 그림의 떡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관념적 허구이며 모래성처럼 언젠가는 제물로 허물어지고 만다. 1948년 헌법도 예외가 아니다. 그것은 모방헌법의 전형이다. 1948년 헌법제정에 주도적으로 개입한 것은 반쪽 해방 공간에서 탈식민지 새 질서의 구축에 정치적 명운을 걸어야 할 민중세력의 대표자들이 아니다. 일본제국주의 식민지체제 아래에서 특권적 자유를 누린 식민지 매판세력의 추종자들이 대부분이다. 헌법기초작업에 관여한 소수 법률전문가 집단의 면면을 보면, 1945년 헌법의 사회적 기반이 얼마큼 허술하였는지가 금방 드러난다. 그들은 일본제국주의 식민지체제 아래에서 법학교육을 받은 전형적인 식민지 지식인들이다.

    1948년 헌법으로부터 물려받은 이같은 태생적 한계로 말미암아 우리 헌법은 그 후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우리 헌법의 자기소외이다. 그 결과 우리 헌법은 현실 규정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강단헌법학의 노리개감으로 전락한다. 이처럼 강단헌법학의 노리개감으로 몸을 낮춘 우리 헌법은 정치적 시녀로 손을 빌려주기도 하고, 정치적 제물로 치명적 손상을 입기도 한다. 우리 헌법의 이같은 수모는 제1세대 헌법연구자들이 강단헌법학을 이끈 시기인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유난히 두드러진다. 우리 헌법사의 치부로 기록되어야 할 1972년의 이른바 유신헌법도 제1세대 헌법연구자의 손때가 묻은 군부파시스트들의 작품이다.

    제1세대의 헌법연구가들의 권력친화적 현실추수는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들 역시 1948년 헌법기초작업에 참여한 소수 법률전문가 집단과 마찬가지로 일본제국주의 식민체제 아래에서 식민지 경영에 필요한 법학지식을 전수받은 동일 범주의 식민지 지식인들이다. 제1세대 헌법연구자들이 식민지 지식인으로 체험한 세계는 천황제 파시즘 체제가 전부이다. 따라서 그들의 정신구조는 극히 폐쇄적이다. 당연히 이념적 지평은 좁을 수밖에 없다. 이럴수록 강자의 논리는 더욱 돋보이기 마련이다. 제1세대 헌법연구자들이 미국 점령군 당국의 반공산주의 노선을 심정적 일체감을 갖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게다가 그들의 권력친화적 현실추수를 더욱 부추긴 것은 반공산주의 전초기지로 자리를 굳혀가는 남쪽의 반식민지적 현실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반공주의는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이제 초헌법적 이데올로기이다. 유일한 탈출구는 집단적 자기최면이다. 이같은 집단적 자기최면은 마치 유전병처럼 세대를 가로질러 그대로 이어진다. 이처럼 세대에서 세대로 대를 잇는 헌법연구자들의 집단적 자기최면을 통하여 반공주의는 강단헌법학에도 깊고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게 된다.

    제2세대 헌법연구자들이 제1세대 헌법연구자들 사이에 끼어 대학강단에 서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초반이다. 그리고 그들이 강단헌법학의 주역으로 적극적으로 학문 활동을 편 것은 1980년대 이후이다. 제2세대 헌법연구자들은 제1세대 헌법연구자들처럼 체제이데올로기인 반공주의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처럼 반공주의의 테두리 안에서 강단헌법학의 전통을 이어가면서도 그들은 제1세대 헌법연구자들과 차이를 보인다. 특히 제2세대 헌법연구자들 가운데 독일 유학의 경험이 있는 이들은 이념적으로 유연하다. 극우 편향의 단세포적 과격주의자들은 드물고, 대부분 온건 보수주의에 기울거나 자유주의적 성향이 짙다. 그러나 방법론에서는 오히려 융통성이 덜 하고 자기성찰이 부족하다. 이같은 경향은 이론적 매개 과정을 거치지 않고 통합이론을 통째로 받아들인 헌법연구자들한테서 두드러진다. 제2세대 독일 유학파 가운데에도 물론 특정방법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들의 입장을 나름의 방식대로, 예컨대 때로 방법절충주의적으로 때로 방법중립주의적으로 비교적 자유롭게 엮어간 헌법연구자들도 없지 않다. 대표적 사례는 김철수 선생과 권영성 선생이다.

    강단헌법학은 세대 교체가 한창이다. 제2세대 헌법연구자들이 물러가고 제3세대 헌법연구자들이 강단헌법학의 중심축으로 떠오르고 있다. 조만간 강단헌법학을 이끌고 갈 제3세대 헌법연구자들의 내부 구성은 복잡하다. 보수주의자에서 진보주의자에 이르기까지 이념의 편차도 크다. 인식관심도 다양하다. 독일 일변도에서 벗어나 프랑스 헌법담론은 물론 미영 계통 헌법담론의 소개도 활발하다. 그러나 강단헌법학은 여전히 독일 헌법담론의 압도적 영향 아래 있다. 아무튼 독일 헌법담론의 강점은 체계성과 논리성이다. 독일 헌법담론의 이같은 철저성은 한마디로 주술에 가깝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때로 축복이 되기도, 때로 저주가 되기도 한다. 한 꺼풀을 벗기면 그 속에는 눈앞의 현실에 등을 돌리고 관념의 세계로 마냥 도피하려는 독일 정신 특유의 정치적 미계몽의 슬픈 과거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2. 방법의 편향

    우리 헌법도 이제 연륜이 제법 쌓일대로 쌓였다. 강단헌법학의 역사 역시 반백을 훌쩍 넘는다. 지천명의 나이다. 그런데도 내공이 부족한 탓인지 아직도 허술한 데가 한 두 가지 아니다. 이같은 사실은 무엇보다 주체성과 자주성의 잣대가 되는 방법의식의 편향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위에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제1세대 헌법연구자들은 일본제국주의 식민지체제 아래에서 법학교육을 받았다. 그들이 법학교육을 통하여 터득한 전문기량은 법실증주의적 해석기법이다. 그것은 개념법학적 색채가 짙게 배어 있는 나쁜 의미의 법실증주의적 해석기법이다. 이같은 법실증주의적 해석기법은 그들의 경우 단순히 법학적 전문기량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실존적 차원의 생존기량이기도 하였다. 1948년 헌법 이후 강단헌법학이 마주해야 하였던 암울한 헌법현실을 뒤탈없이 헤쳐 나가는데 도구주의적 해석기법이 유일한 장기인 법실증주의만큼 확실한 안전장치도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반공산주의가 체제이데올로기로 군림하면서 법실증주의는 강단헌법학에서 절대적 권위를 누리게 된다. 이같은 흐름은 예전 같지는 않지만 강단헌법학의 밑바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직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법실증주의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던 1950년대 중반 강단헌법학에는 또 하나의 변수가 돌출한다. 비록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결단주의적 시각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방법 쿠데타의 주역은 다름 아닌 한태연 선생이다. 그가 법실증주의의 대안으로 결단주의를 들고 나온 속내는 아직도 미궁이다. 민족상잔의 비극을 갈림길로 급박하게 돌아가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한태연 선생의 이같은 결단주의적 방향전환은 그러나 몇몇 자극적인 결단주의 개념들을 맛보기로 소개하는데 그쳤을 뿐, 체계적 안내로 이어지지 못하였다. 하지만 1960년대 중반 계엄놀이로 시작한 사실상의 비상사태 정국이 마침내 1972년 헌법 아래의 유신체제로 끝마무리되면서 결단주의는 다시 한번 주목의 대상이 된다. 결단주의의 이같은 화려한 재등장을 강단헌법학은 방법적 자기성찰의 계기로 살리지 못한다. 오히려 결단주의가 유신체제를 정당화하는 헌법담론의 머릿그림으로 한 몫을 하는데 강단헌법학이 앞장서게 된다. 결단주의의 이같은 정치적 도구화에 깊숙이 개입한 사람은 한태연 선생 외에도 갈봉근 선생이 있다. 그러나 결단주의를 보는 두 사람의 눈은 같은 높이가 아니다. 한태연 선생이 결단주의를 전략적 차원에서 사고하였다면, 갈봉근 선생의 경우 결단주의는 헌법현실의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한 일종의 전술적 무기에 지나지 않았다. 전략적 차원에서 사고하였든 전술적 입장에서 접근하였든, 두 사람에게 결단주의는 무기의 비판에 길을 터주기 위한 자기들 나름의 이른바 비판의 무기이었던 셈이다. 결단주의는 그러나 슈미트 헌법이론의 전부가 아니다. 한태연 선생과 갈봉근 선생은 슈미트주의자로 우리 헌법학설사의 한 구석을 메우는 영광을 독차지하면서도 혜안과 역리의 복합체인 슈미트 헌법이론의 총체적 이해에 이바지 한 것은 정작 별로 없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이 과제는 김철수 선생 밑에서 헌법수업을 마치고도 슈미트 헌법이론과 학문적 고락을 같이 하는 김효전 교수가 떠맡게 된다. 그의 외골쑤 고집에 힘입어 슈미트 헌법이론은 비록 주변적이기는 하지만 강단헌법학 안팎에서 여전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적어도 1960년대까지 결단주의는 법실증주의의 대안이 되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법실증주의가 난공불락의 철옹성은 아니었다. 변화의 바람을 몰고 온 것은 제2세대 헌법연구자들이다. 이들 가운데 각별히 주목해야 할 사람은 계희열 선생이다. 그는 헷세 문하생으로 강단헌법학에서 통합이론이 헌법담론의 공식의제로 오르는데 선구적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통합이론이 실증주의는 물론 1970년대 헌법담론의 총아인 결단주의까지 제치고 방법적 우위를 차지한 것은 제2세대 헌법연구자들이 강단헌법학을 주도하기 시작한 1980년대이다. 1960년대 후반에서 시작하여 1970년대를 가로지르는 대장정 끝에 통합이론이 마침내 강단헌법학의 단골식단으로 자리잡는데 큰 힘을 보탠 이는 말할 것도 없이 허영 선생이다. 허영 선생하면 통합이론이 떠오르고 통합이론하면 허영 선생이 생각날 만큼, 그는 통합주의적 방법의 홍보에 혼신의 힘을 다 쏟는다. 허영 선생은 나아가 강단헌법학의 게르만화라는 달갑지 않은 비난의 화살을 비껴가기 위하여 자신의 통합주의적 방법을 동화적 통합이라고 이름붙인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 곰곰이 뜯어보면, 동화적 통합은 통합이론 가운데 빛이 바랜 지 오래인 스멘트의 반민주주의적 통합이론을 그대로 옮겨온 것임이 금새 드러난다. 한마디로 말하면, 통합이론에 대한 허영 선생의 이해는 극히 피상적이다. 그가 자신의 통합주의적 방법을 동화적 통합이라고 손쉽게 꼬리표를 달만큼 통합이론의 이론적 계보, 이론적 입장 그리고 이론적 맥락이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니다. 우선 통합이론은 제1세대에서 제3세대에 이르기까지 가지가 멀리 뻗어있을 만치 세대별 이론적 계보가 만만치 않다. 이론적 입장도 중도파를 사이에 두고 우파와 좌파가 갈린다. 그리고 같은 세대에 속하고 이론적 입장을 같이 하면서도 문제접근방식에서 차이가 난다. 그러나 큰 틀 속에서 보면, 통합이론 안에는 얼추 세 가지 흐름이 있다. 하나는 위로부터의 통합을 강조하는 반민주주의적 통합이론, 밑으로부터의 통합에 역점을 두는 민주주의적 통합이론 그리고 이 둘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하려는 절충주의적 입장이 그것이다. 첫 번째 흐름을 대표하는 것은 우파 스멘트학파이며, 좌장은 통합이론의 창시자인 스멘트이다. 두 번째 흐름의 물꼬를 트는데 결정적 구실을 한 이는 통합이론 제2세대의 대표주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보이믈린이다. 세 번째 흐름은 통합이론의 주류에 해당한다. 역시 통합이론 제2세대의 대표 주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헷세가 맨 앞줄에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허영 선생의 동화적 통합은 위로부터의 통합, 다시 말하면 하향식 통합을 의미한다. 이같은 사실은 그의 헌법이론이 민주주의를 형식적으로 이해할 뿐만 아니라 기본권의 객관법적 측면을 지나치게 부각시키는 데에서 잘 드러난다. 나아가 국민의 기본의무를 한껏 강조하는 대목에 이르면, 동화적 통합의 반민주주의적 지향성은 더욱 분명하여진다. 그런데도 통합이 하필이면 왜 동화적이어야 하는지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때로 동화적 통합의 이른바 동화는 헷세가 즐겨 사용하는 Einheitsstiftende Integration=통일조성적 통합에서 생각의 실마리를 얻은 것은 아닐까 고개를 갸우뚱하여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 실제로 피부에 와 닿는 느낌은 나치즘의 전체주의적 통합이데올로기의 핵심인 Gleichschaltung=획일화의 이미지이다. 젊은 감성 세대의 말법대로라면 그것은 차이 죽이고 한 줄로 세우기이다.

    아무튼 헌법담론은 일정한 방법을 전제로 한다. 이른바 헌법학 방법의 문제이다. 헌법학 방법은 다양하다. 담론 주체의 헌법관에 따라 헌법학 방법도 차이를 보인다. 결정적 변수는 헌법과 정치의 관계이다. 우선 생각하여 볼 수 있는 것은 탈정치적 헌법담론의 본보기인 법실증주의적 방법이다. 그것은 헌법을 정치로부터 떼어내어 헌법내재적 관점을 중시한다. 이와 반대로 헌법과 정치의 내적 연관성을 강조하며 헌법을 정치적 법으로 규정하는 시각이 있다. 이같은 정치적 헌법담론은 정치의 본질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여러 갈래로 나누어진다. 정치의 본질을 적과 동지의 식별로 보는 결단주의적 헌법담론이 있는가 하면, 정치의 본질을 통합으로 규정하는 통합주의적 헌법담론도 있다. 바이마르헌법 아래에서 사회민주당 계열의 헌법학자들이 내세운 계급타협주의적 헌법담론은 계급타협에서 정치의 본질을 찾는다. 최근 독일 공법학계에서는 정치의 본질을 연대로 자리매김하는 공화주의적 헌법담론이 주목을 받고 있다. 이밖에 근대헌법사상의 뿌리로 돌아가 정치의 본질을 절차의 관점에서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려는 자유주의적 입장도 있다. 절차주의적 헌법담론이 그것이다. 강단헌법학의 방법 선택은 그러나 나름의 논리가 부족하다. 방법에 대한 비판적 자기성찰, 다시 말하면 비판적 방법의식이 없는 데에서 오는 당연한 귀결이다.

    법실증주의만 하여도 그렇다. 법실증주의는 방법 이전에 하나의 철학이다. 거기에는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고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라는 반사실적 낭만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헌법이 이성적일 때, 예컨대 헌법이 진보주의 이념을 담고 그것을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실천에 옮길 제도적 장치가 마련된 경우 법실증주의는 민주주의적 법치국가의 테두리 안에서 진보주의 이념을 실현하는 최상의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패전의 혼란 속에서도 사회진보의 견인과 제도개혁의 추동에 우호적인 헌법환경을 조성하는데 큰 역할을 한 바이마르헌법 아래의 법실증주의와 제2차 세계대전 후 평화헌법의 수호에 결정적 구실을 한 현행 일본헌법 아래의 법실증주의가 좋은 본보기들이다. 그러나 유신헌법처럼 진보주의 이념을 외면하고 민주주의 원칙은 물론 최소한의 법치국가제도마저 부정할 경우 법실증주의는 헌법의 이름으로 사회진보와 제도개혁을 가로막고 반민주주의적 불법국가에 면죄부를 얹어주는 반동적 기능을 도맡게 된다. 이같은 극단적 경우가 아니더라도 법실증주의는 현상유지의 보수적 기능에 가장 충실한 방법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법실증주의의 그같은 방법적 한계를 인식하고도 법실증주의적 방법을 고집한 헌법연구자들이 과연 몇이나 되는지 궁금거리다.

    강단헌법학에서 방법의식이 그래도 깨어있는 헌법연구자들이 있다면 슈미트주의자들이 고작일 것이다. 하지만 슈미트주의자들도 슈미트 헌법이론 가운데 한 부분만을, 그것도 인상주의적 수법으로 지나치게 돋을새김함으로써 그림의 전체 모습을 시야 속으로 끌어들이는데 실패한다. 결단주의는 말할 것도 없이 슈미트 헌법이론의 중심축이다. 그리고 그 핵심은 적과 동지의 식별이다. 결단주의의 이같은 양도논법이 지니고 있는 의미는 의외로 심장하다. 그것은 역사의 수레바퀴는 앞으로 굴러가되 결국 이성의 테두리 안에 머물게 될 것이라는 낙관주의적 역사관이 몸에 베인 부르주아계급의 정치적 낭만주의에 대한 경고의 뜻을 담고 있다. 이같은 이념사적 맥락이 손에 잡힐 때, 비로소 사회주의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에도 칼날을 날카롭게 세우는 결단주의의 전략적 의도가 분명하게 된다. 한마디로 말하면, 결단주의는 부르주아계급의 독재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 수사학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마녀사냥 식의 정치적 폭력주의는 결단주의의 숙명이기도 하다.

    끝으로 짚어야 할 것은 통합이론을 선호하는 헌법연구자들의 방법의식이다. 사회통합은, 그것이 경제적 통합이든 정치적 통합이든 아니면 문화적 통합이든, 현대 사회과학의 주요 관심사 가운데 하나이다. 통합이론이 강단헌법학에서 나름의 흡인력을 과시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통합이론의 소개에 앞장 선 허영 선생의 동화적 통합이 이론적으로 기대고 있는 스멘트의 반민주주의적 통합이론은 물질문명과 정신문화를 엄격히 구분하는 독일 관념론 특유의 문화주의적 전통에 터 잡고 있다. 이같은 문화주의적 경향은 대학의 자유를 해석하는 스멘트의 독특한 시각에서 유감없이 드러난다. 더욱이 정신문화 중심의 문화주의적 관점이 가치철학과 손을 잡을 때, 스멘트의 반민주주의적 통합이론이 지니고 있는 교조주의적 독단논리는 더욱 도드라진다. 슈미트의 이른바 가치의 횡포는 그 같은 점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러나 가치의 횡포도 나름의 문법이 있다. 횡포의 주체인 가치가 대자적 존재로 자립하지 못한 경우 가치의 횡포조차도 관념적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은 의사가치주의의 자기기만적 허위의식뿐이다.


    3. 이론의 빈곤

    담론도 나름의 질서가 있다. 헌법담론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의 대상이 되는 것은 강단헌법학의 이른바 통설이다. 통설은 그러나 그 실체가 아리송하다. 통설은 지배적 견해이며 지배적 견해는 지배계급의 견해라는 맑스의 비판적 시각은 차라리 사치에 가깝다. 강단헌법학의 담론현실은 사뭇 다르다. 강단헌법학의 헌법담론에서 담론질서를 이끌어 가는 통설은 교과서 시장에 진출한 몇몇 유력 헌법연구자들의 사적 의견인 경우가 오히려 대부분이다. 그러나 통설의 이름으로 절대적 권위를 누리는 이들 몇몇 유력 헌법연구자들의 사적 의견조차도 따지고 보면 독일 공법학계의 주류 헌법담론을 주도하는 헌법교과서의 입장이나 헌법평석서의 견해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독일 공법학계의 주류 헌법담론이 우리 옷으로 갈아입고 강단헌법학의 헌법담론을 쥐락펴락하는 종속적 담론 풍토가 지속되는 한, 통설이 독일 헌법교과서의 입장이나 헌법평석서의 견해를 이리저리 얽어놓은 쪽매붙임 이상의 의미를 갖기는 어려울 것이다. 통설이 헌법담론 게르만화의 첨병이라는 일각의 비판은 전혀 근거없는 험담만은 아니다.

    1950년대는 그야말로 시계 영점의 잃어버린 10년이었다. 전쟁의 화마가 할퀴고 간 폐허 위에 남은 것은 절망과 좌절뿐이었다. 이같은 총체적 위기 속에서 헌법의 위기도 덩달아 움트기 시작한다. 직접 도화선은 이승만 개인의 권력 절대화 욕구와 권력 사유화 망상이었다. 대통령 직접 선거제도를 도입한 1952년의 제1차 헌법개정이 권력절대화 욕구의 첫 번째 결실이었다. 그리고 권력 사유화의 길을 터주는 데 길라잡이의 구실을 한 것은 대통령직 3선 금지의 족쇄를 풀어준 1954년의 제2차 헌법개정이었다. 이후에도 대통령 연임을 둘러싼 헌법개정 줄다리기는 단속적으로 이어져 계속 헌법 위기의 불씨로 남게 된다. 그러나 대통령 연임 헌법개정에 대한 강단헌법학의 대응방식은 투항주의적 저자세이었다. 강단헌법학의 이같은 무기력 탓에 대통령 연임 문제가 1980년 제8차 헌법개정에 의하여 비록 제한된 범위 안에서나 입법적으로 해결될 때까지 헌법개정담론을 이끈 것은 법실증주의적 헌법개정무한계설이다. 결단주의적 헌법개정한계설도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이론내재적 한계 때문만은 아니었다. 발목을 잡은 것은 오히려 슈미트주의자들의 반이론적 현실추수주의이었다. 이같은 담론 상황에서 강단헌법학에 필요한 것은 발상의 대전환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헌법개정담론을 전술적 차원에서 전략적 차원으로 끌어올려 법실증주의적 헌법개정무한계설과 결단주의적 헌법개정한계설의 이론적 함의를 사회 진보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재조명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강단헌법학은 시종 이론적 태만으로 일관하였다. 강단헌법학의 허물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강단헌법학은 법실증주의적 헌법개정무한계를 슬쩍 거두어들이고 그 대신 결단주의적 헌법제정무한계설을 들고 나와 문제의 초점을 오히려 흐려놓는다. 더욱 가관인 것은 결단주의적 헌법제정무한계설에 맞불을 놓기 위하여 강단헌법학이 내놓은 대응논리는 헌법제정의 자연법적 한계이다. 그러나 정작 되짚어야 할 것은 자연법의 실체이다. 그것은 혁명의 논리로 원용되기도 하고 반혁명의 논리로 봉사하기도 한다. 자연법의 이같은 이중성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그것에 대한 물신주의적 신앙을 고집하는 것은 그렇지 않아도 위험수위에 다다른 속류 옥시덴탈리즘의 덫에 스스로를 가두어 두는 것과 다름없다.

    나아가 1960년 헌법의 특색들 가운데 하나는 정당조항의 신설이다. 이같은 정당조항은 1962년 헌법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뿐만 아니라 1962년 헌법은 국회의원이 당적을 이탈 또는 변경하거나 정당이 해산하는 경우 의원직 상실도 자동적으로 뒤따른다는 규정을 둔다. 다름아닌 정당국가적 경향의 강화이다. 그런데 정당국가적 경향을 집약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정당조항은 본기본법의 규정을 그대로 본딴 것이다. 아무튼 이를 계기로 강단헌법학은 바이마르공화국의 주류 헌법담론에 이어 독일연방공화국의 주류 헌법담론과 직접 대면하게 될 모처럼의 기회를 얻는다. 대면의 첫 상대는 말할 것도 없이 라이프홀츠의 정당국가적 직접민주주의론이다. 라이프홀츠는 주지하는대로 나치스 정권을 피하여 영국으로 건너가 종전 후 귀환한 망명지식인의 한 사람이다. 그의 헌법이론은 현상학적 사고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학문 역정의 초기에 라이프홀츠는 결단주의에도 일정한 이해를 보이다 후에 통합이론 쪽으로 기운다. 이같은 입장 변화는 정당국가의 직접민주주의적 해석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정당국가에 대한 라이프홀츠의 직접민주주의적 해석은 정당국가에 대한 슈미트의 부정적 견해를 통합주의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극복하려는 이론적 노력의 소산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1960년대의 헌법현실에 비추어 볼 때, 라이프홀츠의 주장은 이론적 적실성이 극히 희박한 것이었다. 정당국가적 경향의 강화는 민주주의를 직접민주주의 쪽으로 한 발 전진시키기는커녕, 민주주의를 도리어 인기영합적 동원민주주의로 변질시켜 대통령 독재를 정당화하는 빌미로 악용될 소지가 훨씬 더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만 하여도 강단헌법학의 인식관심과 담론수준이 비교적 낮은 단계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라이프홀츠의 정당국가적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적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같은 공백은 권영성 선생이 1970년대 중반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후 라이프홀츠 재발견의 형태로 부분적이나마 메워지게 된다.

    1972년 헌법은 헌법이라고 부르기 보다 반헌법이라고 자리매김하는 것이 오히려 진실에 더 가깝다. 폭력전장이나 다름없는 이 헌법에서 무엇보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통치구조의 변화이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것은 권력의 인격화이다. 그 결과 집행권력의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이 국가권력 위에 군림하고 법치국가의 제도적 표현인 권력분립은 빈 껍데기만 남게 된다. 전형적인 파시즘국가형 정부형태이다. 이처럼 통치구조가 파시즘국가형 정부형태로 이행한 데에는 나름의 원인들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국가주도 산업화 전략에 따른 사회갈등의 심화이다. 유신 전후의 이같은 사회경제적 맥락을 고려할 때, 1972년 헌법이 전문에서 민주주의공화국의 이념적 지표로 이른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제시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그러나 생소한 개념은 아니다. 슈미트주의자 한태연 선생은 1950년대 중반 그의 헌법교과서에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하여 이미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강단헌법학의 헌법담론에서 주목의 대상이 된 것은 1972년 헌법 이후이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한 강단헌법학의 담론수준은 한마디로 기대치 이하이다. 통설에 따르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방어적 민주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같은 해석의 근거로 통설이 천편일률적으로 들고 있는 것은 독일 연방헌법재판소의 1952년 국가사회주의당 판결과 1956년 독일공산당 판결이다. 따라서 강단헌법학의 헌법담론에서는 방어적 민주주의가 냉전자유주의의 산물이며, 냉전자유주의는 반공산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비판적 인식이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고 있다. 일종의 자기검열이라고 할 강단헌법학의 반이론주의적 소극 자세로 말미암아 반공산주의가 체제이데올로기로 자리잡고 있는 헌법현실에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우리 헌법을 반공산주의의 틀 속에 가두는 이데올로기적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

    현행 헌법이 전문 개정의 형식으로 손질을 본 것은 1987년이다. 1987년의 이른바 시민 대항쟁의 개헌 화두는 대통령 직접 선거제도의 도입이었다. 이 때 덤으로 따라 온 것이 헌법재판제도이다. 헌법재판제도의 전범으로 통하는 독일형 헌법재판제도를 우리 헌법이 채택한 것은 그러나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60년 헌법도 현행 헌법과 마찬가지로 독일형 헌법재판제도를 두었으나 헌법재판소가 설치되기도 전에 단명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현행 헌법 아래에서 괄목할 현상은 헌법재판소의 약진이다. 그 결과 헌법재판소가 입법권력과 집행권력 못지 않게 국가권력의 한 축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헌법현실이다. 헌법규정만 보아도 헌법재판소의 권한은 막강하다. 대표적인 것은 법률위헌심판 권한과 헌법소원심판 권한이다. 이밖에도 권한쟁의심판 권한, 탄핵심판 권한 그리고 정당해산심판 권한이 있다. 이처럼 헌법재판소의 권한이 그물망처럼 촘촘히 짜여진 만큼 헌법재판소의 일거수 일투족이 몰고 오는 사회적 반향도 만만치 않다. 헌법재판소의 사회적 기능이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도 강단헌법학의 목소리는 한결같다. 통설에 따르면, 헌법재판소가 떠맡고 있는 사회적 기능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헌법보장과 소수자보호이다. 하지만 헌법재판소의 헌법보장기능은 통설이 주장하듯이 자명한 원리가 아니다. 법치국가의 형태가 변함에 따라 헌법보장의 주체도 달라진다. 관료주의적 법치국가에서는 집행권력이, 자유주의적 법치국가나 민주주의적 법치국가에서는 입법권력이 그리고 과두주의적 법치국가에서는 사법권력이 각각 헌법보장기능을 떠맡는다. 그리고 사법권력이 헌법보장기능을 떠맡고 있는 과두주의적 법치국가의 최고형태는 헌법재판국가이다. 법치국가의 이같은 계보학적 문맥에 따르면, 헌법재판소가 헌법보장기능을 떠맡는 것이 헌법보장의 가장 이상적 형태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더욱이 현행 헌법이 헌법보장의 주체로 명시적으로 언급한 것은 집행권력의 수장인 대통령뿐이다. 뿐만 아니라 헌법이 침묵하고 있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국민대표기관을 자임하는 국회의 헌법 보장기능을 비껴가는 것도 헌법해석의 기본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다. 나아가 헌법재판소의 소수자보호기능도 비판적 시각으로 곰곰이 따져보아야 할 구석들이 적지 않다. 그렇다고 법률위헌심판이나 헌법소원심판이 일정한 조건 아래에서 소수자보호에 나름의 구실을 할 수 있다는 사실까지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소수자의 실체이다. 계급투쟁의 수준, 계층갈등의 양상 등 사회적 역학관계의 추이에 따라 사회적 소수자가 정치적 다수자로 군림하는가 하면, 사회적 다수자가 정치적 소수자로 주저앉는 경우도 흔히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헌법재판소의 소수자 보호기능을 추상적 차원에서 지나치게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헌법재판소의 이같은 약진과 대조를 이루는 것은 국회 위상의 추락이다. 사실 국회가 국민대표기관으로서의 구실을 포기한지는 오래이다. 국회의 입법기능도 파탄 직전의 위기 상황이다. 시민들의 머리 속에 자리잡고 있는 국회의 모습은 한마디로 부정적이다. 정치건달들의 놀이터이나 정치모리배들의 복마전 정도의 이미지가 모두이다. 이처럼 국회가 의회주의의 상식에서 빗나가도 한참 빗나간 데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원인들이 중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거시적 측면에서 접근해야 할 측면이 있는가 하면, 미시적 관점에서 짚어야 할 대목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정당정치의 파행이다. 정당정치 파행의 직접원인은 체제이데올로기인 반공산주의의 이분법적 사고에 의하여 틀지워진 정치지형의 특수성이다. 진보주의정당이 발붙일 여지가 없이 포섭과 배제의 논리가 철저히 작동하는 반민주주의적 정치지형을 주름잡는 것은 정당 이전의 가부장주의적 사조직들이다. 이들 정당 유사 사조직들의 내부 구성은 단순하다. 맨 위에는 조직관리의 총책임자인 우두머리가 있고, 그 아래에는 우두머리의 낙점 덕분에 여의도 의사당으로 진출할 기회를 거머쥔 국회의원들이 있다. 따라서 이들 사이에는 봉건적 충성복종관계가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이같은 봉건적 충성복종관계가 국회의원의 행동반경을 제약하는 윤리규범의 기본틀로 남아있는 한, 의회주의를 다시 세우기 위한 제도개혁도 백약이 무효이다. 이같은 한국형 의회주의 위기에 대한 해법을 찾아 맨 먼저 나선 것은 시민운동단체들이다. 이들 시민운동 단체가 내놓은 첫 번째 해법은 국회의원 의정활동 감시이다. 그러나 국회의원 의정활동 감시가 한계를 드러내자 시민운동 단체들은 좀 더 근본적인 해법을 모색한다. 국회의원 출마자격이 의심스러운 특정 입후보자에 대한 낙선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이마저 사법권력의 시대착오적 법리 저항에 발목이 잡혀 여의치 않게 되자 시민운동 단체들은 이제 정치참여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 이처럼 울타리 밖에서는 헌법현실이 요동치고 있는데도 강단헌법학은 시대의 흐름에 아예 눈을 감고 티베트의 수도승들처럼 한가롭게 옛 노랫가락만 되뇌고 있다. 이미 오래 전부터 강단헌법학 밖에서 활발히 논의되고, 최근에 들어 강단헌법학 안에서도 일부 소장 헌법연구자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는 시민사회적 공론영역의 화두는 따지고 보면 의회주의를 위기에서 구출하기 위한 일종의 반성적 이론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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