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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 인권의 역사 - 박래군
    헌법학/기본권론 2007.02.14 00:48


    인권의 역사



    2005. 7. ~ 2006. 4.


    박래군

    월간『사람』편집인,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 이 글은 박래군 선생님께서 2005년 7월부터 2006년 4월까지 월간『사람』에 연재하신 글을 전체적으로 읽기 편하도록 순서대로 이어서 묶은 것입니다. 이 글은 인권의 역사를 쉽게 조망할 수 있으면서도 깊이 있는 설명을 담고 있어 법학 전공자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인권의 역사 ① 인권, 그 탄생의 배경 - 자유로운 인간은 어디에서 왔나
    인권의 역사 ② 시민혁명과 인권의 탄생(1) - '능동적 시민'에게 제한된 자유의 등장
    인권의 역사 ③ 시민혁명과 인권의 탄생(2) - '형식적 평등'으로 귀결된 프랑스 혁명
    인권의 역사 ④ 산업혁명과 사회권의 발전 - 바리케이드 위에 나부낀 평등의 깃발
    인권의 역사 ⑤ 1871년 파리코뮌의 인권구상 - "권력과 재산을 만인의 것으로 한다"
    인권의 역사 ⑥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의 자유주의 - 자유주의가 인권의 역사에 남긴 깊은 발자취
    인권의 역사 ⑦ 혁명 러시아에서의 인권현실 - 인간해방을 위한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의 실험
    인권의 역사 ⑧ 민족자결권의 형성과정과 1,2차 세계대전까지 - 전쟁 앞에 무산된 '평화'와 '인권'의 꿈
    인권의 역사 ⑨ 세계인권선언에서 냉전 시기까지 - 유엔을 통한 국제인권조약의 탄생과정
    인권의 역사 ⑩ 1968년부터 현재까지 - 지구화 시대에서 인권, 기로에 서다.

    자유로운 인간은 어디에서 왔나
    인권의 역사 1 | 인권, 그 탄생의 배경


    월간『사람』제1호 | 2005년 7월
    어떤 사물이나 사회현상을 올바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와 관련된 역사를 제대로 아는 것이 한 방법이다. 우리가 쉽게 말하는 인권의 본질을 파악하고 이후의 인권의 발전 방향을 예측하기 위해서도 그 역사적 흐름을 쫒아감으로서 제대로 손에 잡히게 된다. <사람>은 인권에 대한 대중적인 교재가 없는 우리 현실에서 인권의 역사적 과정을 간결하게 추적하고자 이 꼭지를 만들었다. 앞으로 10회에 걸쳐서 인권의 성립과정과 발전과정을 추적할 것이고, 그를 통해 인권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인권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태어날 때부터 누구에게도 빼앗기거나 넘겨줄 수 없다는 오늘날에는 너무도 당연히 인정되는 가치이다. 인권은 당연히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며, 이를 무시하게 되면 사회적인 비난만이 아니라 국제사회의 비난에도 직면하게 된다.

    그렇지만 이런 인권이 인류역사에서 등장하게 된 것은 18세기 이후 서유럽 사회에서였다. 이전까지 인류의 역사에서는 인권 관념의 단초가 되는 몇몇 사건이나 사상들이 돌출적으로 등장한 적은 있었지만 그 사회의 보편적인 가치관으로 인정된 것은 근대자본주의에서였다. 고대의 노예제 사회에서나 중세사회의 엄격한 신분적 질서에 인간들이 묶여 있던 봉건사회에서는 인권은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은 인간해방의 요구를 어느 시대에나 갖고 있었고, 그것을 표현하여 왔다. 고대 노예제 사회에서의 노예들의 반란이 그랬고, 중세사회에서 농노들의 반란이 그랬다. 인권은 이 보편적인 인간해방의 요구가 근대시민혁명을 거쳐 나타난 ‘한 역사적 시점에서의 특수한 표현’인 것이다.

    즉, ‘근대’라는 한 역사적 사회에서 국가권력과 개인의 자유와의 관계를 지배하는 원칙을 표현하는 이념이 인권이다. 따라서 기본적 인권이란 18세기 이래 자본주의 나라들의 업적 경험을 담고 있는 것이었다. 어느 시대에나 보편적 인간해방의 요구가 있었지만, 우리가 현재 말하고 있는 인권은 근대 자본주의 시대 이후의 인간해방의 요구를 전제로 해서 인간에게 의식되고 이론화되고 불굴의 투쟁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소유는 근대사회 ‘기본적 인권’의 핵심

    인권은 서유럽의 중세사회가 해체되고 자본주의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이때의 기본적 인권의 주체는 ‘개인’인 인간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원칙, 권리는 국가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국가 이전에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국 어떠한 국가 권력을 가지고도 박탈할 수 없는 ‘불가침’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라는 원칙이 나오게 된다.

    인권사상이 보편적인 사회사상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사회적 기반이 필요했는데, 그 사회적 기반은 보편적 상품교환 사회의 성립이었다. 자유시장에서 자유경쟁을 통해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으로서 등장한 자유․독립․평등한 근대적 시민은 곧 상품소유자를 일컬었다. 노동력의 판매자와 구매자가 어떤 제3자의 간섭도 받지 않고 각자의 자유의사에 따라 서로 상품교환주체로서 완전 자유롭다는 의미에서 평등한 입장으로 거래한다는 생각이었다.

    이런 사상을 대표하는 사람이 로크였다. 로크는 인간에게 고유한 권리로서 생명ㆍ자유ㆍ재산을 들어 이것을 소유(Property)로 총괄해 불렀다. 시민사회 이전에 출현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자연권(自然權)으로 사고했고, 인간에게 고유한, 인간에게 불가결한,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되고 있었으므로 자연권이었다. 이런 로크의 사상은 프랑스와 미국의 인권선언의 사상적 원류를 이루었다.

    인권의 주체가 자유롭고 평등한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이며, 사회나 정부는 이 인간이 태어나면서 갖는 권리인 자연권을 보다 잘 지키기 위해 그 인간들의 동의에 기초해 형성되었다는 생각이 ‘기본적 인권’의 이념이다.

    ‘개인은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자유롭고 평등하다!’ 이것이 근대 시민사회의 전제였으며, 이런 전제는 개개인이 상품을 교환하는 평등한 주체라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대전제와 맞춘 것이었다. 이리하여 인류는 비로소 모든 사람에게는 인간이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인권을 가지고 있다는 인권선언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점은 인권체계가 이처럼 시공을 초월하여 보편적인 표현을 썼다고 하더라도 근대라는 특정한 역사 시기 속에서 특정한 사회세력인 자본가계급(부르주아)의 요구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부르주아가 선언한 ‘보편적’ 인권의 실상은 능력이나 재산의 불평등을 문제 삼지 않는다는 것이지만, 실상에서는 능력과 재산에 따라 시민들이 누리는 권리는 다르게 나타났다. 그러나 일단 보편적 인권을 형식적으로나마 선언한 이상, 그 형식적 인권을 실질적 인권으로 실현하려는 투쟁은 고양될 수밖에 없었다. 이 부분은 훗날 경제ㆍ사회ㆍ문화적 권리(사회권)의 등장과 신성불가침으로 여겨지던 소유권에 대한 관념이 수정으로 나타날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훨씬 뒤의 일이며, 이런 관념이 받아들여지기까지 부르주아 계급과 국가에 의해 억압을 받던 민중들의 지난한 투쟁과정이 동반될 것이었다.

    이런 평등한 인간을 전제로 한 근대 자본주의의 형성과 더불어 확립된 인권의 발달과정을 추적하기 전에 인권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이해하도록 하자.

    중세의 자유는 특권층의 자유

    자유롭고 평등한 각각의 인간으로부터 사회나 국가의 성립을 보게 되는 것은 자유로운 상품교환의 관계가 전 사회적 규모로 인정되게 된 자본주의 사회에서였다.

    유럽의 역사에서 중세에도 자유가 있었지만, 그 자유는 도시의 자유, 귀족의 자유, 기사의 자유였다. 구체적으로 귀족, 성직자, 기사 등 봉건 지배자의 ‘특권’이었다.

    국왕은 이들을 군신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국왕은 물리적 강제권력을 독점하는 주권자가 아니라 기사이자 영주였던 봉건적 지배자 중 한 사람에 불과했고, 그들은 영주들은 국왕과 더불어 지배권을 나누어 갖고 직접 생산자인 농노들에 대한 공동의 지배를 위한 동맹관계를 맺고 있었다.

    봉건영주는 생산수단인 토지를 독점적으로 소유했고, 그들이 지배하는 토지를 장원이라고 불렀으며, 그 장원에서는 모든 경제ㆍ정치적 관계가 형성되고 운영되는 자립경제 단위이자 폐쇄적인 소우주와 같았다. 농민은 영주에 대해 인신적 예속관계에 놓인 채 그 토지의 일부를 경작하고 잉여노동을 영주에게 제공하는 것이었다. 봉건 영주에 대한 농민의 인신적 예속(부자유)은 매우 일반적이고도 광범위했다. 보호에 대한 대가로 무거운 세금을 내고,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그들의 영주를 위해 노동력을 무상으로 제공해야 했다. 그들은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룰 수 있었지만, 그들에게 거주이전의 자유는 인정되지 않았다.

    봉건 지배층은 인민과는 동떨어져서 신과 가까운 존재로 여겨졌다. 이들은 종교적인 서약으로 영주와 봉신간의 상호의무는 확인되었다. 이들은 특권을 이용하여 법을 제정하고, 이들이 배타적으로 행하는 정치는 윤리와 종교로부터 분리되지 않은 채 특권층의 자의적인 의사에 의해서 행해졌다.

    “종교는 인민에게 방향성을 제시했고, 그들을 탄생부터 죽음까지 에스코트했다.” 종교는 인민들의 복종과 이승에서의 가난에 대한 보상으로 신의 왕국에서의 보편적인 행복을 보증함으로서 봉건제도를 유지, 보호하는 그 사회의 중요한 한 축을 형성했다. 주교와 수도원장은 토지소유자였으며, 봉건 지배층을 형성했다.

    봉건사회의 위기와 근대적 인간의 등장

    중세 유럽의 강고했던 봉건사회는 14세기에서부터 수세기 동안에 걸쳐 해체의 과정을 밟기 시작한다. 이때 유럽에는 이탈리아로부터 시작된 페스트가 수세기 동안 강타하여 급격한 인구의 감소를 낳았다. 그리고 백년전쟁(1337-1453)을 비롯한 전쟁의 재난이 전 유럽을 휩쓸었다. 봉건적 질서의 해체 과정에서 농민들은 급진적인 요구를 내걸고 수세기 동안 반란을 일으켰고, 봉건 지배층은 이를 잔인하게 학살하고는 했다. 도시와 상업이 발전하여 이제 더 이상 현물지대로는 수입이 보장되지 않게 되는 상황을 낳아 화폐경제를 발전시키게 된다.

    이런 상황들 속에서 장원경제, 현물경제를 중심으로 유지되던 봉건사회는 위기를 맞게 되고, 그 위기를 해결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본주의 상품경제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와 함께 봉건적 신분질서는 급속히 해체되거나 지역에 따라서는 봉건지배층이 반동이 일어나게 된다. 어쨌거나 17세기 이후에는 봉건질서가 더 이상 대세일 수 없었으며, 자본주의는 거역할 수 없는 역사적인 흐름이 되었다.

    자본주의는 이와 같이 봉건사회의 태내에서 탄생을 준비하게 되는데, 우리가 관심을 갖는 인권의 전제가 되는 자유로운 근대적 인간도 이때 태어나게 된다. 근대적인 자유로운 인간은 어떻게 태어나는가를 이제 우리는 살펴보자.

    자본주의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자본을 축적하여 노동자를 고용하고, 상품을 생산할 수 있는 자본가가 필요했으며, 한편으로는 토지와 신분으로부터 풀려나 오로지 자본가에 고용되어 자신의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노동자가 나타나야 했다.

    자본가는 원격지 무역을 통해 화폐를 축적한 상인들, 농노들을 가혹하게 수탈하고 이제는 현물지대가 아닌 화폐로 지대를 받아 부를 축적한 영주와 농민층에서 농토를 매입하고 대규모의 경작지를 보유하여 농업노동자들을 고용했던 부농층 등에서 나타났다. 국왕은 장원에서 농노들이 탈출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영주들이 중앙권력의 개입을 요청하는 것을 계기로 왕권을 강화하고 농민들의 반봉건 투쟁을 억압하는 동시에 영주권도 제약함으로서 그 권력을 확대하게 된다.

    농민들은 페스트가 유럽을 휩쓸고 지난 뒤에 일시적으로 농촌 노동력이 부족할 때에는 영주를 상대로 권리를 요구하여 농촌 공동체에서 어느 정도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된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 영주들은 곧 법령을 만들어 이전에 인정했던 권리들을 강제로 빼앗게 되며, 특히나 전통적인 곡물 생산 대신 양모를 생산, 수출하는 것이 훨씬 많은 이득을 보장하는 길이 되자 영주들은 강제로 농민들을 쫒아내게 된다. 영국에서 일어난 인클로저의 절정은 마르크스가 설파한대로 “사유지에서의 인간 청소”였다. 프랑스는 이와는 달리 소규모 농민들이 인구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상황을 낳았지만, 어쨌거나 강제로 토지에서 쫓겨난 농민들은 도시로 진입하여 빈민층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이들은 무일푼의 거지처럼 도시로 몰려왔으나, 당장 이들을 고용할 일자리는 마련되지 않았고, 이에 따라 이들은 떠돌면서 절도와 구걸행위를 일삼았다. 이들은 신분상으로도 자유를 획득하여 이제 자유롭게 계약에 의해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팔 수 있는 노동자로 전화될 준비를 갖추기에 충분한 상황이 되었다. 형식적인 자유와 평등을 얻었지만 생존권의 위협에 항상적으로 시달렸던 이들은 이후 봉건 지배세력에 의해 위험집단으로 분류되었고, 이런 노동빈민들을 가혹하게 강제 수용하는 근대적 의미의 사회복지시설과 감옥이 출현하게 된다. 이처럼 자유로운 인격의 근대적 인간은 봉건사회로부터 몸뚱이 하나만 보장받은 비참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제 봉건사회질서가 밑으로부터 급속하게 해체되지만 여전히 구체제인 봉건질서를 유지하려는 세력과 자본주의적 질서를 형성하려는 세력 간의 투쟁은 18세기 후반으로 치달아가게 되는 것이다.

    시민혁명과정을 분석하면서 인권선언들이 탄생하고, 그리하여 보편적인 인권체계가 도입되는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다음호의 차례다.


    '능동적 시민'에게 제한된 자유의 등장
    인권의 역사 2 | 시민혁명과 인권의 탄생(1)


    월간『사람』제2호 | 2005년 8월
    15세기에서 16세기에 걸치는 기간은 자본의 축적이라는 특유의 경제발전을 통해 성장하지만 동시에 봉건적 특권계급의 압박과 착취에 시달려온 시민계급이 본격적으로 ‘자유’와 ‘법 앞의 평등’을 주장하기 시작한 시기이다. 16세기 네덜란드를 시작으로 시민혁명의 시대가 시작되어 17세기 영국혁명(청교도혁명과 명예혁명), 1776년의 미국혁명으로 이어졌고, 프랑스 혁명으로 폭발했다. 시민혁명의 과정에는 농민과 노동자층의 급진세력이 있었고, 왕당파와 대부르주아지의 반동이 있었다. 이들 세력들이 힘의 관계에 의해 시민혁명의 내용과 방식은 현저하게 달라졌고, 그 과정에서 탄생하는 인권의 내용과 목록도 다르게 나타났다. 이번 호에서는 시민혁명의 과정에서 논의되고, 탄생한 인권의 내용을 정리한다. 시민혁명의 과정을 정리하기보다는 그 혁명을 통해 등장하는 인권의 내용을 살펴보는 것이다.

    '영업의 자유'를 둘러싼 영국시민혁명

    이미 13세기에 마그나 카르타를 탄생시켰던 영국에서 17세기는 봉건제적 생산양식이 자본제적 생산양식으로 이행하던 시기였다. 권리청원(1628), 인신보호법(1679), 권리장전(1689), 왕위계승법(1701)은 절대왕조가 무너지고 근대의회정치가 확립되어 가는 과정의 결과물들이다. 이때의 대립은 초기독점을 둘러싼 왕권과 신흥 자본가 계급의 대립이었는데, 다시 말해 이것은 왕권과 의회권력의 대립이었다.

    영국의 초기독점은 16-7세기에 이르러서 국가적·전국적·국민적 규모에서 일어났고, 원격지 외국무역, 광산물 거래분야, 제조업 분야 등 전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초기독점을 통해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세력은 특권 상인 혹은 국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들이었다. 신흥 부르주아 계급의 반독점운동으로 1624년 독점법이 제정되고, 명예혁명을 거쳐서 초기독점은 최종적으로 해체되었다. 즉, 영업의 자유=경제적 자유가 성립된 것이다. 이 반독점운동은 초기독점을 지탱하는 권력적 기초인 절대군주제에 대한 권력투쟁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므로 영국혁명은 초기독점을 신민의 자유, 특히 영업의 자유에 반한다며 그것을 폐지함과 동시에 그 기초인 절대군주제를 타도하고 자유경쟁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영업의 자유에는 거주이전의 자유, 직업선택의 자유가 포함되었다. 그렇지만 영업의 자유는 인권으로서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정책원리, 자본의 운동논리로서 재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재산에 따른 참정권의 제한

    시민혁명을 거쳐서 영국에서는 봉건적 토지 보유와 자의적인 세금은 폐지되었다. 의회권력을 봉건지배층과 타협에 의해 장악한 유산계급에게 시민혁명의 두번째 국면은 보다 급진적인 관심사인 재산권을 주제로 한 것이었다.

    로크는 1689년에 주장하기를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인격을 재산으로 갖는다. 자기 자신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이것에 대한 권리를 갖지 않는다. 자신의 신체의 노동과 자신의 손의 노동은 마땅히 그 사람의 것이라 말할 수 있다.”고 말했다. 로크는 생명과 재산에 대한 권리는 국가가 도덕적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보장해야 할 양도불가능한 자연권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로크의 주장은 권력분립론을 주창한 몽테스키외와 더불어 미국혁명에서 재산권을 자연권으로 인정하는 선언서들에 등장함으로서 구체화되었다. 재산권의 인정은 곧바로 참정권으로 논의가 이어졌다.

    조지 메이슨은 버지니아권리선언의 제1조로 재산권을 두었다. 로크의 정신에서 버지니아 권리선언은 국가가 개인의 권리를 보장할 그 수임사항을 지키지 않는다면 “새로운 정부를 구성할” 권리를 인민에게 부여하였다. 미국 헌법제정의회는 처음에는 보편적인 남성 참정권을 요구하였으나, 곧 사무엘 아담스의 초고에 따라 참정권을 연 3파운드 가치의 순자산을 소유했거나 60파운드 가치의 개인적인 순자산과 개인자산을 소유한 백인에게 투표를 허용하는 것으로 참정권을 제한했다. 비록 제임스 메디슨이 “투표권을 재산을 가진 사람들에게 배타적으로 허락한다면 사람들의 권리가 억압될 수 있다. … 투표권을 모든 사람에게 확대한다면 재산권 또는 정의의 요구가 재산 없는 다수자에 의해 압도당할 수 있다.”는 딜레마를 피력하기도 했지만, 결과는 유권자가 성인 남성 인구의 절반에 훨씬 못 미치는 것으로 결과지어졌다. 정치적 자유와 공직 보유는 질적 염려에서 자유롭거나 관련된 재산을 가진 독립적인 백인 남성에 의해서 가장 잘 수행될 수 있다는 인식에 기초한 참정권의 제한은 재산을 가진 지배 엘리트의 정치적 패권에 부합되는 것이었다.

    미국혁명의 성공은 점차로 구체제의 정치적 타락과 경제적 남용에 대해 염증을 느끼고 있던 프랑스의 제3계급의 구성원들에게 전해졌다. 미국혁명은 입헌정치, 연방주의, 제한된 정부, 재산과 시민권 등 유럽 철학자들의 사상을 실천에 옮긴 것으로 미국의 독립투쟁은 프랑스의 인권 열망을 손에 잡히는 가능성으로 바꾸게 하였다.

    참정권은 능동적 시민에게 주어진 특권

    봉건 구질서의 상징인 바스티유의 함락(1789년 7월 14일)으로 본격화된 프랑스혁명의 1차적 결과물인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제7조는 “법적으로 설립된 공적 필요가 그것을 요구하고, 정당한 사전 보상의 조건에 기반하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재산권을 박탈당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 정치적 자유에 대해서는 “주권은 본질적으로 국민에게 있다… 법은 일반의지의 표현이다. 모든 시민은 개인적으로나 또는 그들의 대표를 통해 기여할 권리를 갖는다.… 모든 시민은 평등하며, 자신들의 능력에 따라 자질이나 재능의 구분이 아닌 다른 어떤 차별도 없이 모든 공직, 지위, 고용에 동등하게 접근할 수 있다.”(3조와 6조)라고 선언한다. 여기에서는 재산권을 자연적 권리로 인정하면서도 재산 정도에 따른 참정권의 제한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프랑스 인권선언이 있은 지 3개월만에 투표권과 공직보유권은 수동시민들(가내 하인, 여성, 3일 노동에 해당하는 세금을 내지 않은 모든 사람들을 포함하는 대다수 민중들)에게는 부인된다. 근대 자본주의 국가의 대의제 민주주의론을 기초한 시이에스영어는 “나라의 모든 거주자들은 수동시민의 권리를 누려야 한다…하지만 공공의 창설에 기여하는 사람들만이 위대한 사회 경영에서 진정한 몫의 소유자이다. 그들만이 진정한 능동시민이며, 결사의 진정한 구성원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로비에스피에르와 같은 혁명가들은 재산권이 타인의 권리, 특히 더 가난한 시민들(도시의 대중 계급)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도록 하기위해 허용되어서는 안 되며, 소득에 대한 누진세의 도입과 재산권이 정당하게 사용되느냐 여부를 구분할 것, 오직 정당한 행사만 국가가 보호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입장은 시이에스와 같은 혁명가들에 의해 패배하였고, 1793년 헌법에서 누락되어 참정권에 대한 재산자격은 유지되었다.

    이로서 18세기에 재산이 권리로 인정되고, 투표가 일부 남성의 특권으로서 획득되었다. 이와 같은 재산권의 인정과 재산에 따른 참정권의 제한은 뒤에 19세기 노동운동의 부상으로 강화되는 경제적 권리와 사회적 권리의 대립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갈등을 첨예하게 만든 요인으로 작동할 것이었다.

    인신보호법의 제정으로 확립된 인신의 자유

    근대 인권 중 가장 기본적인 인권에 속하는 것이 인신의 자유다. 인신보호영장은 피구금자를 재판소에 출두시킬 것을 명령하는 영장(헤이비어스 코퍼스, habeas corpus)을 의미하였다. 영국에서 시민혁명 전에는 인신보호영장이 맹아 형태로 나타났다가 17세기 국왕과 의회의 대립항쟁의 과정을 거쳐 국왕의 전횡적인 체포·구금을 부정하는 근대의 헤이비어스 코퍼스로 성장하게 되었다.

    찰스 1세 시기인 1628년 의회의 권리청원에 의해 왕의 불법적인 인신구속은 금지되었고, 1640년에는 왕의 압제의 대행기관이었던 성좌재판소를 비롯한 기타의 특별재판소를 폐지하는 법률이 제정되어 왕과 추밀원의 자의적인 명령에 의한 구금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왕정복고기(1660-1688)의 찰스 2세가 인신보호영장제도의 법적 결함을 이용하여 자의적인 체포·구금을 정적 박해의 수단으로 이용하자 이와 같은 폐단을 막기 위해 인신보호영장을 실효성 있는 제도로서 만들기 위한 의회의 노력으로 1679년 마침내 ‘인신보호법’이 제정되기에 이르렀다.

    제임스 2세는 이 법이 왕의 권위에 치명적이라고 하여 고액의 보석금을 지불하도록 하여 이 법의 실효성을 잃게 했다. 여기에 맞서 의회는 1689년의 권리장전에 ‘과도한 보석금을 과할 수 없다’는 규정을 삽입하게 된다.

    이런 노력으로 보통법상 정당한 절차에 의하지 않고는 누구도 구금할 수 없다는 원칙이 확립되었다. 그러나 이런 인신의 자유는 대상인이나 의원이 구금되는 대사건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완벽한 제도로 정착한 것은 아니었다. 그때의 형벌은 가혹했으며, 보통의 사람들에게 자의적인 구금은 여전했다. 영국의 상층계급을 제외하면 그 자유를 실질적으로 향유하는 이익은 거의 없었다.

    개인의 권리로 정착된 종교의 자유

    유럽에서 종교전쟁은 1648년 비준된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일단락되었다. 이 조약은 자기 영주의 종교에 반대하는 신민에게 이주의 권리를 부여하고, 어느 국가도 다른 나라의 신민에게 자신의 종교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유럽에서는 종교 면에서 다양하게 분화되었다. 독일은 가톨릭과 신교간의 균형이 이루어졌고, 영국에서는 영국식 색깔을 입힌 국교회가 등장했으며, 네덜란드에서는 칼뱅이즘이,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카톨릭 로마 교황권에 대한 충성이 유지되었다.

    그렇지만 종교의 자유에 대한 이런 정도를 넘어서 개인이 종교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로크는 [관용에 대하여(1690)]에서 “정치사회는 그 어떤 다른 목적이 아닌 오직 모든 인간의 소유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각 사람의 영혼에 대한 관심과 천국의 일에 대한 관심은 국가에 속하지도 않고 국가에 종속될 수도 없는 것으로 인간의 자아에 전적으로 남겨져 있다.” 로크의 이런 언명은 종교적 자유와 의견의 자유를 위한 투쟁에 새 장을 열었다. 국가는 사회적 이익의 확보를 위해 외면적 힘(형벌 부과)을 행사하는 데 있는 반면, 종교는 진정한 구제를 위한 내면적 확신을 가져다주는 것(영혼구제)이었다.

    당시 로마교회의 금서목록에는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저서도 포함되었다. 영국의회는 1643년에 (도서)허가제를 회복했다. 이에 대해 존 밀톤은 “모든 자유들보다 나에게 알 자유, 발언할 자유, 자유롭게 논쟁할 자유를 달라. 진리가 자유롭다면, 그것은 모든 가능한 실수를 극복하고 승리할 것이다.”고 항의했다. 영국에서 1695년 사전검열제가 폐기되었고, 이런 승리는 의견과 언론의 자유투쟁의 초석이 되었으며, 미국혁명과 프랑스의 혁명을 통해 반복적으로 제기되었다.

    그렇지만 이때의 자유는 의회에서의 자유이지 개인의 자유가 아니었다. 개인의 정치비판은 ‘자유로운 언론기관’인 의회에 의해 탄압되기 일쑤였다. 출판검열제는 폐지되었지만, 무대 검열제는 유지되었고, 밀톤의 검열제 폐지론도 대체로 위대한 지식인의 자유의 옹호였으며, 일반 시민의 권력 비판의 자유, 다수자가 증오하는 이단적 사상의 표현의 자유의 승인은 아니었다.

    미국에서 종교의 자유의 확산은 영국 국교도와 청교도간의 분열로 나타났고, 이는 영국과 식민지 아메리카의 정치적 긴장을 고조시킨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미국 독립 혁명기간 동안 신앙부흥운동이 벌어져서 감리교, 침례교, 장로교회 같은 분파들이 등장했다. 다양한 교회들의 확산은 증대하는 언론의 영향과 결합하고, 혁명적 정신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렇지만, 1735년에 독일인 이주자인 출판인 존 페터 젠거가 뉴욕의 주지사를 공격했다는 이유로 기소되었고, 1765년 영국의 인지법은 신문에 혹독한 세금을 부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 왕실에 대한 공격에서 [상식]의 저자 토마스 페인의 선동적 저널리즘을 능가하는 것은 없었다. 1776년에 페인은 “영국과 미국간의 최후의 탯줄”은 이미 끊겼다고 선언하면서 미국 동료들에게 영국에 대항할 것을 선동했다. 1786년 버지니아의 종교자유법에는 토마스 제퍼슨의 “종교는 전적으로 인간과 그의 신 사이의 문제이다. 따라서 교회와 국가간에 분리의 장벽을 세우는 것이 필수적이다”는 입장이 반영, 천명되었다. 교회와 국가의 분리는 수정헌법(1791)의 1조에 자리잡았다.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의 등장

    독립 미국에서는 언론을 통제할 필요성이 프랑스와의 전쟁을 계기로 제기되었다. 1789년 선동법은 국가안보의 용어를 정의하면서 “미국 정부, 또는 의회, 또는 대통령에 반하여, 이들을 불명예롭게 하고 모욕할 의도를 가지고, 잘못된 중상적이고 고의적인 집필을 출판하는 것”을 범죄로 규정하였다. 전쟁이 종식되면서 이 법은 폐지되었지만, 전쟁 시기나 비상 시기에는 이와 같은 법률이 현대에까지 종종 부활하고는 했다. 프랑스에서도 검열제도인 치안방해적인 저작의 유포를 금지하는 법률을 시행하고는 했다.

    근대국가는 인민의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종교적 가치를 권력의 힘으로서 실현할 것을 포기하였다. 종교는 이제 국가적 사항이 아니라 사사로운 일이었다. 국가는 인민의 종교의 자유를 인정함으로서 스스로를 종교로부터 해방시킨 것이다. 그러나 종교의 자유가 인정됨으로서 인간이 종교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아니며, 종교는 시민사회의 사항이 되고 이기심과 자유경쟁이라는 시민사회의 정신에 따라 종교는 누구의 규제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 영역을 넓혀 갔다.

    정신적 자유의 요구는 종교적 지배의 중요한 일환으로 갖는 정치체제 그 자체의 변혁에 이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절대왕제에 반대하는 투쟁이 수행되는 과정에서 언론의 자유에 의거하는 새로운 정치행동의 방식이 생겨났으며, 여기서 사상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등이 파생하게 된다.

    그럼 이렇게 등장한 인권은 누구를 위한 인권이었나를 생각해 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프랑스혁명의 과정을 살펴보는 과정을 거칠 필요성이 있다. 다음호에는 프랑스 혁명을 보면서 구체적으로 근대자본주의에서 등장한 인권의 속성을 정리하려 한다.


    '형식적 평등'으로 귀결된 프랑스 혁명
    인권의 역사 3 | 시민혁명과 인권의 탄생(2)


    월간『사람』제3호 | 2005년 9월


    왜 프랑스 혁명인가?

    보통 사람들에게 프랑스 혁명은 1789년의 삼부회와 바스티유 감옥의 함락으로 기억되고 있다.
    물론 이 혁명의 과정에서 탄생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들의 선언’ 정도도 기억하고 있다.

    그렇지만, 1789년의 혁명은 프랑스 대혁명의 시작일 뿐이었다. 프랑스 혁명은 1789년부터 1799년 나폴레옹의 쿠데타가 있기까지 10년간 지속되었다. 예전의 역사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격변의 10년이 일상의 역사 100년 동안에도 보지 못할 발자취를 역사에 뚜렷이 남겨 놓았다.

    지난 호에서 시민혁명과정에서 탄생한 인권의 내용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았음에도 다시 프랑스혁명을 보자 하는 것은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이 지적했듯이 “동시대의 모든 혁명들 가운데 프랑스 혁명만이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그 혁명의 사상이 보편적인 것은 영국과 미국의 혁명이 주로 자국민을 향한 선언의 형식을 띠었던 반면에, 프랑스혁명은 인류 보편의 가치로 인권을 선언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서구 유럽의 국가들이 혁명 프랑스를 타도하기 위해 대불연합전선을 결성하고 전쟁까지 감수했지만, 혁명적 열정에 들뜬 징병제의 프랑스 군대를 이기지 못했다.

    결국 프랑스혁명은 유럽을 건너 남미와 인도에까지 크게 영향을 미쳐 산업혁명과 함께 근대자본주의 국가 형성을 촉진하였다.

    혁명 전야의 프랑스는 “유럽의 오랜 귀족적 절대군주국들 가운데 가장 강력하고 여러 측면에서 가장 전형적인 국가였다.” 이 말은 “구체제(앙시앙 레짐, ancien regime)의 통치기구 및 기득권 세력과 신흥세력 사이의 충돌이 다른 곳보다 가장 첨예한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지면 관계상 그 격렬한 프랑스 혁명의 과정을 추적할 수는 없다. 다만 혁명의 국면이 바뀔 때마다 등장했던 헌법 전문으로서의 인권선언을 살펴보면서 혁명의 변화과정 속에서 인권구상이 어떻게 반영되는지를 살피는 것에 만족하자.

    1789년의 '인권선언'

    보통 프랑스 인권선언(Declaration des droits de I’homme et du citoyen)하면 떠올리는 ‘구체제에 대한 사망증서’이자 ‘새 시대의 사도신경’으로 간주되는 선언이 바로 이 ‘인간과 시민의 권리들의 선언’(이하 인권선언)이다.

    이 역사적인 문서가 채택되기까지 계몽주의의 강령으로 감화 받고, 미국혁명에 영향을 받은 혁명가들은 혁명 발발 이전부터 인권적 구상을 초안의 형태로 제출하기 시작했다. 특히 국민의회가 헌법제정 작업에 착수한 6월 20일(제3신분의 대표들은 정구장에서 모여 “헌법이 제정되어 확고한 토대 위에 자리를 잡을 때까지 결코 해산하지 않는다.”는 선서를 하게 된다)부터 인권선언이 의회에서 채택되는 8월 26일까지 두 달 남짓한 동안에 각계각층은 자신들의 입장을 담은 인권선언 초안을 대대적으로 제출하게 된다. 이런 초안들은 이후에 만들어지는 인권선언과 헌법의 ‘저수지’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결국은 정치권력을 장악한 그 세력의 입맛에 맞는 내용들이 선택되는 것이었지만.

    1789년의 인권선언은 부르주아 혁명, 입헌군주제라는 역사적 상황을 반영했다. 제헌의회는 1789년 8월 20일에서 26일까지 전문과 17개 조항을 채택하였다. 선언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를 나누었다. 그래서 “자유롭게 그리고 권리에서 평등하게 태어난(제1조)” 인간은 “자유, 소유권, 안전, 그리고 압제에 대한 저항”을 내용으로 하는 “인간의 자연적이고 소멸할 수 없는 권리들(제2조)”을 소유한다고 인정되었다. 우리는 지난 호에서 ‘능동적 시민’과 ‘수동적 시민’을 구분한 시이에스의 주장을 읽었다. 이 선언에서 말하는 시민은 ‘능동적 시민’이었다. 즉 시민은 투표권과 공무담임권을 가졌으며(제14조, 제6조), 이런 시민은 법을 준수해야 할 의무(제7조)와 함께 국가의 재정에 기여할 수 있는(제13조) 능력을 갖고 있어야 했다. 제11조에서는 “사상과 의견의 자유로운 소통은 인간의 가장 고귀한 권리”로 규정되지만, “모든 시민은 자유롭게 말하고 쓰고 출판할 수 있다.”고 하여 진정한 권리의 향유 주체는 시민으로 제한되었다.

    이 선언에서는 국민주권의 원리와 소유권을 중심으로 한 자유권을 주로 제시하고 있는데, 이 선언에서 특별한 의미로 읽어야 할 곳은 소유권과 관련된 부분이다. 제17조는 소유권을 자연권의 하나로서 국가가 결코 침해할 수 없다고 규정하며, 조세는 자연권을 보장하는 국가의 유지를 위해 필요하다는 근대 자유권 중심의 인권체계의 기본을 잘 보여준다. 이에 따르면 사회란 개인들의 총합이며, 그것을 능가하는 공유재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주의적 사회관이 철저하게 반영된 이 선언에서는 그러기에 사회문제와 관련한 어떤 조항도 포함할 수 없었다. 비참한 상황에서 생존권의 위협을 받던 민중들의 절박한 현실에는 애써서 침묵한 선언이 아닐 수 없다.

    2년 후인 1791년 9월 3일에 최초의 혁명 헌법이 제정되었다. 제헌의회는 헌법을 제정하면서 애초의 계획을 변경하여 “종교적 신앙의 상징”인 인권선언을 손대지 않기로 한다. 그러면서도 인권선언을 전문으로 싣고도 다시 헌법의 앞자리에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 조항들’이란 별도의 자리를 만들어 인권선언의 17개 조를 거의 그대로 되풀이한 뒤에 공공구제(“기아들을 키우고, 가난한 장애인들을 도와주고,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가난한 정상인들에게 그것을 제공하기 위하여 ‘공공구제’의 종합기관을 창설하고 조직한다.”)와 무상의 공공교육과 같은 새로운 권리들을 추가했다. 민중의 진출에 의한 혁명의 진전 상황이 반영된 것이었다.

    1793년과 1795년의 헌법 전문으로 탄생한 인권선언들

    1793년에는 두 개의 헌법이 있었다. 지롱드파는 자신들의 헌법(1793년 5월 29일)을 만들었고, 그 전문으로 인권선언(인간의 권리들의 선언)을 만들었다. 그렇지만 곧바로 산악파에 의해 밀려나면서 이 선언은 폐기되었다. 대신 산악파가 주도하여 제정한 헌법의 전문이 공식 문서가 되었다(1793년 6월 24일, 인간과 시민의 권리들의 선언).

    이들 두 선언은 드물게 온건파와 급진파의 입장을 비교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두 선언은 모두 1789년의 선언의 17개 조항의 대부분을 보다 강력하게 천명하고, 권력의 분립에는 침묵하여 사실상 입법부의 주권성을 승인하며, 소급적용의 배제, 예속신분의 원천 봉쇄, 공공부조권, 교육권, 사회적 보장, 헌법개정권, 봉기권 등을 기본적으로 공유하고 있다. 지롱드파마저도 혁명이 이룩했던 급진적 성과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롱드파의 선언은 자유의 보장과 법적 보장에 주된 관심을 표명하고 있으며, 전문을 없앴으며, 자연권의 이념을 포기하고 “사회 속의 인간의 권리들”만을 언급하였다.

    산악파는 전문을 되살리고 제1조에서 “사회의 목적이 공동의 행복에 있고” 정부 설립의 목적이 “소멸할 수 없는” 자연권의 “향유를 보장하는”데 있음을 명확히 하였다. 아울러 평등의 이념을 보다 분명하게 부각시켰고, 국민의 청원권을 신설하고 인민주권론을 제시하지만, 제26조에서 “의회를 이룬 주권자의 각 부문은 자신의 의지를 완전히 자유롭게 표명할 권리를 향유해야 한다.”고 하여 민중의 압력에 대한 견제의사도 보여주고 있다.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 생쥐스트(Saint-Just) 등의 산악파 혁명가들에 의한 공포정치, 공안정치는 1795년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끝나게 된다.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등장한 총재정부는 혁명을 안정화시키는데 주력하게 되며, 이런 상황들을 반영하여 탄생한 8월 22일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들과 의무의 선언’은 이전의 선언과 비교하여 확실하게 퇴조한 모습을 보여준다.

    전문은 한 문장만을 택하고 자연권에 대해 침묵하고 “사회 속의 인간의 권리들”만을 언급할 뿐만 아니라 저항권, 국민주권, 무죄추정원칙, 표현의 자유, 언론 및 출판의 자유, 공공부조권, 교육권, 사회적 보장, 헌법개정권, 청원권, 봉기권 등 혁명의 주요 쟁취물들을 삭제한 대신에 가혹행위의 제한이나 형벌가중의 금지에 관한 조항을 신설하였다.

    혁명기의 선언으로는 처음으로 의무에 관한 조항을 도입하여 소유권의 유지가 “토지의 경작, 모든 생산물, 모든 노동수단, 그리고 전 사회질서”의 토대임을 ‘권리들’에 관한 부분에 이어 재차 천명하고 법의 준수, 가족의 가치, 선행과 성실의 도덕률, 조국에 대한 봉사 등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5개의 ‘인권선언’ 문서들은 혁명의 상승과 반전을 반영하고 있다. 혁명이 하강기에 나타난 1795년 선언에서 자연권에 대해 침묵한 것은 이전의 자연권의 환기가 급진적인 경향성을 지녔음을 의미한다. 각각의 선언들이 그 내용에서 차이가 있으나, 헌법의 기본원리를 선언으로 제시할 필요성을 인정했다는 점과 프랑스혁명 전 과정에서 어떠한 정치체제건 국가가 보호해야 할 기본권을 총체적으로 제시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나폴레옹의 쿠데타에 의해 혁명이 중단되고, 역사적 반동이 일어나지만, 프랑스 혁명은 혁명의 전 과정에서 인권의 혁명을 이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평등을 향한 몸부림

    프랑스 혁명이 이룬 인권의 체계는 앞에서 보았듯이 소유권을 중심으로 한 자유권적인 인권체계였다. 인권선언에서 “자유는 평등과 결합되어 있었지만, 그것은 특권계급의 타도와 귀족 특권의 폐지를 정당화하는 것이었을 뿐”이었다. 산악파 및 상퀼로트의 평등주의, ‘바뵈프의 음모’는 권리의 평등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상퀼로트(sans culotte)의 이론적 지도자인 바를레(J. F. Varlet)는 1793년 6월 7일 국민공회에서 ‘사회상태에서 인간권리에 대한 엄숙한 선언(엄숙선언)’을 낭독했다. ‘엄숙선언’은 재산권에 대한 제약과 실질적 평등의 추구라는 점에서 이전의 인권선언과는 차이가 있었다. 재산권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재산상의 불평등을 정당한 수단에 의해 타파(제17조)”하는 것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고, 절도, 투기, 독점, 매점 등으로 축적되는 재산은 국유화(제20조)한다고 규정하였다. 여기서 재산권은 생존권, 노동권, 휴식으로 규정되어 있다.

    엄숙선언은 제한선거에 의해 선출되는 국민대표가 의회를 장악하는 국민주권론 대신에 “인민 자신 이외의 억제력은 모두 잘못이다. 주권자는 끊임없이 사회를 통제해야 한다. 주권자는 결코 대표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말로 요약되는 인민주권론을 주창하고 있다. 그리고 교육의 권리를 강조하고, 저항권으로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인류애와 평화주의 사상을 드러내 보였다. 이런 바를레의 인권구상은 개혁을 일정하게 추동해 냈지만, 혁명의 약화와 반동으로 소멸하게 된다.

    바를레의 구상에 이은 민중적인 인권구상은 테르미도르 반동 이후 총재 정부시기의 1796년 ‘바뵈프(Babeuf)의 원칙’과 ‘평등주의자들의 선언’(이 둘을 합쳐 바뵈프의 음모라고 부른다)으로 이어진다. 바뵈프는 1795년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성립된 권력을 전면적으로 부인하고, ‘1793년 헌법’의 회복을 주장했다. 바뵈프의 인권구상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도 역시 재산권과 관련한 부분이다. “자연 또는 노동의 산물을 자기 것으로 배타적으로 전유하는 자는 누구나 범죄자이다(6조).”, “가난한 자를 위해 자신의 잉여를 포기하지 않는 부자는 인민의 적이다(8조).”에서 보이듯이 그는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의 폐지와 공산주의적 민주주의의 수립을 제시했다.”

    이런 바뵈프의 구상은 이미 퇴조기에 접어든 총재정부에서는 용납될 수 없었다. 그를 비롯한 그룹의 지도자들은 1796년 5월 11일 체포되었고, 그는 다른 지도자와 함께 다음해에 처형되었다. 바뵈프의 무장봉기를 비롯한 혁명전략 노선은 훗날 레닌에까지 이르는 혁명전통을 수립할 것이었다.

    누구를 위한 인권인가?

    프랑스 혁명은 다른 나라의 시민혁명처럼 인신의 자유, 종교와 의견의 자유, 재산권 등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에서 봉건체제를 타파하고, 인류해방의 전망을 만들어냈다. 그렇지만 이 혁명은 미완의 혁명이었다.

    지금의 국제인권장전들처럼 인권선언의 모든 조문들은 ‘모든 사람’을 인권 향유의 주체로 규정하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모든 사람’은 권리의 주체가 될 수 없었다. 인권의 체계로부터 배제된 이들로 여성을 우선 떠올릴 수 있다. 여성은 여전히 남성의 권위에 종속되었다. 재산 없는 남성도 여성과 마찬가지로 2등 시민, 수동시민으로 취급되었다. 프랑스 혁명은 우여곡절 끝에 식민지에서의 노예제를 1794년 칙령으로 폐지하지만, 나폴레옹 1세에 의해 이 칙령은 무효화되어 노예제가 부활되었다. 1804년 아이티 공화국(Republic of Haiti)이 독립하고, 1848년에 이르러서야 전 프랑스령 식민지에서 노예제는 폐지되었다.

    이런 모든 결과를 종합할 때 프랑스 혁명을 비롯한 시민혁명을 통해 쟁취한 평등은 형식적 평등이었다. 시민혁명이 폐기한 불평등은 중세봉건사회에서 신분에 의한 차별이었다. 여기서 평등은 신분과 관계없이 능력에 따라 대우받는 것이며 자유란 능력 있는 자가 그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취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형식적으로 법 앞에 평등하고, 국민주권자로서 평등하지만, 실질에서는 재산상의 차이를 중심으로 사적차별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 국가가 방임해도 부르주아의 평등의 원리에는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다. 이런 사적차별=불평등을 시정하기 위한 노력은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 좌절되었다. 따라서 민중들의 실질적인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은 시민혁명 후의 중요한 과제로 남게 된다.

    물론 시민혁명을 통한 정치적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인신의 자유 등의 획득이 당장 인간 해방을 갖다 준 것은 아니지만, 민중의 해방을 위한 유리한 조건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현실의 불평등한 조건 위에 놓인 민중들은 이후 자신의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고 실질적인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혁명과정에서 부르주아지에게 외면당한 생존권을 비롯한 사회경제적 권리의 쟁취를 중요한 과제로 삼게 된다.

    다음호에서는 시민혁명과 더불어 근대자본주의 형성의 2중 혁명으로 일컬어지는 산업혁명의 과정을 살피면서 사회권을 요구하는 민중들의 투쟁을 살펴본다. 근대자본주의의 ‘그림자’는 19세기 민중들을 짙게 짓누르고 있었다.


    바리케이드 위에나부낀 평등의 깃발
    인권의 역사 4 | 산업혁명과 사회권의 발전
     

    월간『사람』제4호 | 2005년 10월


    근대시민혁명은 자유권을 중심으로 하는 인권보장의 체제를 낳았다. 그 자유권 보장의 인권체제에서는 1789년 프랑스 인권선언 제4조가 규정한 대로 “자유는 타인에게 해롭지 않은 모든 것을 행할 수” 있었고, 1795년 인권선언 제15조가 규정한 것처럼 신체를 제외한 “노동과 시간을 계약”에 의해 팔 수 있는 사적자치가 보장되었다. 여기에서 국가는 사적자치에 의해 이루어지는 계약에 간여하지 않는 최소한의 개입만 하는 ‘자유방임’을 유지했다.

    노동자의 육체적 파멸을 담보로

    영국으로부터 시작된 산업혁명은 19세기 중반에는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농업과 소규모 가내수공업 중심의 산업구조는 대규모 공장 중심으로 바뀌어갔다. 증기기관의 기계 도입 등 과학기술의 발전과 철도의 부설 등은 인간세계의 거리와 시간을 단축했고, 생산력을 급격하게 높였다.

    이전의 세기에서는 볼 수 없던 이런 경제적인 변화는 획기적인 부의 증대를 가져왔지만, 농촌에서 맨몸으로 쫓겨난 농민들은 도시로 찾아들어가 광범한 빈민층을 형성하였고, 이들은 공장에서 살인적인 노동에 내몰려야 했다. 공장법이나 노동기본법 등이 제정되기 이전의 “철저한 ‘저임금·장시간 노동’과 임노동자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육체적 파멸 및 정부에 의한 방임”을 특징으로 하는 이 시기의 ‘원생적(原生的) 노동관계’를 통해 자본가는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산업혁명기의 노동자와 민중들의 비참한 생활상은 몇 가지 사례만으로도 충분히 추측해 볼 수 있다. 비참했던 당시의 노동자들의 생활상을 프랑스의 사례로 살펴보자.

    먼저 당시 노동자들의 저임금·장시간 노동 실태다. 19세기 중엽의 프랑스에서 평균 노동시간은 하루 15시간(휴식 1시간 정도 포함)이었다고 한다. 노동시간은 길어졌지만 임금은 매우 낮아서 노동자의 평균 임금은 일당이 남자 2프랑, 여자 1프랑 정도였고, 아동들의 임금은 여성 노동자의 절반 정도를 웃도는 수준이었다. 반면에 한 조사에 의하면 공업도시에서 노동자 부부와 어린이 두 명을 둔 가정의 연간 필요경비는 860프랑 정도였고, 아무리 절약해도 760프랑은 있어야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공업도시의 노동자 가정에서는 아이까지 나서서 돈 벌이를 한다고 해도 겨우 생명을 유지하는 것도 힘든 상황이었다.

    ‘산업예비군’ 층이 광범하게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노동조건의 향상은 기약할 수 없었다. 거기에 노동자들에게 불리하기 이를 데 없도록 체결되는 어떤 계약도 성실하게 이행하지 않으면 가혹한 처벌을 받도록 한 법률은 이런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촉진하였다. 그런 위에 가스조명, 증기엔진, 기계의 도입으로 말미암아 미숙련 노동자나 체력적으로 열세인 여성이나 아동도 노동시장에서 남성 노동자의 경쟁상대가 되도록 만들었다.

    평균수명 20세, 학대가 자연스러웠던 아동노동

    이 시기의 비참한 노동자의 상태는 평균수명 통계가 단적으로 보여준다. 프랑스에서 산업혁명 이전 시기인 1806년 프랑스인들의 평균수명은 28세였지만, 산업혁명의 막바지 시기인 1840년에는 20년으로 저하되었다. 그 원인은 노동자계급의 사망이 주된 것이었다. 저임금·장시간 노동에 더해서 작업장의 비위생적인 환경과 과로, 그리고 안전설비의 부족으로 인해서 노동자계급의 사망률은 높아만 갔다. “눈은 무르고 뺨은 검고 핏기가 없으며, 얼굴은 깡마르고 사지는 빼빼 말라 길쭉해” 보인다고 당시의 지식인들은 노동자들을 묘사하고 있다. 여성 노동자도 병과 빈혈에 걸리고 피부는 혼기 전에 노화되었고, 생식능력도 상실했다.

    이런 상황은 노동하는 아동들의 상황에서는 더욱 비참하게 나타났다. E. P. 톰슨(Thompson)이 『영국노동계급의 형성』에서 소개한 “이 소년은 양팔에 양모를 가득 끌어안은 채 서서 잠을 자고, 매를 맞아가면서 잠에서 깨어나는 생활을 해왔다는 것… 그 날 그는 17시간을 일하고서, 아버지가 안고 집으로 돌아갔으나, 저녁밥도 넘기지 못했고, 다음날 새벽 4시에 깨어나 늦을까 두려워 동생들에게 공장의 불빛이 보이느냐고 물은 뒤 숨졌다는 것”과 같은 상황은 산업혁명이 일어나는 모든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매우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그래서 노동하는 아동에게는 채찍질이 동반되는 학대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한 조사는 당시 공장경영자와 대상인의 자식들의 평균 수명이 28세인데 비해 직조공과 제사공의 아동은 평균수명이 1.5세였다고 밝히고 있다.

    생존권과 결합한 보통선거건 쟁취 투쟁

    이런 노동자들의 상황은 급진적인 인권관의 형성을 촉진하였다. 경제적 불평등이 자유를 공허하게 만든다는 생각은 산업화 과정을 통해 세력으로 형성되는 노동자계급 속에 번져갔다.

    이 산업혁명의 시기에 확대되는 경제적 불평등과 생존권적 위협을 해결하기 위해 진보주의자들은 노동자계급의 대표를 의회에 보낼 수 없다는 현실로 인해 우선적으로 투표권의 확대에 관심을 기울였다.

    유럽은 나폴레옹이 패배한 뒤 비인회의(1814)를 통해 다시금 왕정복고를 비롯한 과거의 정치체제로 회귀하였다. 프랑스혁명에 의해 전파되었던 자유주의는 억압당했다. 1830년의 혁명은 부르주아지에게 확고한 정치권력을 안겨 주는 대신 노동자와 민중세력의 패배를 낳았다. 이후의 상황은 계급적 현실을 자각한 프롤레타리아들의 진출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1848년 2월 혁명까지 영국에서는 1,2차 선거개혁법 등을 통해 남성의 투표권이 이전보다 몇 배나 더 확대되었다. 이런 권리의 증진 노력은 차티스트(Chartist) 운동에 의해 주도되었다. 개혁법이 노동자들을 정치적 권리에서 배제하기를 계속하자 차티스트 운동 주도자들은 인민헌장(People’s Charter 1837)을 기초했다. 헌장은 평등한 대표, 보편적인 참정권, 재산 자격의 철폐, 의회의 연례 재선거, 비밀 투표에 의한 선거를 요구했다. 차티스트 운동에 의한 청원은 1838년에 거절되었다. 차티스트운동의 선거개혁요구를 통해 1,2차 개혁법을 통해 수백 만 명의 유권자가 보통 선거에 참여하도록 확대되고 노동자들이 재산과 거부 요건에 대해 항의하자, 지배층은 노동자의 투표권을 제한하기 위해 노동계급의 문맹을 들었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1861년에 문자해독능력을 자격요건으로 주장했다. 그는 “보편적인 교육이 보편적인 참정권에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맹을 이유로 노동자들의 투표 저지

    프랑스에서 남성 참정권은 1848년 혁명의 결과 그해 새로운 자유주의 공화국 헌법에 처음으로 채택되었다. 11월 4일 프랑스 의회는 20세에 시민권을 가진 모든 남성 시민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하였고, 이는 보편적인 남성참정권을 세계 최초로 인정한 것이었다. 하지만 선거를 두 달 앞둔 1850년 5월 31일, 의회는 투표권에 대한 재산 자격을 다시 부과했다. 그렇지만 이미 1848년 4월 제헌의회 아래에서의 보통선거에는 1천만 명 가까운 유권자가 투표할 수 있은 다음이었다.

    미국에서 뉴욕 노동자당 창립자인 조지 헨리 에반스(1805-1856)를 비롯한 이들은 무산계급의 불만을 대변하며 평등한 법률을 제정하려고 청원하였지만, 번번이 보편적인 참정권이 재산을 위태롭게 한다는 사고를 가진 보수주의자들의 반대에 부딪히고는 했다. 문자 해독 능력을 요구한 테스트를 통과해야만 한다는 보수주의자들의 주장은 흑인들을 선거에서 배제하기 위한 술책에 다름 아니었다. 이후 흑인들의 보통선거권의 보장을 법률로 제한하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법률 외적인 조치가 뒤따랐다. 대중교통, 학교, 공원, 식당 등 모든 공공의 영역에서 흑백분리가 강화되었다. 투표 때에는 문자해독능력 테스트 제한에 덧붙여 흑인들의 투표를 가로막기 위한 협박과 린치가 횡행했고, 이를 부추기는 짓이 묵인되었다. 1954년이 되어서야 미국 대법원은 이런 흑인분리정책을 비헌법적인 것으로 규정했다.

    19세기 투표권의 확대는 남성 참정권의 확보 정도에 머물렀고, 불안정한 제도를 쟁취한 것이었지만 사회주의자들은 보편적인 투표권을 위해 머나먼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다. 더욱이 우리가 오늘날 생각하는 것처럼 그들에게 참정권과 사회권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경제적 권리를 비롯한 사회권의 확보를 위해서는 참정권의 확대가 필요하다는 인권의 불가분의 원칙을 그들은 실현하고 있었다.

    자유주의 인권관에 대한 사회주의자들의 도전

    경제적 불평등이 자유를 공허한 것으로 만든다는 생각이 산업화 과정에서 싹트기 시작한 노동자 계급 속에 울려 퍼졌다. 나폴레옹의 패배, 비엔나회의, 1830년대와 1848년 혁명, 1871년의 파리 코뮌, 1861-65년의 미국 남북전쟁 등 주요한 정치적 격변 속에서 사회주의 사상은 발전해 갔다.

    바뵈프(Babeuf)를 계승한 부오나르티는 프랑스를 탈출, 그의 생애의 나머지를 바뵈프의 사상을 서구유럽에 전하는데 할애했다. 투표권을 빼앗긴 진보주의자들은 정치적 평등을 위한 투쟁에 핵심적인 장애물로 보이는 불평등한 재산을 근절하기 위해 완강한 노력을 시작했다.

    19세기 전반의 사회주의자들은 대체로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아나키즘(무정부주의)적 경향을 가진 이들이다. 프루동이나 푸리에 등과 같은 이들이 대표적이었는데, 이들은 “이성의 힘과 그 최종적인 승리를 믿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인도되는 이상사회를 그려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다음은 “엘리트의 덕성을 신뢰하여 위로부터의 개혁에 의한 사회주의를 목표로 하는” 생시몽(Saint Simon) 등과 같은 부류들이었다.

    세 번째는 부오나르티, 블랑키, 콩세데랑, 루이 블랑 등과 같이 “사회주의를 실현하고 유지하는 수단으로서 ‘인민주권’을 들고 민중의 정치참여를 중시한” 입장의 사람들이었다. 이들 세 번째 부류의 사회주의자들은 바뵈프를 잇는 마르크스와 엥겔스로 이어지는 사회주의운동의 전통을 형성할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1848년 『공산당 선언』등의 저작을 통해서 사슬밖에 잃을 것이 없는 프롤레타리아가 경제적, 제도적 하부구조에 의해 보편적인 인권의 이상이 유지될 수 있는 보다 평등한 사회를 쟁취할 것임을 역설했다.

    이들의 사회주의 사상은 최악의 상태에 빠진 노동계급을 고무했다. 노동계급이 부르주아지와는 다른 계급적 이해를 자각한 결정적인 계기는 1848년 6월이었다.

    혁명의 진압, 그리고 단결의 자유

    1848년 2월 혁명 이후 임시정부는 실업구제를 위해 국영작업소를 설치했다. 그러나 재정 부담을 이유로 정부가 이를 폐지하자 노동자들은 파리 거리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저항했다. ‘피의 6월’(Bloody June Days)로 불리는 정부군의 학살로 1만여 명이 죽거나 다쳤고, 더 많은 이들이 체포되거나 처형 또는 식민지로 추방당했다.

    혁명은 잔인하게 진압되었지만,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봉기는 다른 나라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산업화 이전의 나라들인 이탈리아, 헝가리, 독일 등에서는 민족주의 혁명으로 귀결되었다.

    1848년 혁명으로 사회주의자들은 유럽 전역에서 노예제 폐지, 여성의 정치사회적 권리, 아동 노동의 근절과 공공교육을 지지하고 주장했다. 또한 안전한 노동 환경과 노동시간의 단축을 위해서 각 나라의 정부들을 압박했다. 노동자계급은 계급의식으로 무장하고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투쟁만이 아니라 정치투쟁도 전개해냈다.

    1864년 ‘60인 선언’은 국민주권론을 비판하며 노동자 대표 문제를 제기하였다. 선언은 ‘질병·실업에 대한 공제(共濟), 파업의 자유,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 신용조직 결성의 자유’를 요구하고 특히 ‘무상이며 의무적인 초등교육 및 노동의 자유’를 요구했다. 이 해에는 제1인터내셔날이 창설되어 사회주의 운동은 국제연대운동으로 발전했다. 이런 흐름은 1871년 파리 코뮌으로 폭발할 것이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영국의 단결금지법(1799, 1800년)과 프랑스의 르샤플리에법(1791년)과 같이 사용주에게는 유리하나 노동자에게는 계약의 이행을 강제한 법률들은 새로운 노동법들로 대체되었다.

    영국의 1824, 25년 법을 필두로 19세기 중반을 넘어서면서 프랑스의 1864년 법, 1884년 법(노동조합의 결사의 자유 승인), 독일의 1869년 법, 미국의 1842년 연방 대법원 판결 등이 그 지표였다. 이제 아동과 여성의 노동은 제한되었으며, 남성 노동자의 1일 노동시간도 제한되었고, 노동조합을 결성할 자유도 승인되었다.

    이런 19세기 사회주의 사상의 발전, 노동운동의 발전은 피어린 민중 항쟁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우리는 다음 호에서 19세기 사회주의운동과 노동운동의 결과가 집약적으로 폭발되었던 파리 코뮌과 러시아 혁명의 인권구상을 살펴보도록 하자. 1차 세계대전 시기의 인권의 발전사는 그 다음에 본다.


    "권력과 재산을 만인의 것으로 한다"
    인권의 역사 5 | 1871년 파리코뮌의 인권구상


    월간『사람』제5호 | 2005년 11월
    "파리코뮌은 본질적으로 노동자 계급의 정부이고 착취계급에 대한 생산자계급의 투쟁의 소산이고 노동의 경제적 해방을 이룩하기 위해 마침내 새로 발견된 정치형태였다." - 마르크스(K.Marx)

    "19세기 프랑스에서 코뮌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나 부르주아지에 의해 분쇄 당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프랑스에서 단기간에 만들어 낸 것을 영속적으로 만들어낼 것이다." - 레닌(Vladimir Il’ich Lenin)

    지난 호에서 우리는 파리 코뮌과 러시아 혁명이 추구했던 인권구상에 대해 알아보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이 글을 정리하면서 그 약속이 얼마나 무모한 것이었는가를 뒤늦게 알아야 했다. 파리코뮌이 갖는 인권적 의의를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일인데, 좁은 지면에 방대한 러시아 혁명의 인권구상까지를 담아내려 했던 것의 무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둘 사이에는 상당한 연관성이 있고, 파리코뮌의 인권구상이 러시아에서 구체화되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러시아 혁명의 배경을 이루는 이미 제국주의 국가들이 세계대전을 치룰 수밖에 없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들의 권리선언을 이해하는 게 더욱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계획을 수정해 이번호에서는 인권의 역사에서 파리코뮌이 새롭게 제기한 내용은 무엇이었는가를 주로 살피도록 한다. 130여 년 전에 일어난 파리코뮌의 정신은 지금도 그 의미가 결코 퇴색할 수 없다는 게 우리의 생각이다.

    코뮌의 성립 배경과 과정

    19세기에 가장 혁명적인 도시, 파리의 인민들은 1871년 역사상 처음으로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한 인민의 권력을 탄생시켰다. 19세 중반,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1848년 2월 혁명의 잔인한 진압으로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노동운동에서 온건한 체제순응적인 경향이 강화되었다. 숙련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노동조합은 경영자와 타협하였고, 심지어는 비숙련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가입을 막기 위해서 조합비를 턱없이 높게 책정하기도 했다. 노동자들 사이에서 노동귀족과 빈곤노동자가 나타났다. 그런 가운데서도 긴장과 분란의 요소는 잠재해 있었다. 독일과 미국에서는 착실한 산업화로 인하여 이전보다 더 활발한 노동운동이 전개되었다. 독일의 사민당이나 미국의 전국노동자동맹은 독자적 조직과 활동을 예고했다. 1864년 런던에서 마르크스의 주도로 출발한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는 마르크스, 프루동, 바쿠닌의 첨예한 대립과 조직상의 결함으로 1872년 뉴욕으로 본부를 옮겨야 했고, 1876년에는 해체되는 운명을 맞았다. 1860년대 후반부터 나타나는 노동운동의 전투성은 19세기의 마지막 4반세기와 20세기 초에 더욱 강화되었다. 파리코뮌은 그런 과정에서 탄생하고, 소멸해갔다.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 정부가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은 것에 항의한 것을 계기로 시작된 파리 인민들의 항의에 정부는 베르사유로 도망갔다. 정부가 없는 속에서 그해 3월 18일 파리 국민방위병중앙위원회가 파리의 지배권을 장악하게 된다. 국민방위병은 파리의 인민들이 자발적으로 구성한 민병대와 같은 군사조직이었다. 그리고 3월 28일에는 이틀 전의 코뮌 의회의원 선거를 근거로 ‘파리 코뮌’을 선언한다. 그리고 5월 28일, 베르사유 정부군과 1주일간의 시가전으로 2만 5천여 명이 도륙당하는 참극을 끝으로 최초의 사회주의 권력은 붕괴된다. 여기서는 파리 코뮌의 진행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기는 어렵다. 파리코뮌이 갖는 인권적 의미를 정리하기 위해서 우리는 파리코뮌의 주요 선언의 내용을 재구성하여 살피는 정도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

    체계적인 선언이나 구상은 없지만

    파리코뮌이 체계적인 인권선언이나 헌법을 남기지는 않았다. 그러기에는 코뮌의 존속 기간은 너무도 짧았고, 정부군과 프로이센 군대에 의해 고립된 어렵고 힘든 상황이 있었다. 파리의 인민들은 굶주림 속에서도 인민의 공동체를 형성하였고, 자치에 의해서 대표를 뽑고, 정부를 구성했다. 인민주권 원리에 입각한 코뮌의 운영체계는 민주주의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 대혁명으로부터 시작된 인민들의 인권구상이 집약적으로 표출되었다. 이와 같은 파리 코뮌 운영의 모체는 코뮌 2년 전에 파리 북부 노동자지구 베르뷔르에서 나타났다. 1869년 총선거에서 베르뷔르의 유권자 집회를 모체로 하여 조직된 선거위원회가 선거강령을 작성하였고, 급진파의 후보자 캉베타가 이를 수락했다. 대표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는 것이 근대자본주의 대의제(자유위임)가 아니라 유권자의 명령에 따르는 대표의 모습(명령적 위임)이 나타났던 것이다(베르뷔르 강령). 코뮌은 3월 27일 20구 공화주의 중앙위원회의 선언을 발표하였고, 코뮌 의회는 ‘프랑스 인민에 대한 선언’을 발표했다. 20구 공화주의 중앙위원회는 파리 각 구의 공공집회에서 선출된 감시위원 대표의 모임이고, 3월 28일의 선언은 성립되는 코뮌에 대해 다양한 사상적 입장을 넘어서 코뮌에 대한 공통의 이해와 목표를 끌어내고자 한 것이다.

    또한 코뮌의 기본구조와 기본정책을 예고하는 강령으로서의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또 4월 19일의 선언은 코뮌 의회가 거의 전원 찬성으로 가결한 것으로 파리 코뮌의 본질, 이유, 목적을 프랑스 전 인민에게 전달하고자 했다. 여기서 보여주는 코뮌의 인권구상은 이전의 시민혁명기의 인권선언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두 개의 선언에 담긴 인권보장

    3월 27일 20구 공화주의 중앙위원회의 선언은 언론·출판·집회·결사의 ‘가장 완전한 자유’를 주장하고 있다. 거기에는 사상의 불가침을 강조하고 있다. 선언에서는 “비참한 임금제도나 빈곤과 결별하고 그것에서 비롯되는 숙명적인 귀결인 피비린내 나는 요구와 내란의 재현을 영원히 피하기 위하여 생산자에게 자본, 노동용구, 판로와 신용을 제공하는 데 가장 적당한 방법에 대한 끊임없는 검토”를 주장하고 있다. 또 정부의 구성과 운영에 대해서는 “인민주권’ 원리에 의한 광범위한 참정권 보장, 모든 공무원 또는 사법기관에 적용되는 선거의 원칙(선거에 의한 전 공무원·사법관의 임명권), 수임자의 유책성에 따라서 상존하는 파면 가능성(수임자에 대한 정치적 책임 추궁권·국민소환권)”을 명시하고 있다. 4월 19일의 선언에서는 이런 구상이 보다 구체화된다. “개인의 자유, 신앙의 자유, 노동의 자유에 대한 ‘절대적 보장’”에서는 정부에 대한 비판과 정치선전의 자유를 포함했으며, 집회의 자유가 포함되었다. 경제적인 면에서는 “‘교육, 생산, 교환과 신용을 발전·보급시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고 관련자의 희망과 경험에서 얻어진 자료에 따라 권력과 재산을 만인의 소유로 하기에 적합한 여러 제도’의 창설”을 제기한다. 또 인민주권 원리에 의한 광범위한 참정권 보장을 “구체적으로 ‘모든 단계의 코뮌 사법관 또는 공무원의 선거와 경쟁시험에 의한 책임 있는 선임과 일상적인 통제권과 파면권’의 권한”을 주장한다. 그리하여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명하고 이익을 자유롭게 옹호할 수 있는 코뮌 공무에 대한 시민의 일상적인 참여. 이러한 표명은 코뮌에 의해 보장되나 코뮌만이 집회와 선전의 권리에 대한 자유롭고 정당한 행사를 지키고 보장한다.”고 명시적으로 선언하고 있다. 4월 19일 선언은 ‘모든 프랑스인들이 인간, 시민, 노동자로서 그 능력을 완전하게 행사’하는 것을 보장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다.

    임금제도와 영원한 결별

    선언들에서는 먼저 전통적인 인간 권리인 신체의 자유, 정신활동의 자유를 ‘가장 완전하게’, ‘절대적으로’ 보장하겠다고 밝히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 한 예로 4월 6일에는 사형집행수단인 ‘길로틴’을 볼테르의 동상 아래서 불태웠다.

    코뮌은 존속 기간 내내 사형을 집행하지 않았다. 마르크스가 지적하듯이 “국민위병으로 변장하여 파리에서 체포된 그들(베르사유 정부측)의 헌병첩자조차 또 소이탄을 가진 경찰조차도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잔인하게 학살당했던 기억을 갖고 있던 인민들이 생명을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것은 아닐까. 그렇지만 이들 인민은 정부군에 의해 처절하게 학살을 당한다.

    두 번째로는 근대시민혁명기 인권선언이 재산권을 인권중의 인권이라고 하여 신성시하는 다양한 규정을 두고 있었던 것과 대조적인 면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교육에 대한 중시, 교육에 대해 비종교성, 과학성, 무상성의 원칙을 세우고 전면교육, 직업교육을 보장하려 했다. 마르크스는 “교육시설은 모두 인민에게 무료로 공개되었으며 동시에 교회와 국가의 간섭을 일체 받지 않도록 되었다. 교육은 누구나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계급적 편견과 정치폭력에 의해 짓눌려 있던 학문 자체가 속박에서 해방되었던 것이다.”고 지적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코뮌은 사회주의나 자본주의의 부정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임금제도…와 영원히 결별”하는 것을 주창한다. 이는 임금제도의 기초가 되는 자본·임노동관계의 부정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또 “권력과 재산을 만인의 것으로 한다.”는 것도 권력과 재산을 전체 ‘인민’의 소유물로 하고 또 ‘인민’의 소유물이기 때문에 그 전 구성원이 그 관리운영에 참여하는 체제를 의미한다고 할 때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넘으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세 번째로는 파리코뮌은 “권력을 만인의 것으로 한다.”는 명제를 철저하게 이해하고 실천하려고 하였다는 점이다. 보통선거제도(선거에 의한 공무원의 임명제도), 의원에 대한 명령적 위임제도, 공무원에 대한 일상적인 통제권과 파면권 및 정치에 대한 표현·집회·선전의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인민은 코뮌내의 전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켜 실질적인 주권자의 지위에 올라가게 된다.

    징병제를 폐지하고, 상비군도 두지 않는다

    네 번째는 지방자치에 대한 강조다. 파리코뮌이 생각하는 국가는 코뮌으로는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없는 전국가적, 전인민적인 문제를 코뮌의 경우와 동일한 원리가 지배되는 중앙정부에 의거하면서도 코뮌 자체에서 처리할 수 있는 ‘지방적 사무’는 코뮌의 완전한 자치에 의거할 것을 요구하는 통일국가였다. 주민자치, 단체자치의 보장뿐만 아니라 중앙정부와 지방공공단체 사이에 공적 사무를 배분하는데 있어서도 ‘지방공공단체 우선의 원칙’- 지방공공단체에서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사무는 지방공공단체로 배분하고 지방공공단체에서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없는 전국적·전인민적인 사무만을 중앙정부에 배분한다는 원칙-이 주도하게 되는 것이다. 내무담당위원회의 3월 25일 선언은 “국가의 전반적 관리·국가의 정치적 방향만을 중앙정부에 위임한다.”고 하였으며, 4월 19일 선언은 포괄적으로 ‘지방사무의 관리’를 코뮌의 고유 권리로 규정하고 있다.

    다섯 번째, 코뮌은 상비군은 새로운 국가에서는 인권에 위험하며, 경제적으로 위험하다고 하여 징병제를 폐지하기로 한 것이다. 3월 29일의 법률은 “제2조 국민위병 이외의 어떠한 병력도 파리 안에 창설되고 또는 도입되지 않는다. 제3조 모든 건강한 시민은 국민위병을 구성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상비군을 두지 않는 소 군사 국가를 꿈꾸었다. 이 대목은 군대에 대한 코뮌의 평화주의적 관점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코뮌은 작은 정부를 지향했다는 점이다. 코뮌의 공무원 임금은 노동자의 임금수준으로 제한했다. 공무원은 인민의 행복을 위한 수단이기 때문에 그것은 당연했다. 그런 배경에 대해 코뮌 의회가 제정한 4월 2일 법률은 다음과 같이 밝힌다. “지금까지 공무원 상급직의 급여가 높은 까닭에 엽관운동의 표적이 되어왔고 또 그 직위를 좋은 자리로 여겨왔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 진실로 민주적인 공화국에는 한직도 법외 급여도 있을 수 없다.”

    러시아 혁명의 모델이었던 파리코뮌

    파리코뮌의 이런 인권구상은 근대시민혁명 이래 지배계급에 의해 배제된 인민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그간의 인권보장체계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고 있다. 산업혁명 과정에서 비참한 생활을 경험한 인민들은 자본주의 체제를 넘기 위한 혁명적인 시도를 해낸 것이다. 거기에는 인권의 보장을 바탕으로 하여 민주주의와 평화·군축의 문제까지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구상이 담겨 있다. 프랑스에서 프랑스혁명기와 그 이후 노동운동, 사회주의 운동 속에서 단련된 인민의 인권사상이 발현되었던 파리코뮌의 인권보장의 구상은 마르크스나 레닌을 매개로 사회주의국가에 전수되어 실현되어야 할 모델이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근대자본주의가 조장한 불평등을 해소하고, 평등한 인간관계를 형성하려 한 코뮌의 구상은 지금에도 그 의미를 되새기게 만든다. 더욱이 러시아 혁명의 인권구상이 이후 혁명과정에서 왜곡되고, 인권보장의 원칙을 현실적인 이유로 포기했던 것을 감안한다면 파리코뮌의 인권구상은 더욱 값진 것이었다.

    다음 호에서는 근대 자유주의 사상이 인권의 발전에 미친 영향을 살피면서 제1차 세계대전 시기로 넘어가기로 한다. 러시아혁명기의 인권체계와 구상은 그 다음에 보기로 하자.


    자유주의가 인권의 역사에 남긴 깊은 발자취
    인권의 역사 6 |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의 자유주의


    월간『사람』제6호 | 2005년 12월


    때 아닌 자유주의의 바람

    최근 한국사회에 때 아닌 ‘자유주의’를 앞세운 바람이 불고 있다. ‘뉴 라이트’라는 그들은 하나의 세력은 아니지만, 그들은 네트워크도 만들고, 전국연합도 만들었다. 보수 언론의 부추김과 한나라당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갑작스레 부상한 한국판 자유주의자들은 구국의 결의를 다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말하는 자유주의라는 것이 기껏해야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이라는데 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그들이 국가보안법의 완전한 폐지조차 주장하지 못한다. 자유로운 시장은 자유주의자를 가름하는 표석과도 같은 것인데도 말이다. 또 미국의 패권주의에 의해 세계는 전쟁의 참화로 고통 받고 있고, 그로부터 세계인들의 자유는 억압당하고 있음에도 어떻게 미국을 자유의 수호자로 찬양하는지, 그리고 남한 사회의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도 못하면서 북한의 인권문제에만 핏발을 세운다. 참으로 개가 웃을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오늘날의 뉴 라이트는 무늬만 자유주의자들일 뿐이지 실상은 미국의 신보수주의 내지는 네오콘의 아류라고 해야 옳다. 이번 호에서 19세기 서구의 자유주의의 모습을 추적한다.

    고전적 자유주의가 어떤 과정을 밟아 자유민주주의로 변화하였으며, 이후 개혁 자유주의로 나아갔는지를 살펴보는 과정은 오늘 한국 사회의 왜곡된 자유주의를 볼 수 있는 거울을 제공할 것이기 때문에 현실적인 의미마저 갖는다. 아직도 소극적 자유와 권리를 말하는 이들에게 19세기 말의 자유주의자들은 진정한 자유는 ‘모든 이의 평등이 보장되는 적극적 자유’라고 역설하는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을 듣게 될 것이다. 지금도 이런 논의들은 인권 이론에서 주된 개념으로 등장한다.

    자유주의는 진보의 이데올로기

    자유주의는 근대자본주의의 탄생에 절대적인 기여를 했던 다양한 조류의 사상을 한 묶음으로 일컫는 개념이다. 자유주의는 “원래 봉건질서와 절대주의 정치질서에 대항한 시민계급의 해방의 이념이었다.” 그래서 “자유주의는 봉건적인 속박과 구속으로부터의 자유, 국가간섭의 최소화, 시장의 자유거래 등 당시 성장하는 자본주의 내 ‘시민’의 정치적·경제적 이해의 확보와 증진을 위한 이념이었다.” 자유주의는 시민·정치적 권리 개념(로크 등)과 시장적 자유(아담 스미스)를 핵심적인 개념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런 원리에서 자유주의는 제한된 선거권으로 표현되는 재산이 있고 교육 받은 부르주아지가 헌법상의 자유를 이용하여 통치하는 국가, 사회형태를 지지했다(고전적 자유주의).

    이 초기 자유주의는 역사에서 시민적 자유를 확장하였던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시장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영업과 거주·이전의 자유를 선차적으로 쟁취하고, 이어서 신체의 자유를 획득했으며, 나아가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옹호했다.

    이런 고전적 자유주의가 “민주주의의 사회적·경제적 측면을 수용”하여 자유민주주의로 개혁해간 역사를 갖게 된다. 자유주의를 토대로 민주주의의 정치적 측면(정치적 시민권의 민주적 향유)을 수용한 것이 자유민주주의인 것이다. 이 자유민주주의로의 변화는 광범위한 사회적 갈등, 투쟁과 희생이라는 고난에 찬 진보주의자들의 과정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다. 또 자유주의의 경쟁 이념이었던 사회주의의 존재와 발전으로 인하여 이런 자유주의의 ‘민주화’는 촉진되었다.

    그래서 자유주의는 존 스튜어트 밀에서 자유민주주의로 발전하고, 이후 19세기 말에 이르러 그린과 홉하우스에서 개혁적 자유주의, 또는 신자유주의(지금의 신자유주의와 정반대의 의미를 지녔음. 그래서 지금의 신자유주의는 neo-liberalism으로 표현하지만, 이때의 신자유주의는 New Liberalism으로 표현함)로 발전해 갔다.

    자유민주주의의 등장

    고전적 자유주의가 자유민주주의로 발전하는 데는 존 스튜어트 밀(1806-1873)의 역할이 컸다. 『미국의 민주주의』의 저자인 토크빌의 영향을 받았던 밀은 “인간노력의 모든 영역에서 개인 자유의 범위라는 문제에 몰두했던 분명한 민주주의 옹호자”란 평가를 받는다. 그는 “좋은 삶(good life)이란 인간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것이고, 좋은 사회(good society)란 이들 능력을 극대화시키는 사회로 상정된다.”고 말했다.

    그의 입장에서 볼 때 자유민주주의 정부 또는 대의제 정부는 그 자체가 개인성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해 중요했다. 그는 “문제는 (다수의 계급입법과 같은)민주주의의 남용을 방지하면서도 동시에 인민적 정부(popular government)의 성격을 희생시키지 않는 방법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과제는 시민의 일부를 대의체제로부터 배제시키는 것을 포함하는 선거권 제한의 방법으로는 성취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육체노동자들이 보통 선거권을 갖고 정치에 참여하여 스스로를 발전시키는 수단으로 중요하게 보았다. 그는 노동자들이 “의식적으로 더 큰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도록 하는 것은 정치적 토론과 집단적 정치적 행동을 통해서이다(참여민주주의).”

    그렇지만 그는 ‘다수의 폭정(민주주의)’이라는 두려움이라는 당시 중산계급의 두려움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교양 없는 무리’인 노동계급에게 선거권을 주기 전에 민주주의 교육부터 시켜야 하고, 심지어는 수적으로 우세한 노동계급이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 계급입법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해 사회의 소수 성원들에게 복수의 투표권을 주는 것까지 생각했다.

    신자유주의의 평등 추구

    밀을 거친 자유주의는 후기 자유주의, 개혁 자유주의, 신자유주의, 좌파 자유주의, 급진적 자유주의, 사회적 자유주의로 불리는 조류로 발전해 간다. 이 조류의 대변자는 그린, 홉하우스, 홉슨이었고, 이어 케인즈, 베버리지로 이어지면서 서구 복지자본주의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다.

    이 개혁 자유주의는 “정치적 영역에서는 민주적 참정권을 주장하였으며, 자유민주주의의 작동을 위해선 합리적 의견표현, 여론이 중요하다고 보아, 언론, 표현, 집회, 결사의 자유 등의 포괄적 시민권을 주장했다.” 주요하게는 “그리고 경제적 영역에서 자유시장의 폐해를 인정하여 완전한 자유방임을 반대하고, 국가의 사회입법, 사회복지 정책을 옹호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19세기말의 산업자본주의는 소수의 부, 다수의 빈곤, 시장체제의 모순과 불평등이 보다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1873-96년 기간의 대공황이 있었고, 노동조합운동이 성장했다.

    자본주의 체제의 유지를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의 요구를 일정 정도 수용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노동자들의 무제한적인 착취를 제한하는 노동법을 비롯하여 초기적 사회복지체제를 도입하는 개혁입법들이 마련되었다. 개혁 자유주의는 이런 사회적 상황이 반영된 것이었다.

    그린의 '적극적 자유'

    토머스 힐 그린(Thomas Hill Green, 1836-1882)은 “사회가 없으면 개인도 없다.”면서 법과 국가는 자유를 제한할 뿐만 아니라 자유를 부여하고 확장한다고 보았다. 이로부터 그린의 유명한 ‘적극적 자유’ 개념이 등장하게 된다. 이전까지 자유주의자들은 국가의 개입으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확대한 것에 관심을 가져서 이를 ‘-로부터의 자유’(소극적 자유)를 강조했지만 그린은 이런 자유주의 전통을 일거에 넘어 버렸다.

    그린이 보기에 자유는 “행하거나 향유할 가치가 있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공동으로 행하거나 향유할, 무엇을 행하거나 향유할 적극적 힘이나 능력”이었다. 진정한 자유는 공동선과의 조화 속에서 자신의 도덕적 소명을 추구할 권리나 힘으로 규정된다. 그래서 진정한 자유인 적극적 자유는 “공동선에로의 기여를 위해 모든 사람들의 힘을 평등하게 해방하는 것”으로 정의되고, “모든 사람의 능력의 평등한 발전은 모든 이의 최고의 선”이라는 주장까지 나아간다(공동선자유주의). 이런 선은 다른 사람의 희생 위에서는 얻어질 수 없으며, 어떤 계급이나 개인의 발전이 누군가의 동일한 기회의 배제에 기초한 것이라면 이를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너무 적은 개입을 해온 국가의 책임은 공장, 주거, 교육, 토지소유, 그리고 생산, 음주 등을 규제하는 강력한 제한과 규제의 도입을 포함하는 급진적 개혁이 요청되고, 이는 공동적 복지의 이름으로 뿐만 아니라 자유 자체의 이름으로 요청되는 것이다. 즉 국가권력의 확대는 개인적 자유에 반하거나 그 자유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 자체의 이름으로 주장된다. 그의 직접적 관심은 하층계급 특히 프롤레타리아트의 비참한 조건을 완화하는 수단을 제안하는 것이었다. 그는 개선(구제) 입법을 통해 이를 해결하고자 했다.

    “사회의 혜택 받지 못한 구성원들은 끝없는 경쟁의 물결 속에서 허우적댄다. 이 경쟁의 물결 속에서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아무런 기회도 없다. 이러한 상황에 단지 방치될 자유인 소극적 자유만이 있는 한, 그들은 시민사회의 구성원은 될 수 있지만, 사회의 유용한 산물은 그들에게 아무 소용이 없다.” 하지만 그는 불평등을 낳는 사회의 객관적 조건을 너무 쉽게 간과했다. 그는 “가난과, 토지와 자본에 대한 접근의 결여가 인간능력 실현의 심각한 장애라고 강조함에도 불구하고 이 장애가 소유체제, 즉 무한한 개인적 전유권을 수반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불가피한 일부라는 것을 보지 못했다.” 결국 그는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극복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홉하우스의 '자유주의적 사회주의'

    홉하우스(Leonard Trelawny Hobhouse, 1864-1929)는 그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홉하우스는 자유의 제한을 통한 평등한 자유의 향유를 강조했다. 홉하우스는 보편적 자유의 조건이 보편적 제한이라는 척도라면 자유의 발전적 속성은 순전한 평등성이라고 보았다. 그에게 “완전한 자유는 완전한 평등을 포함한다.” 불평등에 기초한 자유는 특권이며, 그러므로 약하고 억압받는 사회성원이 강화되어 약자의 발전을 위한 완전한 기회가 주어져야 하고, 또 한편 전통적으로 혜택을 받은 자들은 그들의 이익에 상당하는 책임과 의무를 걸머지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재산은 사회적 차원을 지니며 부는 부분적으로 집단적 창조물이며, 따라서 소득세는 개인 노동 산물의 국가몰수가 아니라 공동산물의 사회적 재흡수라고 주장했다. 홉하우스에게 자유의 문제는 약자 측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를 확보하는 문제였다. 그러기 때문에 국가의 역할은 공동적 복지와 개인 자유의 증대 모두를 위하여 확대되어야 한다. 국가에 의한 합리적 통제는 자유에 대한 위협이라기보다는 자유를 확장하기 위한 본질적 수단이며 사회발전을 이루기 위해 필수불가결하다(‘자유주의적 사회주의’) 이로부터 자유주의에 기초한 사회주의론을 피력했다. 홉하우스가 옹호한 복지국가는 생산수단에 대한 국가소유와는 다른 것이었다. 그가 옹호한 ‘사회주의’도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자유주의적 사회주의라 이해될 수 있다. 그는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의 필수적 기초’라고 주장하면서 집단적 자기통치의 과정은 그 자체 선한 생활의 일부이다. 그는 완전한 보통 선거권을 옹호했다. “민주주의는 시민의 권리의 행사에 대한 성, 재산, 복잡한 법률의 속임수 등의 모든 인위적인 장애가 제거됨으로써 완성될 수 있다.”는 그의 말은 오늘에도 되새겨봄 직하다. 홉하우스의 사상은 자유주의 이념사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지평이 얼마나 확장되었는가를 보여준다.

    제1차 세계대전과 자유주의의 몰락

    19세기 말에 이르러 서구 자본주의는 제국주의 단계로 접어들었고, 식민지 쟁탈전은 평화의 시대를 종식시키고, 세계대전이 일어난 조짐을 지속적으로 보여주었다. 이전까지와는 다른 1차 세계대전은 이전의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대량 ‘학살의 시대’를 예고하는 총력전의 형태로 나타났다.

    서구에서는 1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더불어 러시아에서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했다. 식민지에서는 민족자결주의의 기치가 올려지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수십 년 동안 세계 곳곳에서 민족해방투쟁의 불길이 타올랐다.

    그런 시대에 자유주의는 그 진보성을 상실했다. 특히 파시즘의 탄생은 자유주의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 보여주었고, 전후 냉전 자유주의, 신자유주의의 등장은 자유주의의 몰락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자유주의가 쟁취하였던 자유의 성과들은 세계인권선언과 국제인권조약들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인권사에서 자유주의 전통은 한편으로는 극복의 대상이기도 하다.

    이제는 미뤄두었던 러시아혁명과 사회주의에서의 인권구상을 살펴볼 차례다. 자본주의 세계질서를 긍정했던 자유주의 인권과 출발부터 달라 자본주의 질서를 부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사회주의 인권구상은 인권의 역사에 무엇을 남겼는지 알아본다.


    인간해방을 위한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의 실험
    인권의 역사 7 | 혁명 러시아에서의 인권현실


    월간『사람』제7호 | 2006년 1월


    “인간에 의한 인간의 모든 형태의 착취를 억제하고, 사회 속의 계급 차이를 완전히 철폐하는 것을 공화국의 목적으로 한다. 공화국은 착취자들을 무자비하게 분쇄하고, 사회주의적 토대 위에 사회를 재조직하며, 전 세계에서 사회주의를 달성할 목적을 가진다.” - 1918년, ‘노동·피착취 인민의 권리 선언’ 중에서

    저명한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소련)의 성립에서 해체에 이르는 1917년에서 1991년까지의 75년간을 ‘단기 20세기’로 규정하였다. 그 기간 중에 국제사회에 미치는 소련의 영향은 절대변수였다. 이번 호에서는 러시아혁명의 인권적 의미가 무엇이고, 소련의 사회주의 실험의 전개과정과 그 속에서 사회주의 인권 구상이 어떻게 왜곡되었는가를 살펴보려 한다. 일단은 소련의 전 과정을 살필 수는 없고, 러시아 혁명기까지의 과정을 정리하는 것으로 하자.

    러시아 혁명 과정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은 근 1백년간의 민중운동의 결과였다.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 포템킨 전함 폭동, 노동자와 농민들의 시위 속에서 스톨리핀 내각이 등장하고, 이 내각은 농노해방(1861) 이후의 농민들의 처지를 일부 개선하고, 간선제에 의한 두마(의회) 설치를 진행하는 등의 자유주의 개혁을 진행했다. 그렇지만 이미 급진화 된 제 세력들은 만족할 수 없었고, 그가 암살당하자 차르 체제의 유지 위에 이루어지던 개혁도 중단되었다. 러시아는 산업부문의 자본주의적 발달과 농업 부문의 봉건적 잔재가 공존하고, 체제세력과 반체제세력들이 심각한 충돌을 몇 차례 경험했지만, 차르 체제 전제정은 유지되었다. 혁명세력은 이 체제를 타도할 만한 충분한 역량을 갖추지는 못했다.

    이런 어정쩡한 상태를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은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계속되는 전쟁의 패배와 무모한 동원으로 전시경제체제는 비참한 민중들의 생활상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에릭 홉스봄이 총력전의 시대라고 일컬었듯이 1차 세계대전은 러시아에게 전사자 170만 명, 포로 250만 명, 그리고 500만 명에 이르는 부상자를 안겨주었다. 이런 전쟁동원에 염증을 느낀 민중들은 전쟁의 종식을 간절히 기대했다.

    언제라도 혁명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1917년이 밝았고, 이 예감은 적중했다. 기아와 빈곤에 허덕이던 노동자들은 예년보다 격렬한 파업을 전개했고, 농민들의 저항도 거세졌다. 이런 가운데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을 향한 차르 정부의 발포명령을 병사들이 거부하면서 2월 혁명이 일어났다. 결국 차르는 권력을 임시정부에 내놓았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반(半)봉건적 농업구조의 청산을 필두로 한 혁명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었다. 제국주의 전쟁이 어떤 도덕적 정당성도 가지지 못하는 상황에서 임시정부는 계속 전쟁에 매달렸다. 이런 무능한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즉각적인 사회주의 혁명으로 넘어간 것이 10월 혁명이었고, 그것을 주도한 것이 레닌이 지도하던 볼셰비키였다.

    10월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1905년 혁명이 서구 유럽처럼 철저한 시민혁명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봉건적 유제들을 간직한 농업이 산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농민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며, 억압적인 차르 전제정이 유지되던 러시아는 근대화 과정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대처할 능력이 없었다. 시대착오적이며 비효율적인 체제였던 차르 체제는 어차피 몰락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10월 혁명은 소수의 음모적인 혁명가들의 쿠데타가 아니었다. 10월 혁명의 거사를 결정하던 당시 볼셰비키들은 혁명운동 과정에서 자생적으로 탄생했던 민중들의 조직인 소비에트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1917년 혁명 당시에 이 소비에트들은 노동자, 농민, 병사들 사이에 조직되어 있었다. 병사 소비에트는 자신들의 장군마저 선거로 뽑았다. 직접 민주주의의 기초를 이룰 소비에트를 기반으로 권력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볼셰비키가 대중적 요구에 결합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소비에트의 존재가 레닌이 1917년 4월 테제를 통해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라고 표현할 수 있었던 근거였다.

    봉건 잔재의 즉각적 청산과 전쟁의 즉각적 종식이라는 민중들의 열망을 받아 안을 조직은 볼셰비키뿐이었고, 볼셰비키가 가장 진보적이었다. 2월 혁명 이후 전 러시아 사회가 점점 구심점을 잃고 표류하고 있던 상황에서 분열된 사회세력들을 통합하고 정치권력을 장악하여 혁명을 계속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보일 수 있었던 유일한 정치세력은 볼셰비키뿐이었다. 전쟁과 기아에 지치고 임시정부의 무능함과 공허한 약속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민중들은 볼셰비키의 무장봉기에 호응하여 궐기했다. 적어도 수도를 비롯한 대도시권에서 민중들은 볼셰비키 주도의 무장봉기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더라도 기본적으로 이를 지지하거나 이에 대해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볼셰비키는 임시정부의 탄압에 혁명위원회를 조직하여 무장봉기로 맞선다는 방침을 마련했다. 1917년 10월 24일 봉기가 시작됐고, 혁명군은 거의 무혈로 수도의 중요 거점들을 점령, 제2회 전(全)러시아소비에트대회가 열린 다음날 심야까지, 임시정부의 거점인 동궁(冬宮)을 제외한 도시 전체가 볼셰비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 소비에트대회는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의 일부가 퇴장한 가운데 봉기를 승인하고 권력 장악을 결의하였다.

    이어서 임시정부의 마지막 거점인 동궁이 함락되었고 임시정부의 각료들이 체포되었다. 소비에트대회는 ‘평화에 관한 포고’와 ‘토지에 관한 포고’를 채택하고, 레닌을 의장으로 하는 를 정부로 선임하였다. 일시적으로 임시정부 측의 저항이 있었지만 격퇴되었고, 1918년 1월 23일 개최된 제3차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는 노농소비에트대회와 농민소비에트대회의 합동을 결정하고, ‘노동피착취인민의 ‘을 채택하였다. 이로서 1918년 2월에는 혁명이 거의 전국에 확대되었다. 러시아의 민중들은 서구식 민주주의에 대한 경험도 없었고, 애착도 없었으므로 임시정부가 개최했던 헌법제정의회의 해산에 대해서도 반발하지 않았다. 이후 반 볼셰비키 세력들과 차르 체제 하의 장군들에 의한 백군들의 저항이 있었고, 14개의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이 있었지만, 볼셰비키 정권은 이를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이로써 러시아에는 인류 역사 최초로 사회주의 국가가 성립되었다.

    사회주의 러시아의 평등주의

    혁명 이후 내외의 공격을 받는 과정에서 혁명과업을 수행해야 했던 러시아 공산당은 급진적인 평등정책을 시행해 나갔다.

    공장은 노동조합의 관리 하에 들어갔으며, 토지는 농민들의 손에 분배되었다. 이런 정책들을 통해서 노동자와 농민들의 충성심을 확보한 러시아 공산당은 혁명 과정에서 사라진 구지배세력의 몰락으로 거칠 것 없이 평등주의 정책을 시행해 나갔다. 인민들에 대한 교육의 저변확대 및 평등화가 이루어져서 문맹률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여성은 남성들과 동등한 권리를 인정받았으며, 20세기 초 동성애자들이 소련으로 몰려들 정도로 성에 대한 차별이 금지되었다. 사회보장제도가 전면적으로 도입되었고, 국가 차원에서는 국방력도 강화되었다. 압축적인 근대화 과정이 동시에 혁명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발전은 혁명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것들이다. 이런 급속한 속도와 변화와 발전의 성과는 자본주의 국가들을 긴장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기에 자본주의 국가들은 사회주의 소련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권력은 소비에트로부터 선출된 각급의 대표들로 구성되었다. 그 대표들은 주권자에 의해서 언제든지 소환될 수 있었다. 이런 대표들에 의해서 소집된 소비에트가 실질적인 권력의 핵심을 장악했으므로 직접 민주주의의 가능성이 어느 체제에서보다 높았다. 착취자가 없는 사회에서 생산의 관리도 분배도 인민들의 직접 참여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민주집중제에 의해 아래로부터 의견이 수렴되고, 그 결정에 전 인민이 복종하는 형식의 이런 민주주의의 실험은 처음 시도되는 민주주의였다. 지배계급이 사라지고 인민이 직접 통치하는 국가와 사회체제가 성립되었다.

    인민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도 보장되었다. 이 자유는 단지 형식적이 것이 아니라 그 자유를 실현하기 위한 물적인 조건까지도 국가와 사회조직들이 담보한다는 것이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자유보다 한층 발달된 것이었다.

    바로 이 때문에 노동자들의 충성심을 확보하기 위한 체제간의 경쟁에 신경을 써야 하는 처지였던 자본주의 국가의 지배층조차 소련의 성과를 의식하여 수정자본주의의 조치들 혹은 사회민주주의적 조치들을 채택할 것이었다. “사회주의 소련의 존재는 자본주의 사회를 상대적으로 인간화시키는데도 공헌했던 것이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신생독립국가들이 대부분이었던 많은 제3세계 국가들은 소련식 사회주의 발전 모델을 채택해 갔다. 바로 그것이 반제 반봉건의 과제를 가진 후진국의 근대화 모델로서 대단히 효과적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러시아에서 인간해방의 신기원이 열리는 것만 같았다.

    러시아 사회주의 이상의 왜곡

    혁명은 성공했지만 혁명을 지켜내는 일이 수월한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 정부는 온갖 공격에도 불구하고 혁명정권을 강화해야 하는 위기 상황을 거쳐야 했다. 이때 러시아 공산당이 상황에 맞게 임시적으로 취한 정책들이 이후 사회주의 러시아의 정책으로 굳어졌고, 그런 점들은 혁명이 안정화된 이후에도 러시아 사회주의 체제를 약화시키는 요소로 작용했다.

    혁명의 기반이었고, 민주집중제를 가능하게 하는 소비에트가 이제는 당의 일방적인 동원을 위한 체제, 행정전달조직으로 변화했다. 역동적으로 인민들이 참여하고 토론하며, 공동으로 결정한다는 원칙은 무시된 채 소비에트에서의 대표는 거의 당원들이 차지했으며, 이들에 대한 비판은 시간이 지날수록 어려워졌다. 국가보다는 공산당이 대중을 지도한다는 원칙이 세워졌고, 이로서 대중들의 혁명에 대한 자발성은 심각하게 억압됐다.

    처음에는 문서의 정리와 전달 등 지극히 행정적인 업무만을 담당했던 당의 서기국은 점차 권력의 중심이 됐다. 따라서 이후에는 서기국을 대표하는 서기장이 당의 중앙이 되었고, 실질적인 통치자의 위치가 된 것이다. 당원들은 남들보다 유리한 조건에서 관직 등을 차지할 수 있었으므로 차별적인 지위를 가질 수 있었다.

    내전이라는 이유로 도입된 자유에 대한 유보 조치는 이후에도 풀리지 않았다. 그런 임시조처들은 곳곳에서 작동했다. 언론의 자유, 집회, 시위의 자유도 보장되지 않았다. 체제비판세력은 제거되었고, 스탈린 시대에 이르게 되면 구 볼셰비키와 전문지식인들의 숙청이 이어지게 된다. 국가의 비밀경찰조직이 공포를 조장했으므로 국가권력에 도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뿐만 아니라 농업의 희생 위에서 수행된 급속한 집단농장화와 이에 반발하는 농민들에 대한 강제이주와 강제노동수용소까지 등장하였으며,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혁명의 주요 지지기반이었던 노동자 계급은 혁명 기간 중에 감수해야 했던 생활수준 하락과 노동조건의 악화, 노조의 무력화 및 전반적인 사회주의 이념의 왜곡에 대해 심심치 않게 저항했다. 그러나 이후 소련 정권이 공고화된 뒤에는 사회 내에서 상대적으로 우대받는 계급이었기 때문에 어느 면에서는 정치적으로 매수되어 버린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권력에 대해 전혀 견제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소련 사회는 당의 일방적인 지도만이 있는 경직된 사회로 굳어져갔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10월 혁명 초기부터 격렬하게 비판했던 것처럼 대중들의 자발성을 무시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이상은 결국 소수의 정치가들의 독재로 전락되어 버렸다.

    권리와 의무의 주체여야 할 인민은 국가가 보장하는 최소한의 생활수준과 혜택을 누리는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해 버렸다. 그토록 사회주의자들이 내세웠던 ‘인간에 인간의 착취가 근절된 사회’는 소련에서는 너무도 먼 이상으로 그치고 말았다.

    사회주의의 원리와 그에 따른 인권보장체계에 대해서는 뒤에 기회가 닿는 대로 정리해 보도록 한다.

    다음 호에서는 1,2차 세계대전 전후 시기의 인권의 변화과정을 정리할 계획이다. 이 시기에는 민족해방운동이 성장했으며, 세계대전에 따른 참상을 겪은 인류가 새로운 인권보장체제를 국제적으로 고민했다는 점에서 이전의 시기와는 다른 면모를 찾아볼 수 있다.


    전쟁 앞에 무산된 '평화'와 '인권'의 꿈
    인권의 역사 8 | 민족자결권의 형성과정과 1,2차 세계대전까지


    월간『사람』제8호 | 2006년 2월


    19세기말, 20세기 초 자본주의 체계의 불안정성은 극에 달했다. 제국주의 단계에 접어든 자본주의 체계는 아프리카, 아시아 등지에서 식민지를 확대하여 나갔다. 자본의 이윤율 저하 경향에 따라서 이윤을 보장하는 시장의 확보를 위한 경쟁은 군사적 대결로 나아갔다. 1차 세계대전은 이와 같은 세계정세에서 누구나 예견하고 있던 중에 터진 예전의 인류가 겪지 못한 전쟁이었다. 1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후에는 국제연맹과 국제노동기구(ILO)가 등장했고, 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후에는 유엔이 창설되었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인류는 이제 국경을 넘어 국제적인 인권보장체계를 만드는 일에 합의를 이루었다.

    제3세대 인권으로 터 잡은 민족자결권

    그런 과정에서 19세기부터 유럽에서 발흥하기 시작했던 민족주의가 전 세계로 번져 나갔다. 민족주의와 민족자결권(the rights to national self-determination)이 세계정치의 주요한 화두가 되었다. 민족자결권은 이후 인권의 역사에서 ‘제3세대 권리’ 또는 연대의 권리로 불리면서 현대 정치구조를 읽는 키워드로 자리 잡을 것이었다.

    민족주의는 민족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던 유럽의 이탈리아, 독일, 그리고 아시아의 일본에서 터져 나왔다(이들 세 국가들이 세계대전의 주역이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민족자결의 호소는 쇠락하고 있던 오트만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으로 번져 갔다. 동유럽과 남유럽 그리고 세계 곳곳의 식민지들에서 민족주의는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호소를 담고 새로운 세계질서를 만들어 갔다. 이들 민족주의의 발흥은 결과적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지만, 1차 대전이 끝난 뒤에 식민제국의 식민지에 대한 통치력은 현저히 약화되었고, 2차 대전이 지난 뒤에는 더 이상 식민제국들이 식민지를 직접 통치하는 방식은 통할 수 없었다. 2차 대전이 끝난 뒤에는 인도, 인도네시아와 같은 큰 나라들이 독립했으며, 아시아 각국은 주로 2차 대전과 1950년대, 아프리카에서는 1960년대에 대부분 독립하여 세계정치사에서 제3세계 그룹으로 자리를 잡게 될 것이었다.

    무시할 수 없는 이들 신생 독립국가들의 존재는 1966년에 유엔에서 채택된 양대 인권조약(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조약, 시민·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조약)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기게 되었다. 이들 조약의 제1조는 “모든 인민들은 자결권을 가진다. 이 권리에 입각하여 모든 인민들은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자유롭게 결정하고, 또한 자신의 경제적·사회적·문화적 발전을 자유롭게 추구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민족해방운동을 둘러싼 사회주의자들의 논쟁

    오늘날의 민족자결권의 성립까지 자유주의자들의 기여보다는 세계혁명을 꿈꾸었던 사회주의자들의 이론적 작업에 힘입은 바가 컸다. 칼 마르크스는 영국의 억압을 받았던 아일랜드 민족의 독립이 영국 지배계급의 경제·정치·군사·이념적 영향력이 절대적으로 약화될 것이라는 희망으로 아일랜드 국가의 수립을 지지하였다. 그렇지만 그의 시선은 영국 노동자계급의 해방에 머물렀던 탓에 아일랜드 인민의 염원에 충실히 기초하고 있지는 못했다. 1907년 다민족 국가로 이루어졌던 합스부르크 문제를 고민하면서 “큰 연방국가 내에서 문화적 자치 공동체를 창설하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는 “민족운동과 ‘국익’을 위한 투쟁은 통상 부르주아 지배계층의 계급운동이다. 이러한 민족투쟁은 ‘국익’의 형태가 진보적 역사발전 형태를 옹호할 때에만, 그리고 노동계급이 단순히 (부르주아가 선도하는) ‘민족’이라는 집단을 넘어서 독립적이고 개명된 정치적 계급으로 아직 분화하지 못했을 때에만, 부르주아 지배계급 외의 다른 계층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다.”는 당시 대부분의 사회주의자들이 지지하던 민족해방투쟁에 대해 특이하게도 반대의 입장을 제기했다. 그는 “민족자결권은 모든 사람이 금쟁반에 음식을 담아 먹을 권리가 있다는 주장만큼이나 가당찮고 무의미한 것이다.”고 까지 주장했다. 물론 그렇다고 그가 민족해방투쟁에 대해 전적인 부정의 입장을 갖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인민이 경제 자원에 대한 주권적 통제권이 있고 경제적 자립을 할 수 있을 때에만 정치적 독립을 고려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논지는 레닌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혹독한 비판을 받았지만, 이후 신생 독립국에서 지배세력 대신에 국내의 지배세력으로 대체된 독재 권력의 탄생으로 현실화되었다. 바로 알제리의 혁명가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이 우려했던 점이기도 했다.

    레닌은 피억압, 피식민 민족의 경우에 민족자결권을 위한 투쟁에서 부르주아 엘리트와 ‘전술적 동맹’을 맺을 수 있다고 보았고, 룩셈부르크의 경제적 자립만이 민족해방을 정당화하는 유일한 기준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위로부터의 민족주의’와 ‘아래로부터의 민족주의’가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민족자결권을 부정하는 것은 억압하는 국가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그것은 민주적 행정방식이 아니라 경찰적 행정방식이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그는 사회주의 국가와 제국주의 국가의 프롤레타리아는 피억압 국가의 민족해방운동을 지원해야 한다며 훗날 제3세계 민족해방투쟁의 지도자들이 공감했던 구호인 “모든 국가 그리고 모든 피억압 국가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를 외쳤다. 스탈린은 “민족을 언어, 영토, 경제활동, 문화적 공동체로 표현되는 심리적 특질로 이루어진, 역사적으로 발전된 안정적인 공동체”로 정의하고, 자본주의 하에서 민족의 구분이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는 인도, 이집트, 모로코 및 기타 지역의 민족해방투쟁은 지지했지만, 소련으로부터 분리하려는 민족들의 요구는 거부하였다. 반대로 서구는 앞의 지역의 민족해방투쟁은 반대하면서 소련 지역의 민족들의 분리 독립에는 지지를 보냈다.

    국제연맹 창설과 몰락

    1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미국의 대통령 우드르 윌슨은 1918년 “14개조의 평화원칙 연설”에서 “모든 인민과 모든 민족에 대한 정의의 원칙, 그리고 이들이 강하든 약하든 서로 간에 자유와 안전을 누리면서 평등하게 살아갈 권리의 원칙”을 선언하고, “국제정의를 위한 체제를 수립함에 있어 이 원칙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체제는 결코 지속되지 못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1919년 유럽의 전승국들은 패전국 독일의 처리, 식민지의 재분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승국들은 파리강화회의를 열었고 이 회의에서 패전국 독일 경제에 치명적인 배상금을 물리는 방안과 함께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 탄생에 합의하고 그 규약에 서명했다. 프랑스 식민지의 지도자 호치민은 이 파리강화회의에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들이 프랑스의 베트남 점령에 개입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국제연맹 규약은 “집단안보(침략국에 대한 연맹회원국의 공동행동)와 국제분쟁의 중재, 무기감축, 개방외교정책”의 원칙과 함께 연합국이 인간적 노동조건, 여성과 어린이·청소년의 인신매매 금지, 질병의 예방과 통제 및 민족자결 등을 포함한 인도적 원칙과 인권원칙의 이행을 관장하도록 하는 내용을 규약에 포함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국제연맹이 주요 식민지배세력의 압력에 의해 연합국들에게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식민지를 위임통치령의 형태로 배분하는 체제를 구축하였다. 이에 대한 비판을 무마하기 위해 국제연맹규약은 “식민지배국들이 의무적으로 원주민의 정치발전, 양심과 종교의 자유, 공정한 법률, 노예나 무기 또는 알코올의 매매와 같은 행위의 금지를 보장하라고 촉구하는” 규정을 포함하고 있었지만 이는 본질을 가리기 위한 허울 좋은 명분 그 이상이 아니었다.

    연맹의 주요기관으로는 모든 회원국의 대표들로 구성되는 총회, 주요연합국의 상임대표로 이루어지는 위원회(총회에서 선출되는 비상임 이사국도 참석함), 사무총장이 책임자인 사무국(집행부)과 상설국제사법재판소를 두었다.

    그렇지만 미국 의회가 자국의 전쟁 선포 권한을 국제기구에 넘길 수 없다는 이유로 윌슨의 거듭되는 호소를 외면하고 국제연맹 규약이 포함된 베르사유 조약의 비준을 거부하게 된다. 이로써 1차 대전의 피해를 입지 않고 세계 강대국으로 부상했던 미국이 국제연맹에 불참하자 이 최초의 국제적인 기구는 크게 약화되었다. 국제연맹의 주된 목적이 제1차 세계대전 뒤에 맺어진 평화조약에 따른 세계질서를 유지하려는 것이었지만, 1930년대에 들어와 일본의 만주와 중국 침략,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점령, 히틀러의 베르사유 조약 거부 등을 막지 못해 권위를 잃게 되고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활동을 중단하고, 이후 국제적인 인권보장체계는 1946년 유엔의 창설 때까지 유보된다.

    국제노동기구(ILO)와 복지국가의 출현

    국제연맹의 부설기관으로 창설된 국제노동기구(ILO)는 국제연맹의 탄생보다 더 의미가 크다. 이 기구도 2차 대전으로 인해 기껏 마련한 국제노동 협약의 비준으로 나아가지 못했지만 2차 대전 이후 국제적인 노동기준이 된 ILO 조약들을 만들어 국제적인 이행을 강제하게 된다. 국제연맹의 회원국들이 비준한 새로운 노동헌장(ILO 헌장)은 1일·1주 최장 노동시간의 확립, 직정 생계급여의 제공, 질병 및 산업재해로부터의 보호, 어린이·청소년과 여성과 이주노동자의 보호, 결사의 자유를 촉구하였다. ILO 헌장에 흐르는 정신은 사회주의적이었지만, 고용주와 피고용자 사이의 협력은 ILO의 노사정 3자 구성 체제에 의해 보장되도록 했다.

    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에 세계는 대공황의 회오리에 휩싸였다. 대공황의 국면에서 유럽과 미국은 경제·사회적인 안전망을 구축하는 정책을 도입하였고, 노사정의 동맹이 이루어지면서 복지국가를 탄생시켰다. 복지국가의 구상은 파리코뮌을 경험하였던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공산주의자들의 호소를 잠재우기 위해 1883년 노동자의 의무적인 질병보험, 산업재해보험, 노령·장애 연금제도 등을 포함하는 사회입법을 제정토록 했던 것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그때 비스마르크는 대내적으로는 독일의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대외적인 팽창정책을 추진하고 있었고, 복지제도를 도입했던 그 시점은 바로 팽창정책이 가장 정점에 달했던 시기였다.

    대공황(1929-1939년)의 시기에 유럽의 국가들은 비스마르크의 정책을 이어받아 이를 확대하였다. 또 경제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던 기존의 자유주의적 경향을 철회하고 경제에 대한 적극적인 규제정책을 도입하게 된다. 유럽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철도, 해운, 방위산업이 정부의 관할 하에 놓여졌다. 대공황의 영향이 깊어지자 자연자원과 기타 생필품을 통제하고, 기초식품의 가격통제, 소비생활을 규제·배급하고, 금융시장을 감독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게 된다. 이와 함께 참정권과 더 많은 노동권을 요구하는 사회주의자들의 압력과 사회주의 소련의 눈부신 경제발전 등의 영향으로 유럽의 국가들은 더 많은 복지정책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국민총생산에서 복지예산의 비중은 더욱 높아졌다. 미국의 루즈벨트는 케인즈의 학설을 반영하여 일자리를 늘리고 구매력을 높이며 경제를 자극하기 위한 정부지출을 늘리는 뉴딜정책을 시행했으며, 이 모델은 2차 대전 이후 수십 년간 지속된다.

    '세계인권선언'의 탄생 전야

    대공황을 복지국가의 방식으로 극복하기 위한 유럽의 전승국들과는 달리 자본주의 후발국가였던 이탈리아와 일본, 1차 대전의 패전국 독일에서는 대공황기에 파시즘 정권이 등장하여 2차 대전을 향해 치달아갔다.

    최초의 현대적인 헌법을 만들었던 바이마르공화국을 붕괴시킨 히틀러는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와 함께 민족투쟁의 개념에 인종주의를 가미하여 대중적인 지지와 동원을 확보하고, 파시스트 권력을 완성한다. 독일의 나치는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유대인을 비롯한 집시족, 장애인, 동성애자, 여호와의 증인 신도, 사회민주주의자, 공산주의자를 포함해 독일 민족의 우월성과 독일 민족의 세계제패의 꿈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되는 모든 사람들을 박해했다.

    지금은 대체로 유대인만이 홀로코스트(인종절멸)의 대상이 된 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나치의 학살 대상은 광범위했던 것이다(유대인의 학살이 강조되는 것은 그 수가 가장 많았다는 점 외에 세계경제와 정치에 대한 유대인의 영향력이 그만큼 절대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학살은 일본에 의한 남경 대학살(1937) 등 아시아 민족에 대한 전쟁동원과 학살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앞서 보았듯이 국제연맹은 이들 나라의 전쟁 책동을 막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국의 정치 상황만을 고려하여 파시즘의 도래를 묵인하거나 적극적으로 소련과 같이 불가침협약을 서둘러 맺는 방식을 택했다. 그것은 그만큼 자본주의 경제가 불러온 대공황의 위력 앞에 각국의 경제가 버틸 힘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세계는 파시즘 국가들의 예고된 전쟁 앞에서 무기력했고, 최초의 평화보장 체계로 설계되었던 국제연맹은 파시즘 국가들의 탱크 앞에서 스스로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인류는 5천만 명이라는 엄청난 희생을 경험하고, 그런 뒤에야 주권국가의 국경을 넘는 국제적인 인권보장체계에 대해 절실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며, 이런 배경 아래 유엔과 세계인권선언이 탄생하게 된다. 다음호에는 유엔의 인권보장체계의 발전과정을 훑어본다.


    유엔을 통한 국제인권조약의 탄생과정
    인권의 역사 9 | 세계인권선언에서 냉전 시기까지


    월간『사람』제9호 | 2006년 3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사회는 인권보장체계를 본격적으로 구축하고 나섰다. 유엔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의 인권보장체계 구축은 인류가 이룬 그 전까지의 인권의 역사보다 눈부신 것이었다. 각종 조약이 탄생하고, 유엔 인권위원회를 비롯해 대륙별 기구들이 생겨났고, 인권 NGO들이 탄생했다. 촘촘히 짜진 국제인권체계와 조약들만 보면 세계는 인권과 평화의 세상이 되었어야 한다. 그렇지만 어디 그런가. 세계인권선언의 이상조차 아직도 꿈같이만 느껴지는 현실, 이제 인권은 국가들의 외교적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번 호에서는 국제인권장전이라는 세계인권선언과 양대 인권조약을 비롯한 국제인권조약의 탄생을 살펴본다. 이번에는 주로 냉전 시기까지를 다룬다.

    유엔, 세계인권선언을 채택하다

    1945년 창설된 유엔은 유엔헌장 제55조에서 “모든 사람을 위한 인권과 기본적인 자유에 대한 보편적인 존중과 준수(제55조)”라는 목적을 명기하고, 제56조에서 그 성취를 위한 행동 서약을 담았다. 이에 따라 1946년 1월에 열린 제1차 유엔총회는 유엔인권위원회를 설치했고, 1947년 유엔인권위원회는 지역적, 문화적 안배를 고려하여 8개국으로 구성된 유엔의 인권헌장 ‘기초위원회’를 구성하여 작업에 들어갔다. 이 기초위원회에서는 인권에 관한 구속력 있는 조약을 만들 것인가, 인권의 일반적 원칙이나 기준을 담은 선언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둘러싸고 대립이 발생했다. 기초위원회는 두 가지 형태의 문서를 모두 준비하였으나, 유엔 총회에는 유엔인권위원회가 검토한 ‘국제인권장전’(International Bill of Human Rights)이란 이름이 붙은 선언을 1948년 제3차 유엔총회에 붙여서 찬성 48, 반대 0, 기권 8로 채택했다.

    1948년 9월에서 12월까지 열린 제3차 유엔총회는 기초위원회를 통해 인권위원회가 작성한 초안을 치밀하게 검토했다. 무려 1천4백회의 투표를 통해서 이 선언의 초안이 검토되었다는 것만 해도 이 선언의 채택 과정이 얼마나 고된 타협의 과정이었는지, 이 선언의 채택에 당시의 유엔 회원국들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2차 대전의 참상을 겪은 인류가 “다시는 이런 일이 없기를!” 바라는 외면할 수 없는 염원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기에 세계인권선언은 국제사회에서 유례없는 성공한 권리장전으로 인정받는다.

    세계인권선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 이하 선언)은 내용상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선언의 정신을 설명하는 전문(前文), 다른 조항들의 대전제인 1·2조, 시민·정치적 권리(자유권)를 다룬 3-21조,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사회권)를 다룬 22-27조, 모든 권리의 향유에 관한 일반규정을 정리한 28-30조다.

    선언의 전문은 긴 하나의 문장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내용은 인권의 개념과 가치, 인권의 목표, 인권 실현의 방법, 인권의 국제적 보장, 회원국의 의무 등 5개의 문단으로 나누어 읽을 수 있다. 자연법사상에 근거하여 인권을 인간의 타고난 존엄성과 그 존엄성에서 기원하는 자유와 평등으로 규정하고, 이는 “양도할 수 없고, 시효로 소멸되지 않는, 법령으로 움직일 수 없는, 불가침의, 절대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이에 따라 선언은 인권을 국가 권력에 우선하는 것, 폐기할 수 없는 것으로 분명히 못 박고 있다. 전문은 2차 대전의 참화를 상기하고 인류의 평화를 위협한 전체주의에 대해 경계하면서 또한 “사람들이 폭정과 억압에 대항하는 마지막 수단으로서 반란에 호소”하지 않도록 법의 지배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인권의 가치를 존중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곧 ‘전 세계의 자유와 정의와 평화의 기초’라고 선언하고 있다.

    사회주의 국가들이 기권한 이유

    세계인권선언은 이후 유엔의 인권관계 조약들의 뿌리가 되었고, 2차 대전 이후에 탄생하는 독립 국가들의 헌법에 반영되었으며, 인권과 관련해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가장 권위 있는 문서로 인정받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인류는 선언이 채택된 12월 10일을 ‘인권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그렇다고 선언이 완전무결할 수는 없다. 여기서 이 선언의 구체적인 내용을 일일이 살펴볼 겨를은 없다. 다만 이 선언의 한계로 지적되는 점들에 대해서, 또 당시 사회주의 국가들이 왜 이 선언 채택에 기권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선언의 대표적인 한계로 지적되는 것은 저항권이 개별 조항이 아니라 전문에 삽입되어 소극적으로 보장하는 데 그친 점, 자유권 조항이 19개조인데 비해서 사회권 조항은 6개 조항에 불과하여 서구의 자유주의 인권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 파시즘의 반대와 전쟁 책임에 대한 처벌의 명문화에 실패했다는 점 등이 꼽히고 있다. 또 민족자결권을 명문화하는 데에도 소극적이었고, 이후의 인권조약에서는 사라지는 재산권 조항(제17조)이 들어 있는 것도 한계로 지목된다. 물론 전체적으로는 법적인 구속력을 갖춘 조약화에 실패하고, 단지 선언으로 한정되었으며, 주권을 가진 국가의 인권침해에는 무력하다는 점도 빠지지 않고 지적되는 사항들이다.

    구 소련을 비롯한 6개 나라의 사회주의 국가들은 선언의 채택 과정에서 시민·정치적 권리에 한정하려는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에 맞서서 사회보장의 권리, 노동에 관한 권리, 정기적인 유급휴가를 포함한 휴식과 여가의 권리, 충분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 등 경제·사회·문화적 권리가 선언에 포함되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그들은 세계인권선언의 의의를 인정하는 속에서도, 여전히 불충분하다는 판단에 따라 선언을 채택하는 투표에서 기권했다. 이들이 기권표를 행사한 이유로는 선언에 파시즘 반대, 권리보장의 물질적 수단, 국가주권의 보장, 거리에서의 시위의 자유 보장, 전쟁목적의 과학적 연구 금지, 소수자의 권리 등이 명문화되거나 보장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또 선언이 개인 중심의 자유주의 인권 목록은 포함하면서 집단적 제 권리와 개인의 공동체에 대한 의무는 명기되지 않았으며, 보다 궁극적으로는 사회적인 제 권리는 자본주의 체제와는 양립할 수 없다는 점 때문이라고 한다. 이들 사회주의 국가들이 주장하던 권리들은 이후의 제3세계가 유엔에서 수의 힘을 과시하면서 하나 둘 인권조약으로 성립될 것들이고, 이미 냉전이 시작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후의 인권논쟁이 체제 논쟁으로 전화될 단초를 보이는 것이었다.

    냉전, 인권의 발을 묶다

    평화와 인권이라는 인류의 염원을 안고 출범한 유엔의 정신은 곧 동서 양 진영으로 나뉜 냉전이라는 국제정치에 의해 훼손되었다. 유엔에서 국제 인권장전을 만드는 작업이 1960년대까지 늦춰진 데는 유엔을 자신들의 체제 선전장으로 인식하고 상대방을 공격하는 외교의 장으로 활용한 미국과 소련 양 강대국의 이해관계 때문이기도 했다.

    1950년대를 경과하고, 1960년대를 거치면서 소련의 스탈린의 사망과 흐루시초프의 등장, 미국의 베트남 전쟁 패배를 거치면서 동서 양 진영에서 평화공존의 입장이 대세로 될 때까지 세계는 극단적인 이념의 대립을 거쳤다. 냉전 시대에 세계대전은 없었지만 한국전쟁, 베트남전쟁과 같은 국지전은 계속 되었다. 2차 대전의 참화를 겪은 인류였지만 냉전의 주역들이 개입된 이들 전쟁에서는 이전까지의 전쟁보다도 더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고, 더 많은 폭탄이 투하되었다. 가공할 핵무기와 군비를 축적한 그 공포 위에서 제한적인 평화가 유지되었을 뿐이다. 미국과 소련은 정의와 인권은 뒷전으로 미뤄놓고 오로지 자신들의 세력 확장에만 열을 올렸다. 사회주의를 탄압한 정권이라고 해도 소련의 편이면 그 정권을 소련이 지지했고, 미국은 학살과 인권침해를 자행하는 독재정권을 세계 곳곳에서 지원했다.

    냉전 체제는 미국과 소련, 그리고 이들 강대국과 연결된 많은 나라들의 국내 인권상황도 악화시켰다. 늘 체제를 위협하는 가상의 적의 침략에 대비하여 국가안보를 강조하고, 그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법의 이름으로 심판대에 올려졌다. 이성이 마비되고, 인류가 쌓아놓은 인권의 가치가 무너져 내렸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는 어느 사상을 지지하느냐로 간단하게 정리되어 버렸고, 표현의 자유는 국가안보의 이름으로 제한되었다. 동서 양 진영의 대립은 이와 같이 억압적인 정치가 구현되는데 큰 역할을 하면서 세계를 경직되게 만들었지만, 이런 시민·정치적 권리의 억압 위에서 두 진영은 경쟁적으로 경제성장을 추구하여 세계는 유례없는 황금기를 누릴 수 있었다.

    그렇지만 세계가 미소 양 강대국이 규정하는 냉전의 굴레 안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50, 60년대에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을 통해 신생독립국들이 대거 탄생했으며, 이들 국가들 중에서는 미국과 소련의 영향권으로부터 독립적인 목소리를 내려는 국가들도 있었다. 이들에 의해서 제3세계의 그룹이 형성되었고, 이들이 유엔에 대거 가입하면서 유엔에서 수적인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들 국가들은 인종주의 반대, 탈식민화, 자기결정권과 같은 새로운 인권의 의제들을 포함시키려 했다.

    전쟁범죄를 방지하라

    보통 우리가 국제인권장전이라고 하면 세계인권선언과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조약(사회권 조약), 시민·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조약(자유권 조약)을 한 묶음으로 엮어서 말한다.

    앞의 선언과 두 개의 조약이 성립되기 이전에 유엔이 가장 먼저 채택한 국제인권조약은 제노사이드 조약이었다. 이 조약은 세계인권선언이 채택되기 하루 전인 1948년 12월 9일 유엔에서 채택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도 ‘인종청소’를 의미하는 홀로코스트, 즉 제노사이드(집단학살)는 번번이 일어났다.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에 대한 1945, 46년의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일본 제국주의의 아시아에서의 학살을 다룬 동경 전범재판이 진행되었다. 이들 전범재판을 통해서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고, 이들의 결과가 ‘제노사이드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조약’(1948년 채택, 1951년 발효)으로 수렴되었다. 이 조약에는 “국제조약과 합의를 위반하여 침략전쟁을 모의·개시·개전한 ‘반평화 범죄’, 절멸, 강제이주, 제노사이드 등의 ‘반인도적 범죄’, 전쟁에 관한 국제법을 위반한 ‘전범죄’, 그리고 위 3개 조항의 범죄를 ‘모의·음모한 죄’” 등이 포함되었다.

    그 다음에 유엔에서 채택된 국제인권조약은 ‘모든 형태의 인종차별 철폐에 관한 조약’(인종차별철폐조약, 1965년 채택, 1969년 발효)이었다. 그런 다음에 위에서 말한 양대 조약이 탄생하게 되며, 다른 조약들은 그 뒤 1970년대 이후에 성립된다.

    여기서 모든 것을 다 살펴 볼 수는 없고, 다만 사회권 조약과 자유권 조약의 내용에 대해서만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사회권, 자유권 조약의 성립

    두 개의 인권조약은 모두 1966년에 유엔 총회에서 채택되고, 1977년에 발효되었다. 세계인권선언이 보편적 인권의 개념과 목록을 정의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들 양대 조약은 인권의 국제적 보호를 위한 법적 구속력과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 조약들 모두 전문에서 자유권과 사회권의 상호의존과 불가분성을 규정하고 있으며, 또 각 규약의 제1조에서 각각 민족자결권의 보장을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국제인권조약을 두 개로 구성한 것에 대한 해명이기도 하고, 1950년대 이후 제3세계의 발언력이 강화된 현실의 반영이기도 하다. 또 두 개의 조약 모두 선언의 권리들을 구체적으로 규정하면서도 피난처를 구할 권리와 재산권 조항을 제외하고 있다.

    특히 재산권 조항이 삭제된 것은 신생 독립국에서 식민잔재 청산 과정에 제기된, 외국인 재산의 국유화 문제와 관련된 논의가 합의점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합의되지 못했다고 하나 지금까지 사유재산의 권리를 보장한 위에서 세워졌던 인권의 체계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조약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지루한 논쟁 끝에 1951년 유엔 총회는 두 개의 조약으로 제정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두 조약은 내용에서나 형식에서도 차이를 보여준다. 먼저 권리를 규정하는 방식에서 자유권조약은 “개인에게 ‘∼한 권리가 있다’(shall have the right to…)는 형식으로 권리를 규정한 반면, 경제·사회·문화적 권리규약은 ‘국가는 ∼한 권리를 인정(확인)한다’(The State Parties recognize the right…)는 형식으로 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다음에 눈에 띄는 것은 “사회권조약이 규정한 국가의 의무는 가용자원의 한계라는 한계를 인정하는 반면, 자유권조약은 이러한 규정이 없다.”는 점이다. 이어서 “사회권조약은 점진적 실현의 의무를 부과하고 있는 반면, 자유권조약은 즉각적 실현의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대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들 조약들에는 조약 당사국에 대한 의무를 부여하고, 이 의무의 이행을 감시하기 위한 이행기구로 자유권위원회(혹은 인권이사회), 사회권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당사국은 5년에 한번 꼴로 보고서를 작성하여 조약의 이행과정에 대해 심의를 받도록 하고 있다. 자유권조약에는 두 개의 선택의정서(개인통보절차, 사형제폐지)가 부속문서로 채택되어 있지만, 사회권조약의 선택의정서 채택은 아직 결실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이제 서서히 세계는 냉전의 틀을 벗어나 평화공존을 모색하게 되지만, 곧 지구화시대를 맞아 새로운 인권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다음 호는 이 연재의 마지막으로 1968년 혁명이 인권의 역사에 던진 질문과 지구화 시대의 인권문제를 짚어보도록 한다.


    지구화 시대에서 인권, 기로에 서다.
    인권의 역사 10 | 1968년부터 현재까지


    월간『사람』제10호 | 2006년 4월


    창간호에 시작한 ‘인권의 역사’ 연재를 이번 호로 마친다. 인권의 탄생과 그 성장, 발전과정이란 방대한 역사를 10회에 걸쳐서 정리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인간의 자유·평등·연대를 향한 투쟁의 흐름을 파악하고자 했으나 한계와 부족함을 남기고 끝내야 할 것 같다. 더욱이 이번 마지막 회는 필자의 신체가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의 기술이라서 그 정리가 더욱 어렵다. 어쨌건 이번 호로 ‘인권의 역사’ 연재를 많은 아쉬움을 가진 채 마친다. 이번 호에서는 1968년 혁명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흐름을 짚어보고, 지구화 시대의 당면한 인권 문제를 개략적으로 살펴본다.

    1968년, "정체성의 정치" 시작

    1968년에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전지구적인 투쟁이 지구를 휩쓸었다. 베트남 구정공세로 시작된 1968년 미국은 패배가 확실해졌고, 이에 따라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는 베트남 반전운동이 뜨겁게 진행되었다. 프랑스 파리에서는 학생들의 시위가 시작되었고, 이 학생들의 시위도 세계로 영향을 미쳤다. 파리 학생시위에 노동계의 파업이 잇따랐고, 곧 이어 유럽의 노동계급들이 시위에 나섰다. 이런 학생들의 시위는 스튜던트 파워(student power)라는 이름으로 불려졌다.

    멕시코에서는 올림픽 반대투쟁이 전개되었고, 멕시코 정부는 학생들의 점거농성을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피로 얼룩진 올림픽의 역사를 낳았다. 미국에서는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로버트 케네디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암살되었고, 체코의 민주화운동은 소련에 의해 진압되었다.

    ‘68혁명’으로 훗날 이름 붙여진 이 해의 전지구적 투쟁은 미국식의 자본주의와 소련식의 탄압체제가 아닌, 이 양자를 탈피한 운동으로 나아가는 것 같았고 이로부터 신사회운동이 탄생되었다. 사회주의 운동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것으로 보였다. 학생운동은 전체적으로 보아 적색 정치보다는 녹색 정치, 전투적 혁명운동보다는 반핵과 비폭력 평화운동을 더욱 선호하는 것으로 보였지만, 베트남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는 민족해방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된 해이기도 했다.

    프랑스의 알제리 반전운동, 미국의 반전운동이나 민권운동과 같은 집단적인 사회운동이 퇴조하는 가운데 ‘정체성의 정치’(identity politics)의 시대가 이때 열렸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다. 사회적 소수자들인 흑인, 여성, 소수인종, 동성애자들이 운동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거대담론에 가려져 있던 이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에 기초하여 기존의 질서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불가능한 것을 꿈꾸자!”는 구호에서 드러나듯이 당시에는 외면당했던 대부분의 주장들이 제기된 것이었으며, 베트남에서 베트남 민족이 미국을 축출하고 민족해방의 목적을 이루었듯이 전 세계에서 68혁명의 주장은 차츰 승인되어갈 가치들이었다. 이로부터 여성주의적 시각이 폭넓은 범위에서 인류의 가치관에 영향을 미쳤으며, 이주노동의 보편화 현상으로 인해 이주노동자들의 권리를 비롯한 선주민의 권리에 대해 세계가 논의하기 시작했고, 장애인들이 세계적인 투쟁을 전개하여 국제적인 장애인권리조약의 성립을 눈앞에 보고 있다. 또 어린이·청소년의 권리가 여성의 권리에 이어서 중요한 영역으로 인식되었고, 현재까지도 현대판 노예로 인식되는 부채형 성매매에 동원되는 아시아 등 빈곤국의 소녀 성매매 문제, 내전에 동원되는 소년·소녀병사의 문제, 대인지뢰문제들이 국제적인 인권이슈로 등장했다.

    1968년 이후 세계는 이들 소수자들의 인권을 증진하기 위해 각종 권리선언과 조약을 제정하였고, 이를 각국에 권고하였지만 현실에서는 여전히 이들 소수자들의 인권이 침해되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이런 데에는 지구화에 따른 인권 보장체계의 붕괴가 크게 작용했다.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지구화 시대

    1970년대의 오일 쇼크와 인플레, 경제침체로 영국과 미국에서는 자유주의 정권이 퇴조하고,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로 대표되는 보수주의가 등장했다. 이 보수주의는 노동조합과 복지국가에 대한 공세가 주된 목표였다.

    이후 신자유주의가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면서 소련의 체제를 위협했다. 소련은 미국과의 경쟁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웠고, 중앙집권형 경제의 한계와 민주주의 취약성이 노정되면서 급진적인 정치 경제 개혁이 고르바초프에 의해 시행되었다. 글라스노스트(개방), 페레스트로이카(재편) 등 고르바초프의 개혁 정책은 이후 소련 사회에서 만연했던 대중적 불만이 터져 나오는 상황으로 이어졌고, 개혁의 주체였던 고르바초프는 곧 실각을 맞고 소련은 러시아공화국과 각각의 민족들의 독립된 국가들로 분리된다. 이런 상황들은 동구권도 마찬가지여서 서구의 자유주의적 인권운동가들은 동구권의 취약성을 간파하고 이에 대한 정치개혁을 적극적으로 제기한다. 폴란드에서는 사회주의자, 민주주의자, 민족주의자, 카톨릭 교회가 연합하였고 이 운동은 연대자유노조로 결집되었으며, 그 지도자는 바웬사였다.

    이와 같이 사회주의권의 동요는 1989년 6월 4일 중국의 천안문 유혈진압을 낳기도 했지만, 그 해 11월 베를린 장벽이 붕괴됨으로써 냉전이 종식으로 귀결되었다. 냉전의 종식은 공산주의에 대한 자유민주주의의 승리, 자본주의의 승리로 인식되었고, 이로써 지구화는 예전의 사회주의권까지 확대되어 전 지구적 범위로 확장되었다. 그 이후의 인권운동은 지구화라는 괴물에 맞서 인권 역사를 통해 구축한 인권보장체계를 지키려는 힘겨운 노력을 시작하게 된다.

    전후 자본주의 황금기를 낳은 브레튼우즈 체계는 세계적인 규모의 금융자본을 낳았고, 이들에 의해 기존 자본주의 체제는 무력화되기에 이른다. 이제 세계는 금융자본의 무한 이익을 가능하게 하는 WTO 체제를 구성하기 위한 노력으로 이어졌고, WTO 협상 때나 IMF, G8 회의가 열릴 때마다 대규모의 시위대는 이들을 공격했다. 1994년 미국, 캐나다, 멕시코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발효되는 시점에 맞추어 멕시코 치아파스 지역에서는 사파티스타가 봉기했다.

    저개발국의 발전을 촉진하고, 환경을 보호하고, 여성과 아동,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할 국제적인 체계를 모색하는 일은 급속한 지구화에 따라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다. 이는 초국적이고 전 지구적인 인권운동을 요구하는 것이었고, 이런 반세계화 투쟁은 시간이 지날수록 1968년의 저항을 구체화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지구화 시대의 대표적인 인권문제들

    지구화 상황이 진행되면서 한편에서는 북부 세르비아, 중유럽과 동유럽, 아프리카의 소말리아, 르완다, 시레라리온, 남아시아의 파키스탄과 인도 등지에서 내전이 진행되고 처참한 인종청소가 진행되어 무수한 인명이 희생되기도 했다.

    미국의 패권주의를 중심으로 지구화의 폐해가 극에 달하는 상황은 극단적인 근본주의를 이슬람 지역에 낳았으며, 급기야는 2001년 9월 11일 미국에서 대형 테러를 불러오게 된다.

    지구화는 “시장경제의 확장, 새로운 생산형태, 놀라운 정보기술의 발전 등 복합적인 특징을 지닌 다양한 국제적 과정들의 총합”이다. 지구화는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끊임없이 추구함에 따라 노동권을 인간의 핵심적인 인권으로 자리 매김하기 위한 투쟁을 촉발하고 있다. 빈곤층이 확대되는 빈국(貧國)들에서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권리로 요구하는 투쟁을 낳고 있고, 전지구적 환경 문제가 악화되는 곳곳에서는 생태운동이 발전하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인권침해가 이주자와 난민을 위한 법제화 요구로 이어지고 있으며, 민족주의자와 비서구 문화권 옹호자들의 저항을 격화시키고 있다.

    이런 지구화의 부정적인 결과는 다음과 같은 지표들이 단적으로 보여준다. 극빈국들에서 상대적으로나 절대적으로나 빈곤층이 급증하고 있다. 약 12억 명이 하루 1달러 미만, 28억 명이 하루 2 달러 미만으로 생활하고 있으며, 아프리카에서는 전 인구의 46%가 하루 1 달러 미만으로 생활한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아프리카에서의 해외 직접투자는 급감했는데, 2000년 아프리카에 투자된 총투자액은 91억 달러로 전 세계 투자액의 10%에도 못 미친다. 라틴 아메리카와 카리브해 지역에서도 빈곤층이 확대되어 1990년대에는 40%까지 육박하기에 이른다는 한 통계는 이제는 새삼스런 일이 되지 못한다.

    개발도상국의 경제정책은 계속해서 저항운동을 불러온다. 저항하는 민중들은 지속 가능하고 통합적이며 독립적인 경제발전 정책이 정치적·사회적 권리와 일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도의 경제학자 아마티르 센(Amatya Sen)은 “경제발전 프로그램이 주민들에게 ‘피와 땀과 눈물’의 희생을 강요해서는 안 되며, 경제발전의 핵심적 가치로서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는 보다 온건한 접근법이 채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입장은 환경과 발전에 관한 리우데자네이루 선언(1992) 제1조에서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관심의 핵심에 인간이 있다. 인간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건강하고 생산적인 삶을 살아갈 권리가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인권의 보장체계를 전면 부정하는 빈곤문제를 감소시키는 일은 도덕적인 문제로서가 아니라 이제는 평화와 안보에 반드시 필요한 조건으로 인정되기에 이르며, 미국이 주도하는 WTO 체제에 편입되기를 거부하는 소수의 국가들을 제외하고는 이런 상황들을 공통적으로 맞이하고 있다. 건강한 환경에 대한 권리를 보면 미국과 여타 OECD 국가들에게 전지구적 환경공해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이 있는데, 타 지역에 비해 1인당 환경오염물 배출량이 평균 4배에 이르기 때문이다. 환경오염물 중에서 이산화탄소의 배출량은 교토의정서에 따라 유럽연합 8%, 미국 7%, 일본 6% 등 38개국이 평균 5.2% 감축을 실행한다고 합의하였지만 미국은 이를 거부했다.

    1945년에서 1995년 사이 1억 명 이상의 전후 이주자들이 OECD 국가들에 유입되었다. 1990년대에 미국에는 매년 150만 명이 이주하였다. 9.11 테러 이후 미국과 유럽에서는 반이민 정서가 팽배해졌고, 이들을 공격하는 활동이 극우집단들에 의해서 자행되기도 했다. 외국인에 대한 가혹한 처우는 정부기구들과 비정부기구들이 이주자들에 대한 호의적인 국제법을 제정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이에 따라 2000년 12월 18일 유엔은 이 날을 세계 이주(노동자)자의 날로 선포하였고, 1990년에 유엔 총회에서 채택된 이주노동자권리협약이 발효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지구화의 상황에서 조직화된 노동은 분열하는데, 국제적으로는 부국의 노동자와 빈국의 노동자 간의 분열, 국내적으로는 노조 가입 노동자와 노조 미가입 노동자 간 분열이라는 노동력의 분절화를 낳는다. 이에 따라 노동운동과 연대하면서 이런 지구화 현상을 극복하기 위한 전투적 인권운동의 연대가 고민되기에 이른다.

    지구화 시대에도 발전하는 제3세대 인권

    한편 연대성(solidarity)을 강조하는 제3세대 인권에 대한 논의는 지구화 시대를 맞아 그 추진력은 많이 떨어졌지만 여전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주제다. 자유, 평등을 각각 추구하는 제1, 2세대 인권이 국가와 사회에 대한 것이라면 3세대 인권은 국가간 경계를 초월하는 국제적 권리로 인정된다. 물론 제3세대 인권도 각 개인이 갖는 권리이기는 하지만 각자가 국경선을 초월하여 다른 모든 사람과 함께 협력할 때에만 확보할 수 있는 인권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권리를 “인민의 권리”로 부르기도 한다. 제3세대 인권은 사회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전지구적인 집단행동의 이상을 강조한다. 즉 “연대하는 사회현상에 대한 모든 행위자(국가, 국제기구, 개인)들의 조화로운 노력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것이다. 그래서 제3세대 인권의 주체는 지역사회, 민족 또는 국가 등의 집단으로 나타나고 국제적 차원에서 논의된다. 이 제3세대의 인권의 내용으로는 자결권, 발전권, 인류 공동 유산으로부터 이익을 보고 그에 참여할 권리, 환경권, 평화권, 인도적 구조를 받을 권리 등이 포함된다.

    이제 21세기 초두에 서 있는 우리는 지구화 시대를 맞아 인권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고민하고 있다. 지금까지 세계적 차원에서 발전되어온 국제인권레짐도 미국의 패권주의와 무장된 세계화인 지구화의 공격 앞에 무력화되고 있는 반면, 이전의 진보운동을 선도하던 운동들이 분절화하는 현상을 세계적 차원에서 공통적으로 보고 있다. 빈곤 문제에서 대표적으로 보았듯이 지구화 시대에서는 다국적기업, 국제금융기구의 행동들을 어떻게 통제할 것이며,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경향에 맞서서 우리는 어떻게 인권적 가치를 증진, 발전시킬 것인가를 고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고민과 모색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수백 년 간의 인류의 투쟁을 통해 이룩해온 인권의 역사는 여전히 자유와 평등을 향한 연대 투쟁만이 지금 이 인권의 위기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는 점을 역설해준다. 인권은 지금까지 그랬듯이 앞으로도 진보를 향한 인류의 투쟁의 과정에서 진보할 것이라 믿는다. 인권의 보편성마저도 소수의 특권에 맞선 민중들의 투쟁을 통해 획득되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제 누구의 입장에서 인권을 제기할 것인가를 논의할 때라는 말로 이 연재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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