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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 조선시대의 재산상속
    기초법학/법제사 2007. 7. 18. 04:43



    조선시대의 재산상속



    박병호,『한국의 법』,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4, 142~146쪽.



    상속은, 소유권의 어머니라고 일컫는 바와 같이 사유재산 제도와 그 기원을 같이 한다. 우리나라의 재산상속 제도는 고려시대부터 그 윤곽이 비교적 명확히 나타나는데, 삼국시대까지에도 사유재산 제도를 기초로 한 일정한 상속관습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자녀균분상속이 행하여졌는데, 토지의 경우에 있어서도 균분상속인지는 아직 충분히 밝혀지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는 조선시대의 <경국대전>에 규정된 상속법제를 주로 설명하기로 한다.

    (1) 상속의 개념

    유산은 조상으로부터 전해내려 오는 것으로서 조업(祖業)이라고도 한다. 가족 공산 제도가 아니기 때문에, 부의 재산과 모의 재산은 명확히 단독 소유의 재산으로 관념되어 있어, 이것이 전해 내려오는 조업과 합하여 다시 자녀에게 이어져 내려가는 재산으로서의 조업의 구성 부분이 되었다. 그러므로 유산의 구성 부분은 조업과 부의 재산 그리고 모의 재산이며, 이것을 통틀어서 조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상속되어야 할 유산은 반드시 그 소유자별로 표시되며, 부모 또는 부처를 기준으로 해서 생각하였다. 유산을 우리의 고유한 용어로는 금(衿) 또는 '깃'이라고 표현했는데, 옷깃은 옷의 가장 중심되는 중요한 부분이며, 부모의 옷깃을 나누어 가진다는 어떤 관습 혹은 관념에서 나온 말로 추측된다. 상속이라는 특별한 용어는 없으며, 부모 쪽에서 표현하여 나누어 준다[分給 또는 分與, 혹은 與]고 하고, 자녀 쪽에서는 나누어 가진다[分執], 깃을 나눈다[分衿] 또는 깃을 얻는다[衿得]라고 표현하여 상속받은 몫을 깃분[衿分]이라고 하였다.

    (2) 재산 상속의 종류

    재산상속은 철저한 법정상속(法定相續)으로 거의 자유 재량이 인정되지 않았다. 그리고 임의상속이나 유언상속이 인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순위나 상속분에 관한 규정을 심히 어길 수 없었다. 또 상속은 생전에 유산을 나누어 주는 생전상속도 할 수 있었으나,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사망으로 인하여 상속이 개시되는 사인상속(死因相續)이 이루어졌다. 사인상속의 경우에는 상속인들이 3년상을 마친 뒤에 비로소 협의에 의해 유산을 분할했는데, 이 협의를 화회(和會)라고 하였다.

    (3) 상속인의 순위와 범위

    제1순위는, 자녀로서 적출자·서자·수양자·시양자이고, 아들과 딸을 포함하며 딸은 출가 여부로 차별받지 않았다. 출가한 딸이 사망한 경우에는 그 자녀가 어머니의 순위와 지위를 대습(代襲) 상속했다. 제2순위는 자녀가 없는 경우로서 생존한 배우자가 상속하는데, 처는 재가하지 않고 수절할 것을 조건으로 종신간 상속했다. 유처가 만약 양자를 들일 경우에는, 그 양자에게 상속되었다. 제3순위로는 생존한 배우자가 양자를 들이지 않고 사망하거나 개가하는 경우에, 죽은 배우자의 본족이 상속했다. 본족은, 죽은 사람의 4촌 이내의 자로서 사손(使孫)이라고도 하며, 동생(2촌)이 없으면 3촌, 3촌이 없으면 4촌의 순위로 상속했다.

    만일 동생이 사망하여 그에게 자녀(3촌)나 손자녀(4촌)가 있으면 이들이 대습상속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사망한 동생에게 자손이 없으면 백숙부나 고모(3촌)가 상속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4촌 이내의 친족이 없으면, 그 유산은 국가에 귀속되었다. 그러나 상속인 없는 유산은 거의 없었고 대개는 양자를 들이었으며, 양자를 들이지 않는 경우에는, 근친이나 혹은 동리(洞里)에 증여하여, 사후 제사를 위탁하였다. 상속인의 범위를 4촌으로 하는 한정한 것은, 4촌까지를 근친으로 생각해 왔으며, 유산을 조업으로 보고 조부를 공동선조로 하는 자손은 4촌까지라는 관념에서 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들뿐만 아니라, 딸도 상속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안남(安南)과 함께 우리 상속법의 특색이며, 중국법의 영향 아래에서도 고유성을 유지한 것이었다.

    (4) 상속분

    유산은, 적출자녀 사이에서는 남녀의 차별이나 출가 여부의 구별 없이 균분 상속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다만 제사 상속인인 장남은, 고유의 상속분의 2할을 더 가급(加給)하고, 동시에 가묘(家廟)가 있는 가옥(부모가 거주해 온 가옥)을 상속했다. 2할을 더 주는 것은 부모의 제사를 위한 기본 재산이며, 이것을 봉사조(奉祀條)라고 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에, 이와 같은 균분 상속 제도가 20세기 초까지 존속한 국가는 문명국가 중에서 안남(安南, 越南)과 우리나라뿐이며, 안남에서는 장남에게 주는 봉사조가 전 유산의 20분의 1로서 우리나라와 거의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남송(南宋) 시대에 딸에게 아들의 반을 준 때가 있었으나 가산은 딸을 제외한 아들 사이에만 균등하게 분배되었고, 일본에서는 구민법이 실시될 때까지 장자 독점 상속제가 실행되었다.

    이 균분 상속은 법률상 철저한 보장을 받고 있었다. 만약 유산을 균분하지 않고 독점하는 경우에는 5년 동안의 소송기한의 제한 없이 언제까지나 소송으로 다툴 수 있도록 했으며, 이러한 소송이 제기되어 불균분이 확인되면, 관에서 균분해 주었다[官作財主]. 중기까지에는 상속 재산의 불균분을 둘러싼 소송이 빈번하였다.

    이와 같은 균분법은 대체로 18세기부터 현저한 차별이 생기게 되었다. 즉 장자와 중자, 또는 아들과 딸 사이에 차별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도 심한 차별은 아니었다.

    장자와 중자의 차별이 심하기는 했으나, 그것도 고유의 상속분을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봉사조를 많이 배정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장자를 특대하는 편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이것은 종법적 가족 제도가 자리 잡게 된 때문이며, 이때부터는 균분의식도 변하여, 전 시대에는 불균분한 경우에는 소송으로 다투었으나, 이제는 그것을 묵인 또는 긍정하게 되어 철저한 균분의식은 차차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다.

    그러나 어떻든 왕조 말에 이르기까지 장자를 제외하고는 심한 차별을 하지 않았다. 이러한 균분상속 제도의 붕괴과정은 바로 종법적 가족 제도의 토착화 과정인 것이다.

    적출 자녀 이외의 자녀, 즉 첩의 자녀나 수양 자녀 및 시양 자녀는 적출 자녀에 비하여 심한 차별을 받았었다. 첩의 자녀도 양첩 자녀와 천첩 자녀 사이에 차별을 두었다. 적출 자녀와 이들이 공동 상속할 경우에, 적출 자녀와 양첩 자녀와의 비율은 6 대 1, 천첩 자녀와의 비율은 9 대 1이었으며, 양첩 자녀와 수양 자녀, 천첩 자녀와 시양 자녀는 같이 대우했다.

    특기할 것은 혈연이 통하지 않는 모자 사이에는 상속이 제한되었다. 즉, 적모의 재산에 대한 첩 자녀의 상속분은 적모에게 자녀가 없는 경우에는 양첩 자녀는 7분의 1을, 천첩 자녀는 10분의 1을, 승중하는 첩 자녀는 약간을 가급하고, 나머지 재산은 적모의 본족(本族)에게 귀속되었다.

    또 적모에게 딸만 있는 경우에는, 승중 첩자만이 봉사조로 7분의 1을 상속할 수 있을 뿐이었다. 또 계모의 재산에 대한 의자녀의 상속분은 계모에게 자녀가 없는 경우에는, 의자녀는 5분의 1을 상속하며, 승중의 자에게는 약간을 가급하고 나머지는 계모의 본족에게 귀속하였다. 그리고 계모에게 자녀가 있는 경우에는 승중의 자만이 9분의 1을 상속할 수 있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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