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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보선언
    Essay 2006. 5. 11. 13:26
    알다시피 우리 사회에서 '서울대'의 지배적 위치는 참으로 대단하다. 앞뒤 잘라버리고 거칠게 말하자면, 지배계급의 지도집단도 서울대였고, 지배계급에 대항하는 지도집단도 서울대였다. 그들만이 지도적이었다는 것이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이 그랬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도 변함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학생운동에 있어서도, 서울대 총학생회의 활동이 전부는 아니었지만 그들은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그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런 의미 있는 전통은 그들 스스로에 의해 종말을 고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서울대 총학생회가 그런 선언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서울대 전체의 정치의식을 드러낸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서울대 총학생회가 서울대 전체학생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에 이번 선언은 곧 '서울대의 정치의식 붕괴'를 상징하는 일이 되고 있다. 내가 서울대생인 것도 아니고 그들이 무엇을 하건 나와는 크게 상관 없는 일이지만, 참으로 아쉽고도 불행한 일이라고 하고 싶다.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본다. 서울대 총학생회가 한총련을 탈퇴한 것이 잘못인가? 그렇지 않다. 서울대 총학생회는 얼마든지 한총련을 탈퇴할 수 있고 그것이 '올바른 판단에 의한 정당한 선택'일 수도 있다. 다만, 문제는 '단지 그것 뿐'이라는 데에 있다. 심지어 탈퇴의 이유조차도 변변치 않다. '맹목적 정치투쟁 일변도의 학생운동'이라는 이유는 수구보수집단의 어법일 뿐 서울대 총학생회가 왜 한총련을 탈퇴하는지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현재 학생운동의 투쟁방식에 문제가 있다거나 대안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서울대 총학생회가 당연히 한총련을 탈퇴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조차도 그들은 아무런 논리나 설득력 있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그들은 '학생운동의 올바른 방향'이라는 시각에서 탈퇴의 변을 준비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않았고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은 현재 서울대 총학생회의 의식수준을 가늠하게 해주는 매우 의미 있는 부분이다. 나는 그들이 한총련을 탈퇴하고 어떤 조직에도 가담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유가 결코 학생운동이 "맹목적 정치투쟁 일변도"이기 때문이 아니라고 본다. 단언하건대 그들은 그저 '학생운동'이 싫었을 뿐이다. 만약 그들에게 학생운동에 대한 최소한의 신념과 고민이 있었다면 그들이 내놓은 탈퇴의 변은 사뭇 달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금까지 그들의 선배들이 치열하게 해왔던 학생운동이 점점 싫어졌을 수도 있다. 싫은 걸 어찌하랴. 기대는 있을지언정 요구하고 싶은 생각 따위는 없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들의 행동을 곱씹어 볼 수록 심한 역겨움을 느끼게 된다. 그들에게 역겨움을 느끼는 가장 큰 이유는, 탈퇴의 이유를 자신들에게서 찾지 않고 '학생운동'에 고스란히 전가시켰다는 것이다. 그저 진솔하게 "나는 학생운동이 싫어요"를 외치면 될 것을, 그들은 수구보수집단의 사고와 어법을 그야말로 '맹목적'으로 차용해다가 자신들의 단순하고 유치스러워 보이는 도피적 발상을 일견 주체적인 판단과 행동인 양 그럴 듯 하게 치장하는 데 써먹었다. 그것은 의식수준을 거론하기 이전에, 매우 비겁하고 비열한 짓이다.

    그들에게 역겨움을 느끼는 또 다른 이유는 탈퇴선언을 한 시기의 문제이다. 이 점에 관하여는 정확한 정보가 없기 때문에 단언할 수는 없지만, 만약 그들이 이번 대추리 사건으로 조성된 한총련, 나아가 학생운동에 대한 지배집단과 보수언론의 부당한 이데올로기적 공세에 편승한 것이라면 그들의 비겁함과 비열함은 '고의성'을 갖는 것으로서 더이상 용서받을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들은 한총련 탈퇴선언을 하면서 자신들이 무슨 대단한 존재라도 되는 양 앞으로는 어떤 조직도 '서울대 총학생회'의 이름을 끼워 넣지 말 것을 요구했다. 참으로 안쓰러운 일이다. 그들은 이미 '서울대 총학생회'라는 이름이 자신들로 인해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서울대 총학생회의 한총련 탈퇴선언 소식을 접하면서 처음에는 그다지 왈가왈부하고 싶지도 않았다.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동안 '선언'을 안했다 뿐이지 실질적으로 '탈퇴'한 것은 벌써 옛날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서울대 총학생회가 한총련을 탈퇴한 그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탈퇴는 자유이고 그것이 정당한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보여준 선택의 모습은 그야말로 '탈퇴하기 위한 탈퇴'의 모습일 뿐이다. 시대의 아픔과 함께 하고자 했던 전통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지성인으로서 가져야 할 현실참여에 대한 마땅한 정치적 의지도 느껴지지 않는, 이제 자신들에게는 더이상 정치적 입장이 없다고 선언한, 아니,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은 정치적 입장이 없다는 것이라고 선언한,

    일종의 '바보선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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