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장판으로 천박함을 유감없이 드러내주는 우리 대한민국 국회의 모습은
우리에게 늘 말할 수 없는 쪽팔림을 선사해준다.
어제만 해도 그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또 다시 염증을 느꼈을 것인가.
그러나 나는 그들의 난장판을 보면서 더 이상 속상해 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왜냐하면, 미천한 의회주의의 역사로 볼 때에 지금 우리 국회의 모습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선진국 의회가 세련된 모습을 보여준다고 해서 부러워할 것은 없다.
그들이 처음부터 세련되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라고 해서 고함을 지르거나 서류를 집어던지지 않았을 것 같은가?
오히려 그들은 칼부림까지 있었다. 그 칼부림을 '결투'라는 이름의 또 다른 세련됨으로
착각해서도 안된다. "선거"나 "투표", "다수결"이라는 제도의 발전은
주로 영국에서 이루어졌는데, 그 이유에 대해 한 헌법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만나기만 하면 서로 칼을 뽑으니.. 그런 제도가 발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 점을 제도의 직접적인 배경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론서에는 언급되지 않는, 복잡하고 숨겨진 역사적 배경을
함축적으로 단번에 이해할 수 있는 매우 의미 있는 설명이다.
어쨌든 우리가 정치적 선진국이라 우러러 보는 국가의 의회도
처음에는 피 튀기는 난장판이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 점을 생각하면, 불과 50년 정도의 일천한 의회주의 역사 속에서
세련된 정치운용을 기대한다는 것은 오히려 무리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제목과 같이 정치적 허무주의를 경계하자는 뜻에서다.
의회의 모습이 아무리 천박하다고 하더라도 의회를 포기할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국회나 정치인을 욕하는 사람들에게 심정적 동의를 보내지만,
사실 그런 욕설들은 별로 쓸데없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욕설에 그치는 것'보다는 '지속적인 관심'이 의회를 변화시키는 데
훨씬 더 유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또 다시 국회가 난장판의 모습이라고 해서 눈을 돌려버려서는 안된다.
어제와 같은 일은 특히 그렇다.
어제의 일은 비록 난장판이긴 했으나
지금 우리의 정치현실 속에서 민생법안과 사회개혁입법을 통과시킬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난장판' 밖에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다.
그 난장판의 원흉이, '국민'이 아닌 '기득권 세력'을 대표하고 있는 한나라당임은 물론이다.
단언하건대,
부당하고 과도하게 축적한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는 자들이 존재하고
그들을 대표하는 한나라당(과거와 현재는 물론 앞으로의 그들)이 존재하는 한,
대한민국 국회의 난장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음 국회의 모습은 그래도 좋아지겠지?
이런 말을 들으면 모두가 웃거나 아니면 화를 내야 한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난장판을 봐야 할 지도 모른다는 것이 진실에 가까운 상황에서
이런 말은 '농담'이거나 아니면 '기만'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이 아직도 참된 민주주의를 염원하고 있다면,
허무주의보다는 개인적이면서도 조직적인, 조용한 각오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