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과 <오아시스>의 비교적 상상
    Favorites/movie 2006. 1. 31. 09:52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이 영화를 보고나니 자연스레 영화 <오아시스>를 떠올리게 된다. 아마도 ‘장애인 여성의 삶과 사랑’이라는 주제를 포함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서로 유사한 주제를 다루었다고 해도 두 개의 작품을 곧바로 비교하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 나처럼 영화에 대한 안목이 없는 사람이라면 자칫 작품의 우열을 가리려는 경향이 생길 수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감상의 깊이와 폭은 비교범위 내로 제한되기 쉽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위험이 있다고 하더라도 같은 주제를 향한 두 작품의 비교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비단 영화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비교는 비슷한 주제에 대한 다른 시각과 현실을 느껴볼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고, 그것은 또한 우리가 영화를 보는 즐거움이나 영화를 통해 얻는 유익함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과 <오아시스>는 확실히 그런 비교적 상상을 하게 만든다. ‘장애인 여성의 삶과 사랑’이라는 비슷한 주제임에도 두 영화의 내용과 느낌은 사뭇 다르다. 그것은 아마도 두 영화가 그리는 인물과 현실의 차이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오아시스>의 경우 ‘한공주(문소리)’는 온몸이 뒤틀려 있는 뇌성마비 장애인이고 ‘홍종두(설경구)’는 전과3범에 어딘가 한참 모자란 구제불능 양아치이다. 둘에게는 경제력도 없고 사랑을 나눌 안정된 생활공간도 없었으며, 인간적 존중이나 사회적 배려 따위는 더욱 없었다. 둘은 주변 사람들과 사회에 있어 ‘없었으면 싶은 존재’일 뿐이었다.


    이에 비한다면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현실은 훨씬 편안하게 느껴진다. 스스로를 ‘조제’라 부르고 싶어 하는 ‘쿠미코’의 장애는 하반신을 쓰지 못할 뿐이고, ‘한공주’에 비한다면 예쁜 얼굴을 가졌다. 더불어 요리를 잘하고 지적이기까지 하다. 지적이긴 하지만 어린아이처럼 여러 가지 보아야 할 것들이 많다는 그녀의 말들은 귀엽기까지 하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세상에서 가장 야한 섹스를 상으로 주겠다는 애교도 있다. ‘츠네오’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회부적응자인 ‘홍종두’에 비해 그는 아르바이트도 열심히 하고 취직에도 성공하는 번듯한 대학생이다. 그러니까 ‘쿠미코’와 ‘츠네오’는 <오아시스>의 ‘홍종두’와 ‘한공주’에 비한다면 최소한 ‘멸시당하는 존재’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놓고 보면, 두 영화의 현실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고, 비슷한 주제라고는 하지만 공통된 무언가를 찾기가 어려워진다. 굳이 찾는다면 ‘장애인 여성도 섹스와 사랑을 원한다’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두 영화의 관점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내 생각에는 <오아시스>가 ‘장애인에 대한 이중적(또는 위선적)인 시각을 갖는 사회’라는 외적 조건 속에서 장애인 여성의 사랑을 바라보았다면,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그러한 외적 조건보다는 내적이고 주관적인 모습을 주로 그렸다는 것이다.

    ‘홍종두’와 ‘한공주’는 서로 사랑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이라 인식조차 되지 않는다. ‘홍종두’의 어머니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구제불능의 양아치를 자식으로 두었지만 뇌성마비 장애인인 ‘한공주’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한공주’의 가족들 역시 뺑소니 가해자에 사회부적응자인 ‘홍종두’를 용납할 수가 없다. 게다가 그들은 ‘한공주’를 이용해 보다 좋은 임대아파트에 살지만 ‘한공주’와 함께 살고 싶은 마음은 없다. 현실적인 동시에 위선적인 이들에게 ‘홍종두’와 ‘한공주’의 사랑행위는 그저 ‘강간’과 ‘합의금 2천만 원’으로 보일 뿐이다. 한편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단순히 상황을 오해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주변인들은 전후사정을 알지 못하므로 오해의 성립이 있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이면에는 의식하지 못하는 뿌리 깊은 인식이 있었다. ‘홍종두’를 향한 형사의 한 마디가 그 점을 잘 말해준다. 형사는 이렇게 말한다.

    “피해자가.. 아 좀 보세요.. 아 저런 애를... 참나 인간으로서 이해가 안가네... 야 임마, 솔직히 성욕이 생기데?”
    이 한마디 속에는 장애인 여성을 바라보는 ‘동정과 멸시의 이중적 시각’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물론 이것은 기본적으로는 여성을 성행위의 객체로 보는 남성들의 시각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보다 넓은 의미에서는 뇌성마비의 장애인이 무슨 사랑을 하겠냐는, 장애인 여성에 대한 이른바 ‘정상인’들의 사회적 인식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이렇듯 <오아시스>는 장애인 여성의 사랑에 대한 사회현실과 사회인식을 잘 드러내 주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는 다른 관점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위해 이러한 부분들이 상당히 자제되어 있다고 느껴진다. 물론 장애인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사회적 인식이나 복지정책의 수준에 차이가 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역시 중요한 것은 그러한 외부환경이 아니라 사랑을 하게 된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내적 갈등이다. 그러한 내적 갈등 역시 사회현실과 인식이 전제된 것이라 해도 사랑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던 ‘홍종두’와 ‘한공주’에 비해 ‘쿠미코’와 ‘츠네오’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서로 마음 놓고 사랑할 수 있었다는 차이가 있다.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사랑이야기는 의외로 상반된 결말을 맺는다. <오아시스>의 사랑은 억압되긴 했지만 포기하지 않은 사랑이 암시되었고,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사랑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웠지만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다. 사랑이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쿠미코’는 문학을 통해 일찌감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꽃과 고양이를 보고 싶고 호랑이와 물고기들을 보고 싶은 것처럼 ‘쿠미코’는 사랑을 해보고 싶었다. ‘츠네오’는 어느 날 문득 사랑이 지속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지쳤어?’라고 묻는 동생의 말을 듣고 화장실에서 ‘쿠미코’를 끌어안는다. 여전히 ‘쿠미코’를 사랑하지만 자신은 감당할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츠네오'는 둘의 이별이 담담한 이별일지라도 결국 자신이 ‘도망쳤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두 영화의 이 같은 상반된 결말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지금까지 끌고 왔던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사랑’이라는 편견을 버린다면, ‘인간과 인간’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이고 안타깝지만 쉽게 비난할 수 없는 이별 이야기이다. 한쪽은 강제된 이별을 비록 험난할 지라도 다시금 사랑으로 극복하려고 하고, 다른 한쪽은 선택한 이별을 역시 증오 없는 사랑으로 끝맺는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영화 오아시스와 직접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마음에 드는 사진이라 올려본다.


    그러나 두 영화의 비교적 상상은 결국 내 개인적으로는 약간의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가령 두 영화의 설정된 현실을 서로 뒤바꾼다면 이들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는 왠지 비현실적일 것 같고, 지나치게 작위적이어서 부자연스러울 것만 같다. 예를 들어 ‘한공주’가 뇌성마비가 아닌 ‘쿠미코’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양아치 ‘홍종두’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 혹은 ‘쿠미코’가 ‘한공주’와 같은 뇌성마비 장애인이었다면 대학생 ‘츠네오’는 그런 ‘쿠미코’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런 설정이었다면 호평을 받은 두 영화는 실패했을지도 모르겠다. 그와 같은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너무 괴리된 나머지 영화의 전개는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본다. 현실을 극복한 것 같은 영화적 현실도 어찌 보면 현실적으로 계산된 것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순간이다.


    여하간 두 영화는 장애인 여성의 삶과 사랑이라는 주제의 극히 일부분을 보여준 것에 불과하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여성은 장애인 여성이다”라는 어느 선배의 말을 떠올려 볼 때 ‘한공주’와 ‘쿠미코’는 그저 영화라는 비현실로 맞춤된 '그나마 행복한 장애인 여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은 고사하고 너무나 인간적인 성 욕구마저 풀어내지 못한 채, ‘쿠미코’와 ‘한공주’ 역시 그랬던 것처럼 매일같이 몽상에 기대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여성들이야말로 불행하지만 엄연한 ‘현실’일 것이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두 영화를 보고 지나치게 감동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고 싶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이유 가운데에는 개인적으로 매우 분명한 것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것은 두 영화에 대해 호감이 있었다고 해도, 나에게 장애인 친구가 생긴다거나 장애인 여성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여전히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애써 내 자신에 대해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가졌다"는 자책을 하지 않아도 말이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