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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공전술에 관한 단상
    Essay 2006. 6. 15. 23:44
    토고전 승리와 함께 불거진 '공 돌리기' 또는 '지공전술'에 대해 인터넷 여기저기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나도 몇몇 곳에서 내 의견을 간단히 주장해 보았는데, 미디어몹에서도 그에 관한 논란이 있는 것을 보고 좀더 차분히 정리해 보고자 한다. 이러한 글이나 논란이 많은 사람들에게 이미 '지겨운 것'임을 알고 있지만, 한 치의 양보도 없으니 그냥 가는 데까지 가보기로 하자.

    우선 이 논란에서는 정리해야 될 것이 좀 있다. 첫번째는 용어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공 돌리기"라는 표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순우리말이므로 "지공"이라는 말보다야 훨씬 좋았으면 좋았지 말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번 논란에서 쓰이는 "공 돌리기"라는 말에는 이미 그 행위를 비난하는 뜻이 어느 정도 담겨 있다고 보인다. 즉, "지공"이라는 표현은 하나의 전술이라는 의미로 인식되는 반면, "공 돌리기"라는 말에는 일종의 '정정당당하지 못한 짓(dirty play)'이라는 인식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듯 "공 돌리기"라는 말에 보이지 않는 문제가 있다고 해서 이 말을 쓰지 말고 "지공"으로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자기가 생각하고 좋아하는 대로 어떤 표현을 써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현재의 논란에서 쓰이는 "공 돌리기"라는 표현이 그렇게 객관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밝혀두고자 한다.

    다음으로는 문제상황을 좀 정리할 필요가 있다. 나는 가장 중요한 것이 경기 중 문제가 불거진 시점, 즉 논란이 되고 있는 상황이 어느 시점부터인가가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대표팀의 안정환 선수가 역전골을 성공시킨 이후부터인지, 아니면 종료직전 이천수 선수의 프리킥 상황만을 의미하는 것인지 사람에 따라 생각하는 것은 제각각인데 잘 드러나지도 않고 통일되어 있지도 않다. 가령, 역전골 이후의 지공은 문제가 없으나 단지 프리킥을 돌린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용어는 각자 알아서 선택해서 쓰겠으나 나는 적어도 자신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시점(장면)이 어디인지는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선 내 입장을 말하자면, 나는 경기가 벌어진 당시에 역전골에 환호하며 이렇게 외쳤다.

    "그래! 한 골 더 넣자!! 공격!!!"

    이유는 나 역시 공격적인 축구를 좋아하기 때문이고, 당시 상황이 우리 팀에게 매우 유리했기 때문이다. 분명 충분히 한 골을 더 기대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러나 역전골 이후의 상황은 대체로 "지공전술"이었다고 보인다. 다만, "무작정 시간만을 보내기 위한 지공"이었는가 아니면 "공격의 활로를 찾기 위한 지공"이었는가 하는 문제에서 나는 후자에 가깝다고 보았다. 경기화면을 다시 보아도 대표팀은 선수들 간에 패스를 하면서 공격루트를 찾으려는 모습을 보였고 실제로 공격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문제가 불거진 시점은 추가시간 2분 5초의 상황, 즉 이천수 선수가 프리킥을 슈팅으로 시도하지 않고 패스로 연결해 지공을 한 부분이다. 2분 5초에서 2분 33초까지 28초 동안 10회에 걸쳐 패스를 주고 받다가 토고 문전으로 넘어간 공을 토고 골키퍼가 띄우고 그것을 다시 우리 수비수가 헤딩으로 걷어내면서 2분 47초에 종료 휘슬이 울렸다. 이때의 28초 동안의 지공은 이영표 선수가 치고 들어가려는 듯한 모습을 잠깐 보였을 뿐 "시간을 보내기 위한 지공"이었다고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팀의 지공을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은 어떤 부분을 문제 삼는 것일까? 나는 역전골 이후의 상황이 아니라 프리킥을 패스로 연결하는 시점부터라고 생각한다. 역전골 이후의 상황은 "시간끌기용 지공"이라고 쉽게 단정할 수 없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경기장에서 관중의 야유가 쏟아졌던 때도 바로 이천수 선수가 프리킥을 패스로 연결했던 때였으며 이 논란이 처음 불거졌을 당시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던 사람들이 지적했던 부분도 바로 그 시점이었다.

    이견이 있을 수도 있으나 정리를 하자면, 대표팀의 지공을 "공 돌리기"라며 비판하는 사람이 (보통은 명백히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전제하고 있는 문제상황은 두 가지에 한정되어 있다고 본다.

    ① 프리킥을 패스로 돌린 것
    ② 이후 종료될 때까지 28초 동안 10회에 걸친 패스를 주고 받은 것


    앞서 나는 경기 당시에 역전골에 환호하면서 "공격!"을 외쳤다고 했다. 공격축구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사실 너무 우스운 이야기이다. 수비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응원을 하면서 위급한 상황도 아닌데 큰 소리로 "수비만 해!!"라거나 "공 돌려!!"라고 외치는 한심한 축구팬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소극적이라도 그저 시간이 어서 가기를 바라는 정도일 것이며, 이기는 상황에서도 당연히 더 공격하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대표팀의 지공전술이 논란이 되고 있다는 것을 보고서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한 골을 더 얻지 못한 것이 아쉽고 좀더 맹렬히 공격하지 않은 것에 아쉬움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공전술이 잘못됐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솔직히 좀 어처구니가 없었다. 논란이 진행되면서 많이 사라지기는 했지만 처음에는 "정정당당하지 못했다"는 이유에서 비난하는 사람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운동경기에서 늘상 있는 하나의 전술을 윤리적인 문제로까지 승화시킬 수 있는 그들의 높은 윤리의식에 그저 탄복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단언하건대 그건 윤리문제가 아니다. 비겁한 것도 아니고 정정당당하지 않은 것도 아니며 더러운 짓도 아니다. 그냥 전술이고, 그걸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물론 절대적이지 않다. 대개 자신의 팀이 이기고 있을 때 그러면 별 신경 안쓰고, 지고 있을 때 상대방이 그러면 싫어 한다. 자기 팀과 무관하다면 지공전술은 재미가 없으므로 대개는 싫어 한다. 그뿐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의 경우는 굉장히 독특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자기 팀이 이기고 있음에도 이기기 위해 지공전술을 쓰는 자신의 팀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며 싫어한다. 피파의 규칙을 어기거나 속임수를 쓴 것도 아닌데 말이다. 가히 "축구계의 처음이자 마지막 정파"라 불릴 만 하다. 아마도 축구윤리의 수준을 겨루는 월드컵이 있었다면 자신의 팀에 피파의 룰에도 없는 고도의 윤리의식과 실천을 요구하고 있는 우리는 일찌감치 꿈★을 이루었을 듯 싶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서 많이 줄어든 듯 싶지만, 아직도 "정정당당한 승부"를 외치는 소박한 사람들이 있다.

    한편 이것이 윤리적 문제와 관련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있지만, 자신의 축구관이 너무나 확고한 사람들이 있다. 간단히 말해 "축구는 그래야만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앞서 언급했던 사람들이 그저 소박하다면 이 사람들은 축구에 대한 지식도 많고 평소에도 프리미어리그 등을 시청하는 사람들로서 굉장히 열정적이다. 다만 문제는 좀 비꼬아 말하자면 프리미어리그를 너무 많이 봤다는 것이다. 물론 이 사람들의 주장에는 귀담아 들을 말들도 많다. 축구 선진국의 리그가 선진적인 이유, 재미 있는 이유를 들어가며 '공격의 미학'을 주장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월드컵에서 골득실을 따지게 되는 상황, 지공을 하다가 어이 없게 역전 당하는 상황 등을 이런 저런 예를 들어가며 설명을 하면서 지공전술이 잘못된 판단이라고 주장한다.

    그렇게 틀린 말도 아니고 나는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앞에서 따져 보았던 문제상황을 대입해 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즉 아무리 타당한 이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시간을 보내기 위한 지공'은 길어야 1분도 안되는 짧은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숨막힐 듯한 더위 속에서 죽도록 뛰어다닌 경기의 마지막 1분 동안에 선수들에게 바랄 수 있는 기대 치고는 '축구전문가'나 '진정한 축구팬'을 자처하는 그들의 축구관과 지식이 너무 장황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92분을 열심히 뛰어 이겼어도 마지막 1분 동안 지공을 하면 욕을 얻어 먹는 팀....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넌센스이다. 이것이 문제가 된다면 지공전술을 전문적으로 구사하는 명문팀들은 물론이고 하다 못해 종료직전 감독의 선수교체, 골라인 아웃 되었을 때 슬금슬금 공을 차는 골키퍼, 아파 죽을 것처럼 뒹굴다 멀쩡히 뛰는 선수, 선수교체시 느긋하게 걸어 나가는 선수 등은 모두 축구계의 "공공의 적"이고 한국 대표팀이 한국 축구팬에게 비판 받았듯이 그들로부터 똑같이 비판 받아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나도 프리미어리그를 보지만 어느 누구도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비판했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다. 왜? 늘상 있는 일이니까. 교과서에는 없지만 원래 그렇게 하는 것이니까. 종료직전 감독이 시간을 벌려고 선수교체 했는데 눈치 없이 졸라 뛰어나가면 이상하니까...

    비판의 목소리 가운데 내가 주목하는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은 "그래도 프리킥은 패스가 아니라 슛을 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점에서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경기화면을 다시보면 알겠지만, 주심은 마지막 짧은 시간이 우리의 지공으로 채워지고 토고 골키퍼가 길게 찬 공이 우리 수비에 의해 걷어내지자 토고의 공격기회가 더 이상 없다고 판단해 이내 종료휘슬을 불었다. 만약 프리킥이 무위로 돌아가 토고의 공이 되었다면 주심은 시간상으로나 정황상으로나 토고가 마지막 슈팅을 할 때까지 기다렸을 것이다. 나는 응원을 하는 입장에서 "공격!!"을 외쳤고 프리킥도 당연히 슛을 하기 바랬지만, 그 자리에 감독이나 선수로 있었다면 그들이 했던 것과 똑같이 했을 것이다. 우리가 한 골을 더 넣겠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토고에게 마지막 슛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나의 입장은 "아쉬움은 있었으나 감독과 선수들의 냉정한 판단이 적절했다"는 것이다.

    대표팀을 비판하는 주장들을 한 마디로 규정하자면 그것은 "팬으로서 갖는 바람"이다. 아울러 지금까지 계속해서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는 그런 "바람"이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바라보는 자의 개인적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들은 "그따위 경기를 보려고 4년을 기다린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데 참으로 세련되고 고상하다. 그저 열심히 뛰어서 이겨주기만을 바랐던 나 같은 사람은 촌스러운 것처럼 느껴지니 말이다.

    끝으로 이번 일을 두고 어떤 분이 올렸다는 댓글을 붙여본다. 생활스포츠(?)에서 끄집어 낸 아주 적절한 비유라 생각한다.


    고스톱 생각하면 답이 나오는데
    웬 한가한 인생들이 그리 많은지

    스톱 한다는데
    그것도 점수 난 놈이

    옆에 객꾼들이야 고~ 고~ 하는 것 당연합니다.ㅎㅎㅎㅎ
    객꾼들 보고 집문서 걸고 자리에 함 앉아 보라하지여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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