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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문'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
    Essay 2006. 8. 2. 21:25
    김병준 교육부총리의 사건으로 인해 '논문'에 관한 문제가 다시금 불거졌다. 그런데 그 문제라는 것이 여전히 '베끼기', '시키기', '중복게재', '허위게재' 등이니 사실 할 말이 별로 없다. 이상과 현실은 항시 다르지만, 그래도 명색이 최고의 지성들이라고 하는 학자들의 세계에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생각해보면 할 말도 없고, 하고 싶은 말 역시 없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사실 논문과 관련된 이런 문제들보다 더 심각한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베끼기' 등의 문제는 논문의 작성과 발표에 있어 방법이나 과정이 부정했다는 것을 문제삼는 것이지만, 정작 잘 보이지도 않으면서 심각한 폐해를 끼칠 수 있는 것은 논문의 '내용'이다. 물론 내용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니 방법과 과정이 그 모양인 것이고, 반대로 방법과 과정이 그 모양이니 내용은 볼 것도 없는 것이므로, 따지고 보면 모두 같은 범주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논문의 내용이 아닐 수 없다.

    방법과 과정에 있어 정당하게 작성되고 발표되었으나 내용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논문을 생각해 보자. 그 논문이 학문의 자유시장에서 대성공을 거두고 그 사회에서 학문적 권위를 얻게 되었다고 해보자. 그건 갖은 방법으로 낙양의 지가를 부채질하며 쏟아지기는 하되 아무도 읽지 않는 쓰레기 논문들과는 달리 우리에게 실질적이면서도 은밀한 피해를 안겨다 준다. '베끼기', '시키기', '중복게재', '허위게재' 등의 폐해는 이렇게 문제라도 삼게 되지만, 내용의 폐해는 잘 드러나지도 않으면서 그 피해는 헤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이는 학문분과를 가리지 않는다고 본다. 줄기세포연구에 대한 찬반론을 떠나 (논문으로 발표될) 그 연구에 대해 윤리적 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아주 중요한 본보기이다. 전문적이기는 해도 증명과 실현의 가능성이 대단히 높은 자연과학에서조차 이러한데 인문사회과학에서는 어떨까.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박사'를 '조작의 명수'라고 표현했듯이 그들이 생산해 내는 잘못되고 음흉한 법질서, 도덕과 윤리, 이념, 그밖에 많은 사회적 원리와 가치관들은 우리의 생활과 인식에 직간접적으로 광범위한 영향을 끼친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러한 영향을 '지배'라고 표현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논문이 어떻게 작성되고 발표되었는가 하는 형식적 문제도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형식적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서 아무런 문제가 없는 바람직한 상태가 된다거나 논문에 대한 사회일반의 정당한 기대가 충족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논문의 내용은 어떠해야 하는가? 논문에 대한 사회일반의 정당한 기대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는 매우 어려운 주제이므로 가방끈이 짧은 내가 쉽게 답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 점이야말로 논문을 작성하는 연구자들이 스스로 던져야 할 질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나 부족하긴 하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 먼저 우리는 논문작성에 있어 '베끼기'를 비난했지만, 사실 '베끼기'가 없으면 논문으로 인정해주지도 않는다. 무슨 말인가 하면 '자기 스스로 처음부터 끝까지 절대순수하게 창조적으로 쓰는 논문'은 없다는 것이다. 싫든 좋든 다른 연구자들의 연구성과를 옮겨다 적절히 실어주어야 논문으로서 인정을 받는다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이를 '인용'이라고 한다. 좀 냉소적으로 이야기하긴 했지만 '인용'을 가장 원초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정확히 공개하는 조건으로 공인된 베끼기'라는 것이다. 실상 어떤 문장을 거의 똑같이 베껴와도 인용표시만 제대로 달아준다면 그걸 '표절'이라고 문제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공인된 베끼기도 상당한 문제점이 있다. 인용은 논리전개 또는 논리구성상 다른 연구자의 연구성과를 빌려야 하는 경우나 자료 등의 출처를 밝힐 때에 사용하게 되는데 앞서 말한 '내용'의 진정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이 부분은 정확히 아카데미즘에 빠지고 현학의 첨단을 달리게 된다. 법학의 경우를 보면 우리나라는 독일법계의 전통을 일본을 통해 받아들였기 때문에 법학연구에 있어 두 나라 모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해왔고, 세대가 좀 지나자 영미법계 유학자들이 생겨나 또한 그들 나라들도 비중이 커졌다고 간단히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법학논문의 경우 독일, 일본, 미국, 프랑스 등의 연구업적을 '인용'하지 않고서는 논문으로서 인정을 못받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 현실이다. 아마도 이는 정도와 양상의 차이가 있을 뿐 다른 학문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생각한다.

    외국의 연구결과를 인용한다고 해서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부분에 관한 외국의 역사나 현실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우리 사회의 현실과도 하등의 관련이 없는 그런 내용들이 그저 논문의 장식문양으로만 쓰여지고 있다면 그건 모두가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하고 있지만 보통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표절도 아니고 어쨌든 자기 힘으로 쓴 것이긴 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쓴 것은 베껴서 쓴 것과 별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수준이야 학문의 깊이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학문적 고뇌'라는 진정성이 없는 논문은 베껴서 썼든 자기가 썼든 무용지물은 매한가지라는 것이다. 나는 우리 사회에서 '논문대필'이 가능한 근본적인 원인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여러 논문이나 자료를 베껴다 적절히 구성하고 편집하면 겉보기에 그럴 듯한 논문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겉보기에 논문 같으면 논문의 내용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듯 은밀하게 덮혀져 있는 '논문의 내용에 관한 폐해'가 각종의 형식적 폐해를 불러 일으키는 측면이 크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내용에 학문적 고뇌와 진정성을 담는다면 형식적 폐해들은 자리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형식적 폐해들을 가만 두고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고민은 근본적인 문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해결방법은 없는가. 나는 이 문제에 관한 별 다른 해결방법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거의 전적으로 연구자들의 의지의 문제이고 그것으로서 한 나라의 학문적 수준이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이미 그 정도의 학문적 소양에 안주하는 연구자들에게는 기대할 것도 없다. 때로는 포기하는게 유일한 방법일 때도 있다. 그들에게는 미안하지만 하루 빨리 수명이 다해주기를 기대할 뿐이고, 다만 학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순수한 청년학생들에게 기대할 뿐이다.

    실제로 법학계에는 한 때 그런 학생들이 있었다고 한다. 외국유학 가지 말자. 외국어 같은 거 배우지 말자. 그보다 한국의 현실에 가장 적합하고 가장 필요한 그런 연구를 하자고 서로 맹세를 했다고 한다. 이 소박하기 짝이 없던 맹세가 제대로 지켜진 것은 아니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그 진정성과 고뇌는 건강하게 살아 남아 소중한 활동들을 이어나가고 있다.

    지금의 그들이 모인 학술단체에서 발행하는 학술지는 논문을 발표하기 까다로운 것 중에 하나로 꼽힌다. 명성과 권력이 있다고 해서 쉽게 실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내용에 관한 엄격한 심사를 거치고 여러 연구자들 앞에서 하는 논문발표회를 거쳐야만 한다. 그렇게 나온 논문이라 해서 반드시 좋은 논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제대로 된 논문을 원한다면 이렇듯 내용에 관한 고민과 검증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한편 이러한 절차적인 방법을 취하면서도 제대로 운용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연구자들의 의지에 달린 문제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학자의 기본소양은 자아성찰과 비판정신이다. 학자는 그것을 통해 학문을 하는 것이고, 이는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이기 이전에 학자로서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이다. 사실 그것만 있어도 그가 쓴 논문은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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