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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의 미로 (Pan's Labyrinth, El Laberinto Del Fauno, 2006)
    Favorites/movie 2007. 3. 26.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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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제는 꽤 지난 이야기이지만, 영화 <판의 미로>에 대한 홍보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심난한 판타지 영화'라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판타지 영화에 대한 선입견[각주:1]을 갖고 있는데, 그 엉터리 홍보[각주:2]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이 영화를 보지 마세요"라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역작과 엉터리 홍보'라는 경험 덕분에 선입견이란 것이 그렇게 권장될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는 있었다. 노바리님의 추천이 없었더라면, 나는 잘못된 홍보를 통해 굳어진 선입견을 갖고 이 훌륭하게 잘 만든 영화를 일부러 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이것처럼 한심한 일도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이런 경험을 통해서 선입견을 극복하기로 결심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나처럼 선입견을 버릴 수 없는 사람에게 '추천'이라는 축복이 계속 내려지기를 기대할 뿐이다. 실로 뻔뻔한 일이긴 하지만, '영화'에 있어서 스스로 돕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은 그 방법 밖에는 없다. 좋은 영화를 추천해 주신 노바리님께 고마운 마음을 전해 드리고 싶다. 이 영화를 본 지도 꽤 되었지만, <판의 미로>에 대한 나름의 감상을 적어 둔다.

    <판의 미로>는 스페인 내전이라는 역사 속의 현실에서 존재한다. 파시스트 프랑코의 쿠데타와 이에 저항한 노동자들의 무장봉기로 시작된 스페인 내전에서, 결국 반격에 성공한 파시스트 군대에 끝까지 항전하는 좌파 인민들의 이야기는 결코 '전설'이나 '동화'가 아니다. 그것은 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중세의 낭만적 배경보다도 훨씬 가까이 있는, 우리가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을 맞을 즈음인 1940년대 중반 역사 속의 현실이다. 켄 로치(Ken Loach) 감독의 영화 <랜드 앤 프리덤, Land and Freedom>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 시대 그곳에서 싸우다 살아 남았던 사람들은 바로 우리 시대에 묻혔다. '아는 사람만 아는' 이 가깝고도 절망적인 역사적 현실 속에 의외의 슬픈 동화가 자리한다.

    확실히 의외이긴 하다. 그러나 역사적 현실과 상상(fantasy)이 긴밀하게 맞닿아 있는 이러한 구조는 매우 특별하게 다가온다. 엄밀히 말하자면, "현실은 현실일 뿐이고 상상은 또 상상일 뿐"이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융합된 이 둘은 결코 분리된 것이 아니고 이질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뚜렷한 목적의식과 방향을 위한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 그래서 "현실이면서 상상이고, 상상이면서 현실"이다. 역사적 현실은 상상을 통해 비추어지거나 해석되고, 상상 속에서 더욱 풍부하게 살아 있는 진실에 다가선다. '상상'은 또한 역사적 현실을 해석하고 진실에 다가서기 위한 하나의 훌륭한 방법이자 수단이 되면서 그 자체로 과거를 알지 못하는 세대들에게 의미있는 메세지를 전달한다. 현실과 상상의 이 같은 결합은, 이제는 서점에서 잘 팔리지도 않는 이야기, 도서관에 가도 먼지를 털어 내고 읽어야 하는 이야기, 역사학을 배우는 수많은 학생들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야기를 새롭게 만날 수 있게 해준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이 영화에서 '상상'은, 현실과 무관하게 그야말로 상상을 통해서나 가능한 욕구와 욕망을 충족시키고 해소하기 위한 터무니 없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상상은 실재했던 역사적 현실 속으로 녹아들어가 그 역사적 현실에서 잊혀지거나 숨겨진, 또는 잘 보이지 않는 진실을 찾고, 그것에 대한 어떤 믿음을 품어 낼 수 있게 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점에서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상상은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이더라도, 그 상상의 의미는 결코 말초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의미있고 가치있는 정신과 영혼의 울림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오필리아'와 '미로'를 중심으로 한 상상 속에는 노바리님의 의견처럼 "혁명의 실패가 주었던 암울한 고통과 슬픔"을 느껴야 했던 스페인 민중들이 자리하고 있다.[각주:3] 동시에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오필리아는 불과 60여 년 전에 파시스트에 맞서 싸웠던 사람들을 알지 못하는 현재의 세대들을 은유하기도 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현재의 세대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필리아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고귀한 전설이 된다. 스페인 민중들이 느꼈던 고통과 슬픔은 오필리아가 느껴야 했던 것이며 동시에 현재의 세대가 마땅히 느끼고 기억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스페인 민중들이 선택했던 삶은 오필리아가 치루었던 시험과 다르지 않은 것이며, 오필리아가 치루었던 시험은 또 다시 현재의 세대가 선택해야 할 삶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오필리아는 우리에게 그 시대 스페인 인민들의 삶을 전해주는 요정의 나라 공주인 셈이다.[각주: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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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르세데스 역의 마리벨 베르두(Maribel Verdu)와 오필리아 역의 이바나 바쿠에로(Ivana Baquero)


    그런 오필리아가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것은 우선 '파시스트의 본질'이다. 파시스트 비달은 일말의 거리낌도 없이 어린 오필리아를 쏘았다. 그는 왜 어린 오필리아를 쏘았을까? 자신의 아들을 위협으로부터 구하기 위해서? 그렇지 않다. 파시스트 비달의 행동을 오인해서는 안 된다. '아들'에 대한 그의 집착은 파시스트가 가질 수 있는 본연의 비인간적이고 반(反)사회적인 모습일 뿐이다. 오필리아의 어머니는 그의 아들을 낳아주기 위한 도구일 뿐 '여성'도 '인간'도 아니었다. 목숨을 걸고 아이를 낳는 것은 여성의 고귀한 의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은 경배의 대상이지 한낱 수단의 의미가 아니다. 어미는 죽여도 아이를 살리라는 주문은 인간적 고뇌에 따른 것이 아니라 파시스트만이 할 수 있는 대사인 것이다. 오필리아는 말할 것도 없다. 어린 오필리아는 '위협적인 존재'가 아닌 '귀찮은 존재'라는 이유로 죽어야 했다. 또한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듯 자기 아들에게 아버지가 죽은 시각을 알려 달라고 하는 파시스트 비달의 유언은 '아들을 수단으로 한 복수의 의지'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그것은 '아들에 대한 사랑'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파시스트 비달의 집착을 결코 부정(父情)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는 분명하다. 부정이란 '자신의 욕망을 대신하게 될 자기 아이에 대한 집착'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의 아이와 같은 모든 아이들에 대한 사랑', '그 아이들의 어머니인 여성들에 대한 사랑'도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모습이다.
     
    오필리아와 파시스트에 대항했던 스페인 인민들은 그 점을 증명한다. 오필리아는 판의 위협 앞에서 설령 자신에게 약속된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할 지라도 아기가 '단 한 방울의 피'를 흘리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그리고 파시스트들에 맞섰던 스페인 내전의 혁명군은 비록 그 아기가 '파시스트의 아들'일지라도 오필리아가 그랬듯이 '아무 죄 없는 아기'만큼은 품에 안았다. 오필리아가 두 번째로 전해주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오필리아의 마지막 시험은 기독교 사상의 가장 숭고한 핵심[각주:5]이기도 한 '희생'(sacrifice)이었다. 희생은 다른 영화에서도 종종 '천국에 가기 위한 조건'으로 설정되는 것이므로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전형적인 결말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스페인 혁명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는 '단순한 영화의 결말'이 아닌 '사회적 실천'의 의미를 담고 있으므로 보다 각별하다고 할 수 있다. 실로 스페인 혁명은 그러했다. 스페인에서 있었던 전쟁은 '내전'으로 시작했지만 정의를 사수하기 위해 세계 인민들이 참여한 '혁명'으로 발전했다. 그 인민들의 연대와 실천을 '희생'이라는 말 이외에 무엇으로 표현하겠는가. 오필리아는 그 실재했던 희생의 의미를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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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예르모 델 토로(Guillermo Del Toro) 감독과 이바나 바쿠에로(Ivana Baquero)


    <판의 미로>의 결말은 다시 보고 또 다시 볼 만큼 인상 깊다.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요정이 피를 흘리며 마지막으로 포근한 미소를 짓는 모습은 마치 '내가 보여준 이야기를 기억하고 결코 잊지 말라'고 하는 듯 하다. 스페인 혁명의 실패라는 그 절망적인 상황과 고통은 오필리아의 죽음과 메르세데스의 눈물만으로도 너무나 생생하게 다가온다. 메르세데스의 자장가는 과거에 있었던 희생과 억울한 죽음에 대한 슬픈 위로이자 현재와 미래에 있을 모든 희생에 대한 따뜻한 보살핌의 노래로 들린다. 영화의 마지막 해설(narration)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오필리아가 남긴 흔적들은 "어디를 봐야 하는지 아는 자들에게만 보인다"고 한다. 나는 한때 유흥준씨로 인해 유행했던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보다 이 말이 더 가슴에 와닿는다. 세상에는 많이 안다고 보이는 것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많이 알지 못해도 어디를 봐야 하는지 아는 자들에게만 보이는 그런 것들이 있다. 나는 그것이 아는 만큼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 이 영화에 아낌 없는 찬사를 보낸다. 특별히 파시스트 비달이라는 망할 인간 쓰레기 역을 맡은 세르지 로페즈(Sergi Lopez)라는 배우의 연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그의 연기는 훌륭했다.




    1. '선입견'임에는 분명하지만 달리 표현하면 '취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누구나 취향에 따른 선입견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므로 판타지 영화에 대한 내 선입견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판타지 영화'에 대한 선입견이 있다고 해서 상상이나 공상을 의미하는 '판타지' 자체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인간은 상상하는 동물'이라고 할 만큼 '상상하지 않는 인간'을 생각할 수 없다는 점에서 판타지는 인간에게 있어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며, 특히 어린이들에게는 '상상의 세계'가 중요하기 때문에 잘 만들어진 판타지 영화가 매우 유익하다고 할 수 있다. 내가 갖고 있는 판타지 영화에 대한 주관적 선입견은 별 의미 없이 돈이나 벌기 위해 만들어진 대책 없는 영화들 때문이다. '상업성'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의 질'을 탓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2.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역작'으로 평가받아도 좋을 이 영화가 상업적 이득을 얻기 위한 대책 없는 홍보에 의해 오해받고 평가절하되는 사태가 빚어졌다. 홍보물을 제작한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일지라도 '홍보가 안티'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례 중에 하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본문으로]
    3. 다만 오필리아와 판의 미로를 중심으로 한 상상의 상당 부분은 감독 개인이 경험해 온 사회적, 문화적 성장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이 염소의 모습을 한 판(Pan)을 만들어 낸 배경이나 오필리아가 치루어야 했던 시험들이 갖고 있는 의미들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공포를 느껴야 할 괴물의 모습에서 공포를 느끼지 못하거나 도리어 귀여움 같은 것을 느끼게 되는 것도 그런 연유 때문일 것이다. 여하간 이 영화가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전작 <악마의 등뼈, The Devil's Backbone, El Espinazo Del Diablo, 2001>에 이어 두 번째로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그것이 중심이 된 것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이 영화의 모든 것이 오직 '스페인 내전의 교훈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본문으로]
    4. 이 영화를 본 사람들 중에는 오필리아가 영화 속에서 진짜 요정의 나라 공주이냐 아니면 환영을 본것이냐, 즉 미쳤던 것이냐 하는 논쟁 아닌 논쟁이 있었던 듯 싶다. 순수하다고 해야 할까. 재밌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지금도 그런 논쟁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그 논쟁에 참여해 보고 싶다. 난 오필리아가 영화가 아닌 '현실 속에 진짜 있었던 요정의 나라 공주'라는 쪽이다. 이유는 그것이 지금의 내가 갖고 싶은 판타지이기 때문이다. 판타지 영화에 선입견을 갖고 있는 내가 판타지 영화 매니악이 된 기분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하하^^; [본문으로]
    5. 신학에서 sacrifice는 '십자가에 못박힘', '그리스도의 헌신'을 의미한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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