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거북이도 난다 (Lakposhtha Ham Parvaz Mikonand, Turtles Can Fly, 2004)
    Favorites/movie 2007. 4. 23. 22:50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바흐만 고바디(Bahman Ghobadi) 감독의 <거북이도 난다>는 쿠르드 아이들의 섬뜩한 현실을 담은 영화이다. 이 특별한 영화를 접하기 전에 한 가지 알아 두어야 할 것은 우리가 보통 영화를 즐길 때 기대하는 흥미로움이나 감동, 교훈 따위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실 그 어떤 것도 느낄 필요가 없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그런 영화이다.
     
    먹거리를 준비하는 일도 권하고 싶지 않다. 당신은 그저 불편하고 당혹스런 일을 가만히 지켜 보기만 하면 된다. 실로 공포영화에나 어울릴 것 같은 '섬뜩'하다는 표현은 이 영화, 아니 이 '처참한 현실'에 가장 잘 어울리는 표현일 것이다. 물론 공포영화에서 보는 것과 같은 그런 무서움은 없다. 다만 살아가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편안한 아이들의 실제 현실이 당신을 그렇게 느끼도록 만들 것이다.

    혹 이 영화에 대한 사전정보를 얻고 싶다면 아래의 관련 글들이 유용할 것이다. 별도의 설명이 없어도 바흐만 고바디 감독과 그의 영화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언급하고 싶은 것은 고바디 감독의 방식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예술과 리얼리티는 서로를 보완한다. 리얼리티가 없다면 예술은 헛되고, 예술이 없다면 리얼리티는 무의미하다." 나는 그의 이런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나 역시 예술과 리얼리티가 상호보완적이기를 바라고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리얼리티 없는 예술도 아름다울 수 있고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아울러 리얼리티는 그 자체로도 예술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여전히 그의 생각은 옳다. 그가 겪어 온 삶, 그가 보아 온 참혹한 삶 속에서 예술과 리얼리티는 서로 '보완적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점에 그 누구도 반론을 제기할 수는 없다. 참혹한 현실에서 리얼리티 없는 예술은 반동이고 예술 없는 리얼리티는 고립무원의 생지옥일 뿐이다. 그래서 그는 예술 속에 진실을 담아 알려야 했고 예술을 통해 현실을 품어 내야만 했다. 그의 영화는 '그래야만' 했다.
     
    국가 없이 이라크, 이란, 터키, 시리아 등지에 사는 수천만명이나 되는 민족 쿠르드(Kurd)의 오랜 비극적 현실은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특히 중동지역에 대한 이해나 관심이 적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듣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최근 이라크 북부 쿠르드 자치지역인 아르빌에 자이툰 부대가 파병되어 그나마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우리와 쿠르드의 인연은 훨씬 이전부터이다. 한국전쟁 때 터키에서 파병한 군인의 70~80%는 쿠르드인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터기 파병군 가운데 쿠르드인이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생활여건이 어려운 사람들, 즉 하층민들이 군대를 선택하거나 전쟁터에 가게 된다는 점을 생각했을 때 터키에서 이들이 놓여 있는 사회적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이 파병군인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이유는 아마도 여기에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터키의 쿠르드인은 터키 정부와 사회로부터 억압받고 차별받는 'underclass'라고 볼 수 있다.
     
    여하간 흔히 역사적 이유와 한국전쟁 파병으로 터키를 '형제의 국가'라고 하지만 그런 이유에서라면 쿠르드 역시 우리의 관심을 받아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물론 그런 인연이 없었더라도 다른 인간, 다른 사회의 비극적 현실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보편적 의무이며, 모든 정부의 국제적 책무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그린(Agrin) 역의 아바즈 라티프(Avaz Latif)


    인간과 정부가 마땅히 취해야 할 입장이라는 점에서 '인류애'를 언급했지만, 오히려 인간에게 있어 비극적인 현실을 만들어 내는 것은 대부분 그 인간과 정부이다. 믿고 싶지 않은 쿠르드 아이들의 참혹한 현실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이들을 강간하고, 아이들이 살아 있는 팔과 다리로 지뢰밭에서 지뢰를 파게 하는 자들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름과 주소가 있는 자들'이다. 우리는 그 참담한 현실이 결코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의 재앙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그것은 안락한 보호막 속에 자신을 은폐하고 있는 자들의 소행이다.
     
    다른 민족의 오랜 핍박으로 쿠르디스탄 독립국가를 열망하는 쿠르드와 이를 용납하지 않으려는 주변국 간의 갈등은 대단히 복잡하고 또 쉽게 해결될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이 비극적 현실이 언제 끝나게 될 지 알 수 없다. 오히려 지금은 더 큰 비극이 닥치지 않을까 우려되는 상황이다. 그러나 그런 정치적 배경 때문에 이 문제를 해결 불가능한 것으로 취급할 수는 없다. 정치적 배경을 떠나 그들의 삶에는 보호와 치유가 필요하고 도움의 손길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할 수 있는 길은 세계 민중의 연대 밖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거북이 등껍질처럼 삶의 고통을 지고 사는 아이들의 삶은 영화 속에서조차 끝나지 않는다. 어차피 그것은 처음부터 영화가 아니었다. 영화 속 아이들조차도 희망 찬 미래를 꿈꾸는 '배우'가 아니다. 그래서 이 영화의 끝에는 가슴 저리는 슬픔과 연대의 절실함만이 남는다.
     
    세계대전 이후 인류가 확인한 보편적 인권과 인도주의는 아직 실현되지 않았고 인류는 아직도 그것을 실현할 의무가 있다. 국제적 '인권'이나 '원조'에 큰 역할을 해내지 못하는 대한민국 정부와 우리 국민들에게도 그런 의무가 있음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이라크 평화재건'을 구호로 자이툰 부대가 파병이 되었고 한국인 특유의 친화력과 성실함으로 쿠르드 사람들의 환영을 받고는 있지만, 파병 자체의 이면에 '인류애'가 아닌 계산적인 '국익'이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국익론'이 무조건 부도덕하거나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근본적인 박애정신의 원칙과 태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서는 어느 누구도 인권이나 인도주의의 이름으로 축배를 들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비단 쿠르드 문제만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한없이 짓밟히는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그런 축배는 고의성이 없더라도 한낱 자기기만의 이기적 만족일 뿐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우리에게 이런저런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었다'고 해서 기뻐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아이들에게도 '너희에겐 이런저런 자유와 권리가 보장된다'고만 가르쳐서도 안될 일이다. 단지 그것 뿐이라면 그 어떤 승리를 얻는다 해도 '이기적 인간', '이기적 사회'라는 비난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핍박하는 한 그 누구의 자유와 권리도 불완전하다. 우리에게 '인간애'라는 것이 있다면, 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당장 아무 것도 없다고 하더라도, 그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위성(Satellite) 역의 소란 에브라힘(Soran Ebrahim)


    [추천하는 글]

    - 김현정, "<거북이도 난다>로 다시 쿠르드의 현재를 고발하는 감독 바흐만 고바디", 씨네21
    - 김현정, "내 영화는 총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냈다", 씨네21
    - 장보임, "쿠르드인의 삶, <거북이도 난다>", 프로메테우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