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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이툰과 파병문제에 관한 단상
    Essay 2006. 3. 30. 11:17

    오래된 일도 아닌데 마치 오래된 일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다. 당시에는 너무나 가슴 아프고 참담한 일이었는데도 말이다. 하기야 사람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살 수는 없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어느 날 문득 잊고 지내던 그런 안타까운 일들이 떠오르면 삶의 가벼움마저 느끼게 된다.

    지난 날 우리 삶에는 그런 일들이 너무나 많았지만, 오늘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된 이유는 우연히 자이툰 부대에 관한 글을 읽다가 김선일씨의 비참한 죽음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평생을 슬픔과 고통으로 살아가실 유족들을 생각하면 이런 글을 쓰는 것이 가슴 아프고 죄송한 일이지만, 우리는 김선일씨를 죽음으로 몰아갔던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그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바로 그 파병문제 말이다.
     

    학비를 벌기 위해 일을 했던 김선일씨를 참혹하게 살해한 자들은 인도주의를 저버린 잔인무도한 과격주의자들이었다. 항간에는 김선일씨 살해의 배후는 미국이었을 것이라는 ‘음모론’도 있는 듯 하나, 그들이 누구였건 죄 없는 한 민간인을 끔찍하게 살해한 그들의 행위는 용서받을 여지가 없다. 그러나 알다시피 김선일씨를 죽음으로 몰아갔던 또 하나의 분명한 원인이 있었다. 바로 미국의 ‘명분 없는 전쟁’과 그 전쟁에 대한 우리 정부의 ‘명분 없는 파병’이었다. 특히 우리 정부와 파병찬성론자들은 살고 싶다는 김선일씨의 절규 앞에서도 철군 및 파병철회를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아울러 그의 비통한 죽음이 알려진 뒤에도 그들 가운데에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자들이 있었다. 소를 위해 대를 희생할 수 없다는 ‘대의명분론’이나, 위험을 알면서도 돈을 벌기 위해 그런 곳에 간 본인의 책임이라는 ‘자업자득론’을 지껄이는 자들이었다. 더욱 가증스러운 것은 그가 죽음에 내몰렸을 때에는 그렇게 관심조차 없던 이들이 그가 죽자 기다렸다는 듯이 ‘복수론’에 가세했다는 것이다. 아무 잘못도 없는 한 민간인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애도의 뜻을 표하는 것보다 상황에 따라 이해타산의 머리를 굴리는 그들은 인도주의를 저버린 또 하나의 잔인무도한 과격주의자들이었다.


    애초에 '파병의 목적'도 그런 식이었다. ‘이라크의 평화재건’은 대외홍보용의 구호였을 뿐이다. 미국의 도움이 없이는 국가안보를 책임질 수 없으니 한미동맹은 불가피하다거나 전쟁터에서 끌어들일 수입에 입맛을 다시며 국익을 위해서는 반드시 파병해야 한다는 것이 공공연하게 퍼진 진짜 파병의 목적이었다. 어쨌거나 그들의 뜻대로 자이툰 부대는 이라크로 떠났고 얼마  간의 시간이 흘렀다. 그렇다면 요즘 파병찬성론자들의 생각은 어떨까? 자이툰 부대에 관한 글을 우연히 읽다가 그들의 주장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그 일면을 엿볼 수 있었다.


    우선 그들은 자이툰 부대의 활동을 매우 성공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자이툰 부대는 물자지원과 기술교육, 의료지원 등의 활동을 통해 아르빌 현지 주민과 이라크 관료에게는 물론 동맹국들에게도 인정을 받고 있다고 한다. 오랜 고난 때문에 군대에 대한 인식이 극도로 부정적이라는 쿠르드인들이 유독 한국군에 대해서만은 우호적이라거나, 한국군은 앞으로 1세기 또는 영원히 주둔해도 좋다는 말, 그리고 한국의 국회가 앞으로 파병연장에 동의하지 않으면 현지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날 것이라는 등의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고 한다.


    꼭 이런 식의 듣기 좋은 말들이 아니더라도 자이툰 부대의 활동은 파병에 반대했던 입장에서도 ‘성공적’ 또는 ‘긍정적’이라고 하기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배경은 좋지 않았으나,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 같다”고 했는데, 자이툰 부대의 활동만을 놓고 본다면 수긍이 가는 이야기이다. 다시 말하자면, 파병반대론의 입장에서도 자이툰 부대가 침략군과 같이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은 간과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파병반대론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파병반대론은 파병 자체의 정당성이 없었기 때문에 미국의 요구대로 파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자이툰 부대가 어떤 활동을 하는 지는 중요하지가 않았다.


    여기서 문제는 또다시 파병찬성론자들의 생각이다. 파병찬성론자들은 자이툰 부대에 내려지는 긍정적 평가를 파병 자체는 물론 그밖에 자신들이 갖고 있는 타산적 생각들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자이툰 부대가 아무리 긍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더러운 전쟁의 명분 없는 파병’이 소급해서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라크의 평화재건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오로지 자이툰이라는 ‘군대’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군대를 움직이고 군대를 통해 지원하는 예산이라면 이라크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물론 진심이 오로지 이라크를 돕겠다는 것일 경우의 이야기이지만 말이다.


    여하간 파병찬성론자들은 자이툰의 활약에 고무되어 "그때 파병반대 했던 놈들 다 어디 갔냐"고 외치면서 처음부터 자신들의 진심이 마치 순수하게 이라크의 평화정착과 재건에 있었다는 것처럼 행세하고 있다. 한미동맹관계와 국익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잠시 숨기고 ‘자이툰의 활약’을 통해 파병 자체를 정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이툰의 활약을 보면서 자신들이 평화의 사도라도 된 것처럼 자아도취에 빠져 있지만 본래의 목적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전 세계가 비난하는 전쟁에 대해 단지 ‘미국’이라는 동맹국이 벌인 전쟁이라는 이유만으로 전혀 비난할 생각이 없다. 아울러 자이툰의 활약에 힘입어 하루 빨리 우리 기업들이 진출해 국익을 증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나는 자이툰이라는 파병부대보다 파병찬성론자들이 더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이툰은 그저 묵묵히 민사작전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지만, 파병찬성론자들은 민사작전 아닌 모든 생각들을 그들 특유의 정신분열적 사고방식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병찬성론자들은 그야말로 다중인격의 전형으로 보인다. 그들은 침략국의 신도이면서 피해국의 친구 행세까지 하기 때문이다. 물론 친구로서 갖는 그들의 우정은 국익사업을 위해 꼭 필요한 관계일 뿐이고, 우정의 내용이란 것도 사실은 ‘우리가 은혜를 베풀었다’는 것이다. 만약 자이툰이 공격을 받아 사상자가 발생하거나 또 다른 납치살해사건이 발생한다면 이들은 볼 것도 없이 ‘배은망덕’과 ‘복수’를 주장할 것이다.


    나는 파병반대론자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이라도 당장 무조건 철군해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파병 이전에 가졌던 파병반대론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도 현재로서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파병은 이미 이루어졌고 자이툰 부대가 나름대로 긍정적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자이툰 부대가 아무리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낸다고 하더라도 파병연장이 당연하게 지속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파병반대론에도 인식의 전환은 필요하다고 본다. 개인적으로는 자이툰의 민사작전에 기초해 점차 비군사적 민간지원의 확대로 나아가는 것이 파병 문제를 매듭짓는 가장 올바른 방향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이툰 부대의 연혁에는 미국의 침략전쟁도 김선일씨의 죽음도 존재하지 않겠지만, 그것은 자이툰의 이름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이자 슬픔이다. 파병찬성론자들은 애써 무관하다 여기겠지만 그들이 무시한다 하여 미국의 침략전쟁이 독재와 테러로부터 민주주의를 지켜낸 전쟁으로 기록되는 것이 아니고, 김선일씨의 죽음이 지워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에게는 국가안보나 국익도 중요하지만, 잘못된 일을 부끄러워 할 줄 알고 불행한 일에 슬퍼할 줄 아는 것이 먼저여야 했다. 그러나 파병찬성론자들은 그러지 못했다. 아울러 이라크에 다른 나라 기업들이 속속 진출하는 것을 보면서 파병찬성론자들은 마치 자신들이 손해를 보는 것처럼 조바심을 내고 있지만, 때로는 돈이 안 되는 일이 무엇보다 값진 일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 우리 정부와 기업이 이라크에서 돈을 못 벌었다고 해서 지금 칭송해마지 않는 자이툰 부대의 활동이 무의미한 것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앞서 파병찬성론자들에 대한 악담을 늘어놓았지만 파병찬성론자는 그저 ‘실리주의자’라고 생각한다. 물론 실리를 추구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고삐 풀린 자본주의사회가 그렇듯 지나치게 실리만을 추구하는 것은 종종 진실을 은폐하거나 왜곡하고 인간성 같은 소중한 가치들을 잊게 만든다. 그것이 우리에게 절실한 실리가 아닌 그저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나는 파병찬성론자들이 파병의 문제를 실리의 관점에서만 보지 말고 진실과 평화, 그리고 인도주의의 관점에서 바라보기를 바란다. 그것은 실리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실리보다 더 중요한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진정한 실리의 싹은 오히려 그런 데서 피어나는 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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