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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감상적이다
    Essay 2006. 4. 14. 17:30

    13일 국회에서는 '이주아동과 그 가족의 권리 보장법' 공청회가 열렸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모든 아동을 보호할 책임과 의무가 있으므로, 이주노동자의 아이들에 대해서도 법적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열린 공청회일 것이다. 내 스스로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못해 법안이나 공청회의 내용은 잘 모르겠으나, 반드시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라 여긴다.

    그러나, 이 소식을 전하는 기사에 달린 댓글들을 보고 참으로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지만, 그들을 내쫓지는 못할 망정 무슨 보호냐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그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논리는 그들의 존재 자체가 "불법"이라는 것이다. 있어서는 안되는 인간들이 이 땅에 들어와 살고 있으니 어른이고 애새끼고 다 나가야 한다는 것이 그들이 주장하는 '정의'이다.

    그건 정말 후진국이나 하는 짓이라는 말에도 아랑곳 없다. 후진국이어도 좋댄다. 결국 우리들만 오손도손 잘 살자는 말이다. 참으로 다정다감하고 끈끈한 이웃들이다. 혹시라도 기사에서 소개된 아이들의 사진을 보고 마음이 흔들릴 사람들이 있을까 염려가 되었는지, 정에 얽매이지 말고 감상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신신당부까지 있다. 이주아동에 대한 보호정책을 쓰면 우리들의 소중한 대한민국이 꼴도 보기 싫은 불법체류자들이 와서 애를 놓는 곳이 되지는 않을까 두려움에 떨고 있다.

    씨발..

    정나미가 뚝 떨어진다. 이미 대한민국정부가 가입한 '국제아동권리협약'이 있고, 이번의 입법추진도 국제적 압력이나 여론악화를 막아야 하는 '어쩔 수 없는' 배경이 없지 않아 있겠지만, 그런 문서나 법적 책임따위 없어도 아동보호는 인간사회의 보편적 책임이다. 그게 없으면 '후진국'이 아니라 '야만사회'라는 말이다.

    인류보편적 가치를 계속 이야기하다 보면 그들은 오히려 '아이들'을 들이밀 것이다. 우리의 아이들도 밥을 굶고, 앵벌이를 하고, 성추행 당하고, 유괴되어 죽임을 당하는데, 왜 그들-우리 사회에 단물만 빨아먹으려고 들어온-불법체류자들의 아이들까지 우리가 책임져야 하는가? 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래 장하다. 우리 아이들 행복해서 좋겠다. 대한민국의 아이들을 생각하는 당신들의 그 따뜻한 정에 눈물겹다. 요즘말로 진짜 '안습'이다.

    감상적인 나는 망망대해에 떠 있는 한국 국적의 유람선 한 척을 그려본다.

    비운의 타이타닉호처럼 몇시간 뒤 가라앉게 생겼는데 보트가 부족하다. 결국 사는 자와 죽는 자를 가려야 한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는 절대적인 윤리법칙이 있다. 타이타닉호에서는 영화에서건 실제 사건에서건 혼란을 피하기 위해 "가난한 자"들이 갇히는 상황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것만 빼고는 이 윤리법칙이 제대로 지켜졌다. 그 윤리법칙이란 바로 이것이다.

    "아이들과 여성이 먼저"

    타이타닉호에서는 억만장자라도 기꺼이 죽음을 택했던 사람도 있었다. 물론 비겁한 사람도 있었겠지만 이 윤리법칙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영화장면 중에 나오는, 죽는 순간까지 음악을 연주했던 이름 없는 악단도 실제로 있었다고 하니 비통한 일이지만 참으로 멋진 일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한 모든 죽음이 그렇듯이 실로 위대하고 존경할 만한 죽음이다.

    이제 한국판 타이타닉을 상상해보자.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내 생각에는 이 인간문명사회의 보편적 윤리법칙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들이 꽤나 많을 것 같다. 왜 평등한 인간인데 여성만 특별히 우대하냐면서 제비뽑기를 하는 것이 '정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아이들이라고 다를까? "모든 아이들부터"라는 법칙이 아니라 "내 아이 먼저" 법칙이 고개를 내밀 것이다. 여기에 밀항을 했거나 불법체류하던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동남아시아 가족들이 있다고 상상해 보자. 과연 어떤 법칙이 적용될까?

    지금은 그 문제와 다르지 않느냐? 죽으라는 말이 아니라 자기네 나라로 돌아가라는 말이지 않느냐고 대꾸하지 말라. 아이를 '불법화물' 정도로 취급하는 저열한 동물들이 죽고 사는 문제에 있어서 갑자기 고귀한 인간으로 승화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아마도 동남아 출신의 그 가족이 없으면 그만큼의 한국인을 살릴 수 있다는 "한민족 우선의 법칙"이 등장할 것이다.

    그래, 나 감상적이다. 감상적인 인간이니 감상적으로 말하겠다. 나 이제부터 한국축구 응원 안 할란다. 저들과 같이 "대~한민~국!"을 외치며 박수치고 있을 내 모습을 생각하니 쪽팔려 미치겠다. 그래, 나 불법체류자옹호자 맞다. 아니 귀찮다. 그냥 조선족이나 탈북자라고 해두자. 대한민국은 무슨 대한민국인가. 아나~ 대한민국이다. 국익이니 사회안전이니 내국민우선이니 니들 마음껏 이성적으로 씨부려라.

    독일로 간 광부와 간호사들이 독일정부의 정책이 바뀌어 하루아침에 쫓겨 날 위기에 몰렸을 때 시위를 통해 체류를 보장받았다. 그게 몇년이나 지났다고 이제는 집주인 노릇을 하겠단다. 한국인들 대단하다. 그 집요함을 네오나찌들이 보면 감탄할 지도 모르겠다. 물론 네오나찌들 눈에 동양인은 셰퍼드만도 못하겠지만 말이다. 하기야 네오나찌들도 자신들이 이성적이며 애국적이라 생각할 것이다.

    더불어 지금도 미국에는 한국인 불법체류자들이 부지기수이고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나이 드신 노인들이라고 한다. 그분들은 조국이 못사는 것도 아닌데 왜 거기 틀어박혀 청승을 떨고 계시는걸까? 대한민국 국민들은 왜 한국 내 불법체류자를 내쫓자는 말만 하고, 외국에서 불법체류 중인 대한민국 국민들 이야기는 왜 안하는걸까? 독일에서 한국인 불법체류자가 네오나찌에게 폭행당했다는 말을 들으면 저들은 뭐라고 반응할까? "야만인들, 우리는 사장님 아니면 때리진 않는다"고 할까?

    정말 징그럽다.

    전 세계 불쌍한 아이들은 다 데려다 한국에서 키우자는 것도 아니고, 최소한 한국에 머무는 아이들만큼은 누구의 아이인가를 떠나서 모두 보호해주자는 데 무슨 말들이 그렇게 많은가. 만약 한국정부가 세계에 유례가 없는 강력한 국제아동보호정책을 실시한 결과 부작용까지 낳을 정도가 된다면, 우리는 명실상부한 선진국이자 자랑스러운 문화국가가 될 것이다. 훗날 그 정책 때문에 세금을 더 내야 한다면 나는 최소한의 일로서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 선진문화국가가 고작 '한류'에 어깨가 으쓱해져 딸딸이나 치면 되는게 아니다.

    그래 나는 이렇게 감상적이다. 단군의 홍익인간이니, 백범의 문화적 민족국가니, 모두가 부질없는 감상의 일장춘몽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런 전통적인 정신문화는 참으로 감상적인 존재들이 아니었던가. 교과서에서 다 빼라. 그리고 헌법이 있음에도 '국시'라고 불리는 '반공국가' 옆에다가 하나 더 자랑스럽게 갖다 붙여라.

    '불법체류 발본색원 국가(아동 예외 없음)'

    그래도 밥은 쳐먹고 다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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