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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북한문제에 관한 자료를 조사하다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Le Monde diplomatique) 한국판 창간호에 실렸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인터뷰 기사를 보게 되었다. 그런데 기사에 실린 사진 한장에 눈길이 꽤 오래 머물렀다. 그것은 그의 집무실 한쪽에 놓인 <백범김구전집>을 찍은 사진이었다. (기사원문 : "북한 문제, 네오콘은 손떼고 한국 의견 존중하라")
▲ 김대중 전 대통령 집무실에 놓여 있는 <백범김구전집>. ⓒ 매일노동뉴스 정기훈 사진기자
언듯 생각하기에 <백범일지>는 흔해도 <백범김구전집>까지 갖고 있는 경우란 많지 않을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백범김구전집>을 갖고 있다는 게 무슨 '대단한 일'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소장하여 틈틈이 읽고 싶지만 형편이 안돼 구입하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도 많을 것이고, 더욱이 만약 누군가 "그냥 흔해 빠진 장식용일지 모른다"고 해도 별로 반박할 수 없을 것 같으니 사진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정말 대수로울 것 없는 모습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 사진에 그렇게 눈길이 오래 머무른 이유는 이런저런 생각이 들어서였다.
내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장식용이건 아니건, 건국 이래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고위 공직자 집무실에 백범의 사상을 담은 책은 과연 얼마나 소장되어 있었을까? 아니, 책이 있거나 없거나 그의 사상을 진지하게 고민해 본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
학자라면 모를까 아마도 현직 공직자의 집무실이라면 그의 책을 쉽게 찾아 보기 어려웠을 것 같고, 퇴임한 공직자라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그의 사상을 좇으며 고뇌하는 사람이 있었을까를 생각하면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와는 전혀 무관하면서도 백범의 사상에 심취하는 것은 한국현대사에서는 김구나 장준하의 죽음이 대변하듯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었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백범의 사상은 빛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사상을 담은 책들이 '금지서적'은 아니었지만, 그의 사상을 실천하는 것은 분명히 '정치적으로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하여 오늘 날 <백범일지>가 알아 먹지도 못할 만큼 형편 없이 번역된 외국 위인들의 책보다 더 인기가 없는 교양서적 가운데 하나가 돼버린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한국현대사'만큼이나 암울한 생각을 하면서 사진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희망적인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그래도 그의 사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했고 결실을 얻어 낸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한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도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서 공과가 있으므로 그에 대한 평가는 사안에 따라 다양할 것이다. 아울러 그의 활동을 김구사상에 직접 영향을 받은 것으로 단정하는 것도 어쩌면 성급한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최소한 백범 김구의 사상에 부합하는 노력을 해왔고 쉽게 얻을 수 없는 성과를 이루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오랫동안 실천이 금지된 사상이 정책화 된 것은 당시에는 그다지 느끼지 못한 바였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실로 감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이 꼭 김구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고 해도 상관은 없다. 그것은 김구의 사상과 다르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조국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위해 백범 김구 선생은 평양을 방문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역시 전쟁을 통하지 않고서는 영원히 가까워질 수 없을 것 같았던 분단조국을 평화적 통일로 이끌기 위해 평양을 방문했다. 그것만으로도 양자는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소 감상적일 수 있는 이런 생각들 때문인지, 사진 밑에 적혀 있던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문구조차 매우 인상 깊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철학과 비전은 상해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계승한 것이다."
내가 인상 깊었던 부분은 우리 모두가 한번쯤은 들어 보았을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계승한 것"이라는 말이다. 한번 떠올려 보자. 대한민국에서 임시정부의 정통성이 제대로 계승된 것이 얼마나 있었는가.
헌법전문에서조차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실현된 무언가를 떠올리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친일파가 득세하여 독립투사를 모신 사당에 내건 현판을 떼내자 구속되고 처벌받는 것이 오히려 대한민국의 잘난 법통이니 말이다.
별 의미 없는 대수롭지 않은 사진 한장 속에서 오래 눈길이 머물렀던 까닭은, 그렇게 잊혀지고 잃어버린 줄로 알았던 훌륭한 사상과 정신이 다행스럽게 계승되어 온 모습을 그 속에서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다못해 장식용이라도 좋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공무원들의 집무실에 <백범일지>라도 한 권씩은 있어 '어느 날 문득'이라도 눈에 들어 올 수 있다면 좋겠다.
최소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는 그 말이 '어느 날 문득' 낯설게 느껴지는 사람이 없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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