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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노체트 사망과 칠레 민중들의 축제
    Essay 2006. 12. 15. 08:13

    민주적으로 선출되어 칠레의 노동자 민중이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던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대통령을 미국과 반동세력들의 지원을 받아 전투기로 폭격하고, 그렇게 쿠데타로 집권한 이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을 납치, 고문, 살해했던 독재자 피노체트(Augusto Pinochet)의 사망소식을 들은 지도 벌써 며칠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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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악무도한 범죄에 대한 어떤 법적 처벌도 받지 않은 채 천수를 다 누리고 간 피노체트의 죽음은 참으로 아쉽고 분한 일이긴 했지만 그가 죽었다는 소식에는 나 역시 기뻤다. 아마도 피노체트의 죽음을 함께 기뻐할 만한 사람이 옆에 있었다면 거리낌 없이 축배라도 들었을 것이다.

    칠레에는 가본 적도 없는 나조차도 이러한데, 반동 쿠데타 세력의 위협에도 끝까지 굴하지 않고 목숨을 바쳐 노동자 민중의 신뢰에 보답했던 그 아옌데를 사랑하고 기억하는 칠레 민중들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나는 그들이 모여 축제라도 벌일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칠레에 정말 그의 사망을 기뻐하는 축제가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다만,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그 축제가 축하해 주며 함께 즐길 만한 그런 것이 아니라 '한심하고 안타까운 일'이라고 평가했다. 조금 의외다 싶었지만 이내 그 말은 귀 기울여야 할 비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실 그렇다. 제대로 단죄한 것도 없고 청산한 것도 없으니 전세계 민중들이나 자손들에게 부끄러워 할 일이지 칠레인들은 뭐가 좋다고 축제를 벌이는가 말이다. 그 글은 아무런 단죄도 받지 않은 독재, 과거청산 없이 대충 넘어간 잘못된 역사가 나중에 무엇으로 둔갑할 지에 대한 분명한 위험을 경고하고 있었고, 그것은 너무나 옳은 발언이었다.

    한국에 박정희와 그 추종세력들이 있는 것처럼, 심지어 전두환에게도 팬클럽이 있는 것처럼 칠레에도 피노체트를 영웅으로 받들며 추종하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자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므로 축제의 분위기가 깨지더라도 아옌데를 지지하며 칠레 민중의 벗이 되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비판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일을 직접 경험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과거청산을 못했으니 축제라도 벌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끄러워 자숙하는 모습은 자칫 애도의 표현으로 보일 수 있으니 일부러라도 잔치를 벌여야 하지 않는가 말이다. 역사 앞에서는 한없이 부끄러울 지라도, 현재로서는 그것만이 피노체트와 그를 지지하는 파시스트들에 대한 최소한의 단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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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칠레의 현재 정세와 사회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사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정권은 바뀌었다고 하지만, 칠레의 현 체제는 피노체트가 쿠데타로 수호한 바로 그 부르주아 자본주의국가 체제이기 때문이다.

    최소한 아옌데와 그를 지지했던 노동자 민중들이 놀라운 모습으로 만들어 갔던 민중권력의 체제는 아니다. 이 점은 피노체트의 면책특권을 박탈했던 칠레 사법부가 쓰는 표현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번역된 표현이므로 정확한 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은 아옌데의 지지자들에 대해 "좌익 반체제 세력"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피노체트는 그 "좌익 반체제 세력"을 진압(또는 탄압)하는 과정에서 "반인도적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이 칠레 사법부의 입장이 아닌가 싶다.

    경험칙상 반역사적, 반인권적, 반민주적 체제에서 "반체제 세력에 대한 반인도적 범죄"는 용인의 대상이지 단죄의 대상이 아니다. "빨갱이를 잡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을 해도 된다"거나 "처벌을 경감해 주어야 한다"는 인식은 이미 우리에게도 친숙하지 않은가.

    만약 아옌데 집권기에 그토록 탄핵과 테러와 반동적 파업과 쿠데타를 일삼으며 민주적 정당성을 지닌 체제변화를 전복하려고 했던 의회, 사법부, 군대의 전통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면 칠레에서 과거청산이란 기대하기 힘든 일일 것이다. 당장 그들 칠레 민중들에게서 피노체트의 죽음 앞에 축제를 벌이는 것 말고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그것은 비판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패배적 인식을 갖자는 말은 아니다. 다만, 우리도 제대로 못하면서 칠레 민중을 한심하고 안타깝다 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는 것이다. 솔직히 우리는 칠레 민중들처럼 잔치조차 벌이지 못할 것 같다. 전두환이 죽으면 '국장'으로 치루거나 '국립묘지에 안장'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정부가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해도 '국민'을 빙자한 파시스트들이 국장을 요구하고 국립묘지 안장을 요구하지 않을까 벌써부터 심히 쪽팔린다. 하기사 이미 매장된 친일세력과 독재세력들만 해도 고개를 들 수가 없다.

    그러니 칠레 민중들의 축제를 못났다 하지 말자. 최소한 그들은 '국장'이 아닌 '군장'으로 장례를 치루었고, 피노체트의 유족들로 하여금 "반대자들이 무덤을 파헤치는 것이 우려돼 화장을 하겠다"고 만들었으니 우리보다는 훨씬 낫지 않은가. 그러니 지금은 그들을 비판하기 보다는 그들의 슬픈 역사를 이해하며 진심을 담아 축전을 보내주는 것이 훨씬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나도 지옥의 피노체트를 생각하며 진심으로 칠레 민중들에게 축하를 보내고 싶다.

    마지막으로 1973년 9월 11일 반동의 쿠데타가 있었던 날 아옌데 대통령이 라디오를 통해 칠레의 민중들에게 한 말을 옮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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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격되는 대통령궁. 아옌데 대통령은 이곳에서 최후까지 맞서 싸웠다.


    확인된 보고에 따르면 해군이 발파라이소를 포위, 점령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저는 이곳 대통령궁에서
    국민의 뜻에 의해 제가 대표하는 이 정부를 지킬 것입니다.
    .....

    공군이 포르딸레스 방송국과 연합방송을 폭격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저는, 노동자 여러분께 절대 굴복하지 않겠다는 말씀 밖에 드릴 수 없습니다.
    이 역사적인 전환점에서 민중의 신뢰에 목숨으로 보답하겠습니다.
    민중이 이룬 이 역사는 우리의 것입니다.
    칠레 만세! 인민 만세! 노동자 만세!
    .....

    그들은 힘으로 우리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무력이나 범죄행위로도 사회변혁을 멈추게 할 순 없습니다.
    역사는 우리의 것이며 인민이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자유롭게 걷고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할 역사의 큰 길을
    인민의 손으로 열게 될 것입니다.

    1973년 9월 11일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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