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경비 아저씨 5명이 며칠 전 해고되었다는 소식을 어머님으로부터 듣게 되었다. 그제서야 자주 인사드렸던 분들이 갑자기 안 보이시고 텅빈 경비실에 며칠째 불만 켜져 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최저임금법 개정으로 아파트 경비원들이 해고되는 일이 벌어진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내가 살고 있는 소규모 아파트에도 그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 참 세상물정 모르고 생각 없이 산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드는 순간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아파트 1층 현관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처음 보는 경비원 아저씨께서 먼저 고개 숙여 깍듯이 인사를 하신다. 나는 자세를 바로하고 정중하게 인사를 드리면서, 인사를 드려도 받는 둥 마는 둥 하셨던 예전의 경비 아저씨 생각이 났다. 불친절 했던 그분에 대해 솔직히 참 뻣뻣하시다는 생각을 하긴 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아버지 뻘 되는 분들께 먼저 인사를 받는 것보다는 차라리 무시를 당하는 쪽이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자주 뵙게 될 새로 오신 아저씨의 인사가 불편하기도 했지만 해고되신 분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했다.
해고되신 그분들이 일을 제대로 안하셨던 것도 아니다. 무뚝뚝했을 뿐 휴지를 줍고, 도로를 쓸고, 주차관리하고, 순찰하고, 택배관리와 분리수거 관리하는 일을 깔끔하게 잘 하셨다. 흠(?)이 있었다면 두 가지였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간혹 언성을 높이며 듣기 민망할 정도로 항의하는 젋은 여성 입주자들에게 '부모세대의 자존심'으로 맞섰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새벽녘 경비실에서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일 때가 많았던 것이다. 나는 그것조차 해고의 이유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흠이라고 할 만한 그 두 가지가 해고의 이유인 것도 아니었다. 그분들이 해고된 이유는 최저임금법 개정으로 추가 부담하게 될 입주자들의 단돈 몇푼 때문이었다. 이 최저임금법 개정을 둘러 싼 논란을 보면 단지 "세상 살아가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만 할 수 없는, 그 이상의 차갑고 두려운 현실을 목격하게 된다.
사정을 간략히 요약하면 이렇다. 아파트 경비원은 이른 바 '감시ㆍ단속적 근로자'에 해당되어 최저임금법의 적용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실질적 근로시간이나 노동강도에 비해 턱없이 낮은 임금을 받고, 고용상태도 직접고용이 아닌 용역업체를 통한 경우가 대부분이라 이들 감시ㆍ단속적 근로자에게도 최저임금을 제한적으로 적용(2007년부터는 최저임금의 70%, 2008년부터는 80%)하며, 그 책임을 용역업체는 물론 주민대표에게도 부과하는 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그것도 입주자들이 전면적으로 부담하는 것이 아니라 상당 부분은 정부 보조금에 의해 충당되어 실제 입주자들이 부담하는 돈은 그다지 많은 액수가 아니었다. 아무리 서민타령을 해도 그야 말로 푼돈이었다.
그러나 아파트 경비원들에게 한달 임금이 4~10만원 정도 오를 것이라는 희소식은 결국 날벼락이 되어 돌아왔다. 아파트입주자 단체와 용역업체들이 저항하며 '대량해고' 사태가 빚어질 것이라고 엄포를 놓기 시작했다. 대한노인회조차 고령자들의 일자리를 뺏는 결과가 될 것이라며 반대할 지경이었다. 결국 아파트 경비원들은 몇만원의 임금인상 소식을 반가워 하다가 저임금도 좋으니 일만 하게 해달라고 통사정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런 저항에 대해 정치권이나 정부의 반응이 달라질 여지는 거의 없었다. 개정법안을 발의했던 민주노동당 단병호 의원은 실질적 인상폭이 정말 크지 않은 데도 극렬하게 저항하는 사태를 이해할 수 없었고, 당정 또한 최저임금법 적용의 개선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깊이 따져 볼 것도 없이 최저임금법 개정은 결코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문제는 아파트 입주자들과 용역업체들, 그리고 그들을 옹호하는 언론들에 있었다. 기사를 검색해 보면 참으로 가관이다. 아파트 경비원을 줄여 나머지 경비원의 임금인상분을 채우고 무인경비시스템을 도입하여 최저임금법 개정에 성공적으로 대처한 사례가 회자되는가 하면, 쉬는 시간을 늘려 임금인상분을 줄이는 편법이 설득력을 얻는다. 또 기왕 돈 더 주는 것이니 조금이라도 젊은 사람을 써야 한다는 주장, 정책의 의도는 좋은 것이지만 관리비가 조금이라도 인상되면 반대하겠다는 주장, 정부정책은 소수가 희생하더라도 다수가 만족하는 정책을 써야 추진력을 얻는다는 점잖은 기자의 분석들이 있다. 이런 생각과 말들이 그저 알뜰하게 살려는 소박한 의지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 "범죄자가 아니면서 '사회'라는 말과는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냉혹한 서민군상의 예를 알려 달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이들을 추천하겠다.
만약 추가로 부담해야 할 인상액이 정말 높은 수준이었다면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작 한 달에 적게는 500원에서 몇 천원, 많아야 1만원을 아끼겠다고, 매일 얼굴을 보며 지내던 한 사람의 생계를 모른 척 하는 그 알뜰함에는 어떤 설득력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알뜰함이면 찰스 디킨스의 스크루지(Scrooge)는 구두쇠 영감이 아니라 '알뜰한 경제생활의 모범적 위인'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 자녀들에게도 꼭 그렇게 가르쳐야 할 것이다. 단돈 몇푼 아끼겠다고 아파트 경비원을 미련 없이 시원하게 잘라버리고 들어와 어린 자식에게 스크루지를 구두쇠 영감이라고 가르쳐 줄 수는 없지 않는가.
제사가 있을 때마다 음식을 챙겨주며 어른 대접해주던 입주자들이 단돈 몇 천원 때문에 인연을 끊자고 하는 것이 야속하다는 어느 경비원의 말처럼, 그들의 알뜰함은 비인간화의 선을 넘은 것일 뿐이다. 이번 일로 차갑고 두려운 자본주의 사회의 일상을 다시한번 깨닫게 된다. 물론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고 '당연한 권리'이기도 하다.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은 누구도 이 아파트 경비원의 일화를 남의 일처럼 여길 수는 없다는 것이다. 브레히트가 그랬듯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는 것은 운일 뿐이다. 그 운이 다하면 누구나 아파트 경비원과 같은 대우를 받게 될 것이다. 염려했던 대량해고 사태는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전국적으로 보면 해고된 사람들의 수는 꽤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분들에게 삶의 안정과 축복이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