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행 당한 아들을 위해 보복폭행을 한 혐의를 받고 있는 한화그룹 회장 김승연씨의 사건을 둘러싸고 인터넷 공간에서는 재미있는 의견대립이 벌어지고 있다. 대립적 입장의 하나는 이 사건을 재벌에 대한 특혜적 법적용이 빚어낸 (법질서와 국민을 향한) 재벌총수의 오만함이 드러난 사건으로 보는 입장이다. 이는 학자들이나 대부분의 언론과 여론이 바라보는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먼저 폭행피해를 당한 아들을 위해서 아버지로서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인지상정'의 일로 바라보거나, 또는 아버지라면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는 '뜨거운 부정(父情)의 발현'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재미있는 것은 바로 두 번째의 입장이다. 이들은 보복폭행의 피해자들이야말로 '먼저 폭행을 한 가해자'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 사건을 '북창동 양아치가 사람 잘못 건드려 혼쭐이 난 사건'에 불과한 것으로 바라본다. 그러니까 사회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불량한 동네 양아치들이 '제대로 가르침을 받은 일'이라는 것이다. 더불어 요즘 같은 세상에 그런 아버지가 어디 있는가라고 하면서 훈훈한 감동을 전하고 김승연씨를 '능력 있고 멋진 아버지'로 칭송하기도 한다. 얼핏 듣기에 틀린 말은 아니다. 보복폭행의 피해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는 모르지만, 어린 시절 동네 양아치한테 당해 본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복수'의 대리만족을 느끼기에 충분한 일이다. 혹시나 불량한 동네 양아치가 괴롭혀도 하루하루 밥벌이 하느라 그 사실을 알지도 못하거나 알아도 어쩌지 못하는 한낱 필부에 지나지 않는 무능력한 아버지를 원망했던 사람들이라면, 김승연 회장처럼 힘 있는 사람을 '아버지'로 두고 싶은 심정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을 이해해 보려고 애쓰면 애쓸 수록 우스운 생각이 든다. 나 역시 동네 양아치들에게 걸려 산으로 끌려가 맞아 본 적이 있다. 그때 내 아버지는 그냥 속상해 할 뿐(어쩌면 남자가 그런 일도 겪을 수 있다는 듯)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낀다거나 그와 같은 일이 정의에 부합하는 올바른 일이었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더군다나 중요한 것은 '시비'는 양아치들과 부딪혔을 때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보복폭행의 피해자들이 정말 혼 좀 나야하는 '동네 양아치'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생각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록 우스운 생각이 드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어린 시절에나 가질 법한 '철없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그들의 생각이 순수하다고 좋게 평가해 줄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사회구조를 이해하지 못하는 철부지들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다.
확실히 이 사건을 바라보는 철 없는 생각은 만화나 영화의 소재라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따라서 마치 현실에서도 있을 법한) 이야기 거리를 '주장'이랍시고 내놓은 것에 불과하다. 여기에 사적 제재[私刑]를 금지하는 근대법의 상식은 없다. '한국사회와 재벌'이라는 사회구조적 문제의식도 전혀 없다. 재벌총수가 아닌 일반인이었다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 사회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고, 법질서에 따라 어떤 처벌을 받게 되는지에 관한 이해 역시 전혀 없다. 마치 만화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재벌총수라면 그럴 수 있는 일'로 받아들이고, 일반인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지 '그럴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웃고 넘어갈 수만은 없는 심각한 생각이 드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어떻게 바라보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것이 사회적 병리현상의 일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번 일로 새삼스럽게 깨달은 것이 있다. 불편부당한 법질서와 사회적 평등이 제대로 실현되지 않은 사회에서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은 비단 돈이 많은 자들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 돈에 들러 붙어 추종하는 자들, 그 돈의 힘을 꿈꾸며 추앙하는 자들 역시 '돈이면 다 된다'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돈이 힘을 발휘하는 배경에는 항시 '가지지 못한 자들의 이런저런 굴종과 숭배'가 있는 법이다. 돈의 힘으로 한 일이 법을 어겼을 때 그것을 '할 수 있으므로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인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자기 아들이 맞고 들어와 한달 봉급을 털어 사람을 사고 집단 보복폭행을 한 사람은 과연 어떤 평가를 받을까? 기껏해야 '빗나간 부정(父情)'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이 고작이고, 주위로부터는 '깡패' 소리를 들을 것이다. 김승연씨의 경우는 도대체 뭐가 다른가? 물론 다른 것이 있다. 그 대단한 국가권력이 알아서 조심하고 되도록 덮어두려고 하며, 피해자나 목격자는 물론 그 일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조차 자신들에게 불똥이 튈까 두려움에 떨어야 한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얼마전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루쿨루스 심문(Das Verhör des Lukullus)'을 읽었다. 이 작품은 로마군 총사령관이었던 루쿨루스(기원전 117~57년)가 죽어 저승에서 재판을 받게 된다는 내용인데 짧은 분량임에도 매우 흥미로운 작품이다. 간단히 소개하자면, 생전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던 루쿨루스는 화려한 장례식을 뒤로 하고 천국행과 지옥행을 결정하는 저승의 재판을 받게 된다. 특이한 것은 저승의 재판에서 배심원들은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한편 '저승의 재판'이란 어떤 종교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하기 보다는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재판(실현되지 못한 정의)'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오늘 날에 있어서도 시대를 뛰어넘는 의미심장한 비유를 갖게 된다.
이번 사건을 보면서 특별히 이 작품이 생각나는 이유는, 마지막 배심원들이 내린 판결 때문이다. 루쿨루스가 이루었다고 주장하는 권력과 부와 명예는 모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상투적일 것 같은 결말에 미리 실망감을 느끼면서 나는 그가 마땅히 불지옥에라도 떨어질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배심원들이 내린 판결은 본질을 향한 브레히트의 날카로운 시각에 다시 한번 감탄을 할 만큼 참으로 의외였다.
저 인간을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빈 공간으로 보내버립시다!
저 인간을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빈 공간으로 보내버립시다!
저 인간을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빈 공간으로 보내버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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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에 사로잡혀 권력으로 악행을 일삼는 자, 재물로 온갖 위세를 부리는 자들에게는 가장 합당한 처벌이 아닌가 싶다.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빈 공간에서 기원전의 로마군 총사령관 루쿨루스 따위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또는 오늘 날의 대한민국 재벌그룹 총수 따위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물론 김승연씨가 저승에서 받게 될 심판에는 관심 없다. 주목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살아 있는 지금이다. 그가 직접 폭력을 행사했거나 지시를 내렸다면 그는 마땅히 처벌받아야 한다. 아울러 그동안 법질서를 우롱한 대가도 반드시 치루어야 한다. 그것은 법적 처벌보다 더 큰 사회적 비난과 조롱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