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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적 중립성?
    Essay 2007. 6. 8. 23:16

    노무현 대통령이 '참여정부정책평가포럼' 강연에서 한 발언과 이에 대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중립의무 위반' 판단은 참으로 흥미로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이런 사건 자체를 대단히 긍정적으로 본다. 넓은 시각으로 보면, 어떤 의미에서건 우리 사회의 정치현실이나 사람들의 정치의식에 신선한 문제의식을 던져주고, 의미 있는 경험의 기회를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서구의 선진국가들에 비교하건 안하건 어느 모로 보나 '정치적 후진국가'라고 할 수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확실히 이런 사건을 통해서도 '의미 있는 정치적 경험'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 곧바로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할 이유도 없을 뿐만 아니라, 사이버 세계의 떠돌이 무사가 되어 정의를 위해 일단 칼을 휘두르고 보는 부질없는 짓을 하지 않아도 된다. 불필요한 감정적 의견표출이 아닌 '균형 있는 판단'을 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이번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판단은 '대통령'도 선거에 있어 중립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공직선거법 상의 공무원
    [각주:1]이라는 기존 헌법재판소의 결정[각주:2]에 기초해, 노무현 대통령의 이번 발언이 그러한 중립의무를 위반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중립의무 위반'은 어차피 형벌이 부과되지 않으므로, 가장 큰 쟁점은 한나라당이 주장하고 있는 공직선거법 제86조(공무원의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 금지 규정)와 제254조(사전 선거운동 금지 규정)의 위반 여부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치열한 찬반논쟁이 있었지만 표결에 의해 간신히 해당사항이 없다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고 한다. 그러니까 선관위는 몇 시간 동안 티격태격 회의를 한 끝에 가장 난감한 위치에 있는 '위원장'에 의해서 나름의 '중립(?)'을 택했다는 것이다. 이같은 선관위의 중립은 어느 정도 운이 따라 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하더라도 개인적으로 바람직한 선택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당연한 일이겠지만 결국 양쪽에서 불평불만이 쏟아지는 결과가 돼버렸다.

    그런데 다소 복잡해진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아도 그냥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 있다. 바로 선거에 있어 '중립성'이 문제된 것이 처음 있는 일인가, 즉 노무현 대통령만이 유독 똥인지 된장인지 가리지 못하고 선거 중립성을 지키지 않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다. 물론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처럼 직접 할 말을 해버리고 결국 욕먹는 대통령이 처음일 뿐, 선거 중립성은 오히려 한나라당이 그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과거의 정권에서 더 지켜지지 않았다. 여기서 드는 생각은, 선거에 있어 집권자나 그 세력이 진정으로 중립성을 위반하는 경우란 대체로 '노무현식'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중립성을 위반하고자 한다면 성공하기 위해서(즉, 효과를 보기 위해서) 보다 은밀하고 치밀해야 하는데, '노무현식'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설령 '노무현식 선거 중립위반'이 명백한 현행법 위반에 해당한다고 하더라도, 그 모습과 결과가 안쓰러울 정도로 순진하다. 중립성 의무를 위반하려면 좀 세련되게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 때문에 나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이 중립성 위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처럼 대통령의 중립성 위반에 대해 선관위 또는 사법기관의 판단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은 물론, 문제제기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시대의 그 조용하고 세련된 '진정한 중립성 위반'들을 생각한다면 웃음 밖에는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차라리 "말조심 안하면 이런 꼴을 당한다"는 정치적 처세의 실패사례라면 모를까 '중립성 위반'이라 하기에 98%가 부족해 보인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번 사건에 있어 노무현 대통령에게 잘못이 있다면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데 있어 너무 '솔직하다'는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 우리 사회에서 꼭 필요한 처세술을 따르지 않은 결과라는 것이다. 이번 사건에서 노무현 대통령에게 가장 어울리는 죄목은 '구설죄(口舌罪)'다.

    노무현 대통령과 그를 지지하는 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개인적으로는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선관위의 결정[각주:3]과 한나라당의 공세에 대한 노무현 대통령의 항변을 보면 나는 오히려 대통령의 '설득력 있는 주장'에 대한 제대로 된 반론이 제시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다.[각주:4] 한나라당의 주장은 "명백히 위반했으니까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지만, 법으로 규제하고자 하는 대상 자체가 애매모호한 상황이므로 충분한 근거가 제시되지 않는다면 자신들의 정치적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한 억지에 불과하다. 즉 그들은 "노무현 대통령이 선거 중립을 위한 규정들을 위반했다"고 하면서 불확정적인 사실을 명백한 것으로 선전하며 방어와 공격을 동시에 하는, 말하자면 일석이조의 '선거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각주:5] 나는 이들 어느 쪽에도 속해 있지 않지만, 최소한 역사적 맥락에서 '선거 중립성 위반의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한나라당의 억지에 보탬이 되고 싶지는 않다.

    한편, 벌칙규정 없이 공무원의 선거 '중립의무'만을 규정하고 있는 공직선거법 제9조에 대해 '유명무실'하다는 의견이 있지만 나는 그런 생각에도 동의할 수 없다. 굳이 벌칙규정이 없어도, 그것은 공무원이기 이전에 국민이기도 한 사람들에게 인정되어야 할 정치적 자유를 실질적이며 포괄적으로 제한할 수 있는 '유명유해'한 규정이다. '선거 중립성'은 말할 것도 없이 공정한 선거를 위해 반드시 지켜내야 하는 대단히 중요한 사항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거 중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공무원의 정치적 권리를 포괄적으로 제한할 이유는 없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공무원은 정치중립적 동물'이란 말인가? 선거 중립성을 위해 필요한 것은, 공무원이라는 직위에서 그들이 갖는 권한이나 그가 행하는 직무와 관련하여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금지하면 되는 것이지, 공무원이기 이전에 '국민'인 그들의 정치적 자유까지 제한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그런 식의 선거 중립성은 단언하건대 '허구'에 가깝다. '중립의무' 규정이 그들의 정치적 의지까지 중립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명목적인 중립성 의무 규정은 그들이 갖고 있는 정치적 의지를 음성화 하면서 한편으로는 그것을 마치 '공정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번 선관위 위원들의 결정을 보자. 노무현 대통령이 공직선거법 관련 규정을 위반했는지 여부에 대한 그들의 찬반견해와 표결은 중립적인 것인가? 말할 필요조차 없이 그들의 견해와 표결조차도 그들 각자의 '정치적 의지'를 담고 있다. "대통령 노무현이 공직선거법 제9조를 위반했다"는 결정은 선관위가 '중립성의 화신'이 되어 내린 초인적 결정이 아니라, 선관위라는 조직 내부의 정치적 표결에 의한 결과이다. 그럼에도 선관위에 판단을 맡기고 그 결정을 '중립적이며 공정한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제도적 한계라고 할 수 있지만, 공무원에 대한 포괄적인 '중립성 유지의무'가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가를 알게 해주는 좋은 예이다. 요컨대 '공무원'이라고 해서 '투표권'만 있을 뿐 나머지 권리를 포괄적으로 금지할 이유는 없다.
     
    설령 선거와 관련이 있다고 하더라도, 대통령은 왜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밝힐 수 없다고 하는가? 나는 오히려 그런 의견을 듣고 싶다. 노무현이 아니라 이명박이나 박근혜가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의견이 어떤 것인지 듣고 싶다는 것이다. 그것이 겉으로는 중립성을 유지한 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은밀한 압력을 행사하는 것보다는 백번 낫다고 할 수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권력'의 불법적이며 부당한 행사이지 얼마든지 국민의 평가대상이 될 수 있는 '발언'이 아니다. 대통령의 정치적 의견이나 발언이 국민을 구속하는 명령도 아니며, 선거과정에 대한 압력행사도 아니다. 이번 사건은 오히려 '조롱거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중립성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터져나오는 그 조롱들은 역설적이게도 '대통령의 정치적 발언'이 선거의 중립성 유지를 위한 금지대상이 될 이유가 별로 없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공무원에 대한 포괄적 선거중립의무 규정의 "처벌규정이 없어 유명무실하다"는 생각은 수긍하기 어렵다. 그 생각의 진정성을 곱씹어 보면 "선거에 있어 중립성이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런 생각에는 "처벌규정이 있어야 하는가? 오히려 정치적 발언의 자유를 인정할 필요성은 없는가?"라는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없다. 그것은 정치적 자유에서부터 출발해 공정한 선거를 위한 합리적이고 치밀한 제도를 만들려는 의지가 아니라, 단순히 선거법에 그런 규정이 있으므로, 그것을 당연히 중립성 유지에 필요한 것으로 보고, 그래서 처벌규정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불과하다. 이런 인식을 '정치적 후진성'이라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선관위가 인정한 중립의무 위반도 이러한데, 사전선거운동금지 규정의 위반은 아니라는 선관위 결정에 계속 반발하는 한나라당의 주장은 불순하다고 밖에는 할 도리가 없다. 그들에게 과연 '정치적 자유'의 증진을 향한 상상이 있는가? 비록 경쟁자라고 하더라도 같은 당의 후보에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흑색 의혹 유포에 흠집내기 밖에 없는 그들에게 과연 공정한 선거에 대한 진정성이 있는가?

    대통령 노무현을 조롱하는 데에는 전혀 불만이 없다. 대통령을 조롱하는 것도 (이전에는 누릴 수 없었던, 그러나 지금은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정치적 자유이니 향유하라. 그러나 대통령 노무현만을 조롱하고 있다면 그것만큼 한심한 일은 없을 것이다. 무엇이 자유이고 무엇이 압제인지, 무엇이 진보이고 무엇이 퇴보인지 구별하지 못하거나 상상하지 못하는 대중에게 정치적 축복이란 없다. 물론 노무현 대통령이 곧 축복이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앞으로도 축복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누가 되든 노무현보다는 나은 대통령이 나올 것이라고? 그래서 공정한 선거를 위해 노무현은 입다물고 있어야 한다고? 노무현이 또 입을 열지도 모르니 처벌해야 된다고? 참으로 한가한 생각이다.

    어떤 선거이건, 늘 보던 대로 지긋지긋한 '권력쟁투'를 보게 될 것이다.
     
    그때그때 규칙적용이 달라지는 '다변칙 정치 이종 격투기'에서 노무현 선수가 야유 받는 아마추어라면, 한나라당 선수들은 돈과 혈통을 자랑하는 프로라는 게 관전 포인트이다.




    1. 공무원의 중립의무를 규정하는 공직선거법 제9조 제1항은 "공무원 기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자(기관·단체를 포함한다)는 선거에 대한 부당한 영향력의 행사 기타 선거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본문으로]
    2. 헌법재판소는 "공선법 제9조의 '공무원'이란, ‥‥ 선거에서의 중립의무가 부과되어야 하는 모든 공무원 즉, 구체적으로 '자유선거원칙'과 '선거에서의 정당의 기회균등'을 위협할 수 있는 모든 공무원을 의미한다. 그런데 사실상 모든 공무원이 그 직무의 행사를 통하여 선거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에 있으므로, 여기서의 공무원이란 원칙적으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모든 공무원 즉, 좁은 의미의 직업공무원은 물론이고, 적극적인 정치활동을 통하여 국가에 봉사하는 정치적 공무원을 포함한다. 다만, 국회의원과 지방의회의원은 정당의 대표자이자 선거운동의 주체로서의 지위로 말미암아 선거에서의 정치적 중립성이 요구될 수 없으므로, 공선법 제9조의 '공무원'에 해당하지 않는다. 따라서 선거에 있어서의 정치적 중립성은 행정부와 사법부의 모든 공직자에게 해당하는 공무원의 기본적 의무이다. 더욱이,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으로서 공정한 선거가 실시될 수 있도록 총괄·감독해야 할 의무가 있으므로, 당연히 선거에서의 중립의무를 지는 공직자에 해당하는 것이고, 이로써 공선법 제9조의 '공무원'에 포함된다"고 한다. [헌법재판소 2004.5.14. 선고 2004헌나1]. [본문으로]
    3. 선관위의 결정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현실정치의 여건에서 큰 갈등 없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원칙적으로는 선관위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공무원으로서 갖는 직무 또는 권한과 관련이 없는 한 공무원에게도 정치적 발언과 행동에 관한 자유가 보다 폭넓게 보장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즉 노무현 대통령의 이번 발언도 (현행법 위반 여부와는 별개로) 궁극적으로는 보장되어야 할 '정치적 자유'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본문으로]
    4. 헌법학자나 정치학자들은 이점에 관하여, 대통령이 '정치'와 '선거'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거나, 대통령의 주장에도 일리는 있으나 방법이 잘못됐다는 비판을 하고 있다고 한다. '정치'와 '선거'는 구분될 필요성이 있지만, 역시 애매모호하다. 실정법과 제도를 존중한다고 해도 그렇다는 것이다. 어디까지가 정치이고 또 어디까지가 선거인가? 회의주의를 유포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치발전의 역사적 경험이 일천하여 발생한 현실의 애매모호함으로 '자유'를 재단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단언하건대 헌법학자나 정치학자들의 주장은 '제발 문제를 일으키지 말고 하던 대로 하자'는 뜻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본문으로]
    5. 이 사안과는 전혀 관계가 없지만, 한나라당이 국가보안법을 선호하는 방식도 이와 비슷하다. 명백한 자유도 죄를 뒤집어 씌어 억압하는 것이 그들이 해 온 일이지만, '자유'와 '법 위반' 사이에 걸쳐 놓은 애매모호함을 그들은 항상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사용해 왔다. 그들이 법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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